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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면 날 아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그렇게 안 어울리진 않을텐데 하고 부정하면 꼭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웃긴 눈을 한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확실히 의외일 만도 하다.

왜냐면 나는 지독한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독하냐면 종종-사실 자주- 분신을 만들어서 그 분신에게 식사도, 샤워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심지어 잠을 자는 것마저!- 전부 시키고 싶다 생각할 정도니까.

그래, 그랬다. 분신술.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좋지, 분신술 좋은데..."

"그게 이런 형태는 아니었는데..."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사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똑같았다. -안타깝게도!

부스스한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 약간 그을린 듯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뺨 위에 여우 수염 모양 자국.

그렇다.

나루토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지구 상에 이런 일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있던가? 나루토 세계관이 지구에 존재하는지는 넘겨두고 어쨌든 나는 지구 출신이란 말이다!

아까 책을 좋아한다는 얘기로 돌아가 말한다면 나는 소설, 시, 수필 등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즉, 웹소설조차도 좋아했다는 것이다. 책 뿐만이 아니라 만화나 애니도 꽤 좋아했던 나는 이 상황이 뭔지 제대로 알았다.

이건 3대 클리셰인 '회빙환' 중 '빙'이다. 빙의라는 거다.

내가, 나루토에.

다시 말하면 이렇다.

'귀차니즘인' 내가, '열정과 노력의 대명사인' 나루토에 말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모순인가.
차라리 시카마루였다면 편했으려만... 물론 아무리 나라해도 구름이 되고싶다는 시카마루에는 못 미치지만, 나루토보다는 낫겠지!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세상 자체에 있었다. 이 세상이라 함은 나루토 세계이자 나뭇잎 마을에 있는 이 상황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나 누구? 나루토.
나루토는 뭐지? 구미 인주력이자 4대 호카게의 아들.

아, 참고로 나루토는 나뭇잎 마을 공식 왕따이다.


......



나는 그렇게 탈주를 결심....


아니! 탈주는 안된다.

탈주하면 인주력인 나루토를 어떻게든 생포해서 가둬놓고 실험을 하든지 해서 이리저리 써먹으려 들텐데! 무엇보다 탈주같은 귀찮은 짓은 하기가 싫다.

하지만 마을에 있으면 귀찮은 것 뿐만 아니라 여러 불편들을 감수해야 할거다.
미친 척하고 설칠 수도 없는게, 나루토는 어린아이지만 인주력이라는 이유로 암부들이 상시 감시 중인 아이다. 아마 무슨 일이 생길라치면 곧장 제압, 최악의 경우 사살하기 위해서겠지.

21세기 대한민국 출신인 나는 이 상황이 명백한 인권 침해임에 동시에 어린아이에겐 더더욱 말도 안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있지만, 어린애들도 닌자로 육성해 급하면 전쟁에도 내보내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나루토 세계관에서는 꿈에도 먹히지 않을 주장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때 나루토를 굉장히 좋아했었다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이 부르던 별칭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해파리', '기름칠 덜 된 로봇', '이지적인적 하는 미친놈' 등 -갈수록 비난의 의도가 짙어지는 것 같다면 기분탓일 것이다- 여러모로 감정이 없다는 평을 들어온 나였지만, 니루토를 볼 때만큼은 누구보다 감정적이 되던 나였다.

특히 *'호랑이' 가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선 탄식을 감출 수 없었는데, 이는 분명 슬픔과 안타까움에 마지못해 흘린 감정의 편린일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나루토를 굉장히 열심히 시청했던 나는 웬만한 장면들은 기억하고 있다 자부했다.
예를 들어 나루토가 돈이 없어 라면 한 그릇도 못 사는 장면 같은...

아 역시 탈주할까...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귀찮다고 판명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귀찮은 일이 우수수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그러면 걷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정말로 결심했다.

"이불 밖은 위험해..."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나루토 6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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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10-28 19:12 | 조회 : 710 목록
작가의 말
Hoo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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