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살려주세요, 폐하.

"아르젠, 내가 왜 직접 그들의 혀를 잘랐는지 그대는 아는가."


지하실에서 죄인들을 실컷 고문하고 온 사람답지 않게, 한없이 가볍고 장난스러운 물음이었다. 기어코 온몸에 묻은 비릿한 피 냄새를 지워야겠다며, 나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는 그가 내민 첫 질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의 심기는 건드리지 않도록 항상 최선의 답을 내놓아야만 했던 나는 타월로 그의 넓은 등을 쓸며 말을 이었다.


"... 잘은 모르나 선황 폐하를 욕보인 자들이 아닙니까. 그 이유 때문이.."

"아르젠 레크오디아, 널 자기 가문으로 끌어들여 더 큰 권력을 얻고 싶다고 하더구나. 제 사윗감으로 제격이라나 뭐라나......."


____설마 일개 기사 단장인 내가 당신을 배신할까 불안한 것일까. 급하게 들어온 의문의 말에 잠시 멈칫한 나는 하던 일도 멈춘 채 그의 하얀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그대로 황제는 뒤돌아 희고 긴 손으로 나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나의 애첩이 되어 달라는 청도 거절하는 넌데, 가문의 사위라니...... 웃기지 않은가."

"......."


황제의 새파란 두 눈동자 안에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일렁였다. 그 어여쁜 두 눈 속에는 누군가 '자신의 것'을 탐했다는 분노와 나에 대한 그릇된 집착이 가득하여 꼭 잡아 먹힐 것만 같아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보다도 직접 죄인들의 살을 찢고, 자르며 고문한 이유가 고작 내가 시초였다는 말에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 폐, 폐하............."

"내가 저들의 가문을 멸문 시키고, 돌아오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네가 내 첩이 되어 내 밑에서 구르는 것이 빠를까."


겨우 피했던 시선을 다시 느리게 마주한 황제는, 그대로 제 흰 손가락으로 내 목을 조용히 옥죄었다. 얇은 손가락과는 달리 더욱 강한 힘이 실렸고 그대로 내 미간은 처참히 구겨졌다. 조용한 욕실 아래 나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말고는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했다. 이후 찰나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____


" 나의 하나 뿐인 첩이 되어 다오. 더 애타게 하는 것은 아무리 너라도 용서치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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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3-10-24 23:35 | 조회 : 1,909 목록
작가의 말
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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