용사의 마왕님 24화

용사의 마왕님 24화

부제 : 무제




늘 차갑고 싸늘해 한겨울 같았던 마계에 한 용사가 나타난 이후로 작은 봄바람이 불면서 마계를 초봄으로 바뀌었다.

특히 많이 바뀐 곳은 마왕이 있는 마왕성. 그곳은 초봄이 아닌 완벽한 봄이 찾아왔다. 오로지 한명의 용사 때문에.

항상 어둡기만 했던 마왕성은 조금씩 밝아지고 어느새 인간들의 왕이 있는 성보다 더욱 밝아졌다. 밝아진 마왕성의 연회장에서 은발을 가진 마왕이 나온다.

"아델, 태일은?"
"태일님께선 방에서 주무시고 계신다고 시종이 그랬습니다."

태일이 자고 있다는 아델의 대답이 마왕의 표정이 심란해진다.

"요새 잠이 많아졌어."

마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태일이 자는 방으로 향한다. 그런 그의 뒤를 쫓는 아델. 그들은 에리샤가 대기하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예고 없이 온 마왕과 아델이었지만, 에리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익숙하게 인사를 한다.

"태일은 아직도 자고 있나."
"아까 잠드셨으니, 지금쯤 깨어나셨을 거예요."
"약은 먹고 잤겠지."
"아뇨, 먹길 거부하세요."

마왕은 아무런 말 없이 옆에 시녀가 들고 있던 약과 물이 있는 쟁반을 뺏어 들어 방으로 들어간다. 마왕이 들어가면서 살짝 열린 틈으로 보이는 태일의 모습. 조금 전에 일어났었는지 침대에 앉아 있었다.

"태일."
"....세이, 오늘은 빨리 왔네."
"평소대로 왔을 뿐이다. 언제 일어났어?"
"....으음, 방금?"

왠지 모르게 한 템포 느린 태일의 대답. 그러나 마왕은 개의치 않는지 계속해서 태일에게 말을 건다. 오늘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으며, 그 이야기 때문에 화가 났었다, 등등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한다.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오늘 회의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으응, 그랬구나.."
"그리고.."

마왕이 말하면 태일은 듣는다. 과거와 다른 포지션이 되었다. 마왕이 말하면 태일은 그저 들을 뿐이었다. 결코 반응을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마왕은 조심스레 태일에게 산책을 권한다.

"...산책..?"
"그래, 산책. 오늘 밤 공기가 딱히 차갑지 않은 거 같다. 공기도 공기지만 달이 예쁘다고 하더군."
"....아니, 안 갈래. 가고 싶지 않아."
"...그래?"

산책을 좋아하던 태일이었지만 날이 지날수록 태일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는 것을 더 선호했다. 마왕은 시원한 밤 바람이 방 안에 들어오게 창을 열었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눈을 감으며 맞던 태일은 부드럽고 시원한 밤 바람이 기분이 좋았는지 흥얼거린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짓는 태일을 멀리서 바라보는 마왕이었다.

"흐아암.."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가 작은 하품을 하자 마왕은 흥걸거리던 태일에게 말을 건다.

"태일, 졸리나?"
"....응, 조금. 자도 돼?"
"약간 먹고 자."
"....싫은데."

방에 들어오면서 챙겼던 약을 거부하자 마왕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한번 더 권유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역시나 아까와 같은 먹길 싫다는 대답이었다.

"태일, 한번만 참고 먹을 수 없겠나? 그래야 빨리.."
"세이, 먹든 안 먹든 똑같아. 어차피 죽을텐데, 안 그래?"

왠일로 빠른 대답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대답은 마왕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런 말 하지마라."
"내 나이가 벌써 60이 훌쩍 넘었어."

마왕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주름이 가득한 태일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태일은 잡고 있는 마왕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 이불 속으로 넣는다. 마왕은 잠시나마 느꼈던 따뜻한 태일의 온기를 놓치기 싫은지 주먹을 쥔다.

"태일."
"....주름 만져지잖아. 난 그거 싫어."

태일은 마왕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태일이 마왕을 피하면 피할수록 오히려 마왕은 더욱 더 피하는 태일의 눈을 집요하게 쫒아간다.

"그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여신이야. 늘 날 두근거리게 만들어. 얼마나 더 말해야 믿어주겠어?"

물론 태일은 마왕을 믿는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늙은 자신의 모습과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마왕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약 먹을테니까, 그만 나가줘.."
"....그래."
"....잘가."
"태일. 내일 아침 먹고 산책 하는거 어떤가."
"....내일은, 산책 할게."

산책을 한다는 태일의 대답이 얼마나 기뻤는지 마왕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미소를 짓고 나이를 먹어 하얗게 변한 태일의 머리에 키스를 남긴 후, 방을 나온다.

"내일 아침 먹고 태일과 산책할거니까 준비해둬."

마왕성은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정원사들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 일터를 향한다.

"어서 흙을 더 가져오도록!"
"이쪽에 물 좀 뿌려줘!"

현 태일이 있는 방, 창문 앞에 있는 정원 하나를 제외하고 몇 년전의 태일의 마지막 산책을 끝으로 한번도 관리를 안해 정글이 된 정원들이 하나 둘씩 제 색깔을 뿜낸다.

"...와아.."
"..드디어 정원다운 정원이네."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정원들을 보며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정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옛 마왕성을 되찾은 듯한 느낌에 묘하게 마왕과 고용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이."
"아아, 태일."

에리샤에게 기대어 나오는 태일이었지만 고용인들은 오랜만에 보는 태일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고용인들은 태일에게 다가가는 마왕을 지나쳐 태일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오늘 날씨 좋죠?!"
"하늘이 태일님 산책하는 거 알고 있었나봐요~"
"태일님 덕분에 오랜만에 정원을 손 볼 수 있었습니다!" "태일님께서 좋아하시는 꽃은 아직 계절이 아니라 아쉽지만, 더욱 아름다운 꽃들로 꾸며보았습니다!"

태일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와 에리샤에게 기대고 있던 자신의 몸을 이끌고 마왕에게 걸어갔다. 힘겹게 걸어와 마왕 앞에 서서 그를 안았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지?"
"....응, 좋아."
"날씨가 좋을 때마다 나오지."
"....그래야겠다."

마왕은 전보다 더 갸름한 태일의 어깨를 감싸며 앞으로 걸어갔다. 태일이 무리하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그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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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7 23:19 | 조회 : 1,960 목록
작가의 말
하얀 손바닥

뭔가 갑자기 글 분위기가 바꼈긴했지만.. 재밌게 봐주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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