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시작과 처음(2)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드리스는 인간아기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할 때에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였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새끼드래곤과 같은 존재.


빛과 어둠을 비롯한 모든 마석들은 이드리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전부가 시초신에게서 뿌리를 내린 생명체인데, 그렇지 않은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드리스가 차차 지능을 가지게 되고, 다른 마석처럼. 어른이 된 인간처럼 뚜렷히 본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알에서 깨어난 다른 드래곤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마석들 뿐이던 시초신의 세계는 드래곤들도 함께 공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래에는 인간과 동식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계, 그리고 다른 차원의 공간에는 마물들이 살아가는 마계가 존재했습니다.

빛은 자신의 힘을 담아 만든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어둠 또한 그의 능력을 쏟아부운 마물들을 아꼈습니다.
그들은 각각 100년마다 인간과 마물을 살펴보러 내려가곤 했습니다. 몇 만년을 살아가는 시초신에게 100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으니, 굉장한 빈도였습니다.



곧이어 빛과 어둠은 각각 자신을 지켜주는 드래곤을 하나씩 정하기로 마음을 잡았습니다. 사실 마석들 전부가 자신들을 위한 드래곤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드래곤들은 가장 먼저 태어난 이드리스를 중심으로, 마석들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빛과 어둠은 각각의 마석에 그들의 이름과 영혼를 걸었고,

어둠은 이드리스가, 빛은 '리넷 로잘렌느' 라는 이름의 드래곤이 각각 맡게 되었습니다. 이드리스 다음으로 가장 강한 드래곤이 로지였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이드리스의 사이도 각별했지만 빛과 로지의 관계는 그 어떤 마석과 드래곤도 넘지 못했습니다. 블로우와 이드리스의 관계도.


로지는 이따금씩 빛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나의 주군께서 죽음을 명하신다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신의 선택을 따릅니다."

그렇게 듬직한 말이 없을 수가 없다.
빛은 로지가 입을 열때마다 그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든든한 지원군같은 로지를 싫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아나는 마물 보다는 드래곤을, 드래곤 보다는 인간을 좋아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깃든 것을 사랑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마석이 없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이 하나도 닿지 않은 드래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신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힘을 합하여 창조를 만들고 그 창조가 마석들을 만들었지만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애정은 있지만 빛이 인간에게, 어둠이 마물에게 사랑을 주는 것만큼 마석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서운함을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마석들은 태초신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니, 그들의 부모를 증오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날 이아나는 리넷의 날개에 기대어 앉으며 리넷에게 말했습니다. 리넷은 언제나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입장이었습니다.

"부탁이 있어. 로지."
그날따라 빛의 목소리는 힘이 없게 들렸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빛과 함께했던 로지는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랬기에 더 집중하여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만약 내가 죽어서 환생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아무것도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내 몸속에 잠들어 있으며 내 기억을 꺼내 주게 도와 주겠니?"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새,
리넷 로잘렌느.

빛은 로지의 부드러운 분홍빛 깃털을 쓰다듬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달이 뜨기 전, 해가 지고 난 후의 새벽하늘 만큼이나 어두워보였습니다.

"물론입니다."
리넷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빛이 어두운 표정이었던 것은 인간들의 삶을 오랜시간 봐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보는 것으로 빛과 어둠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피조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이 발전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둠. 이것 좀 봐."

어느 날 빛은 종이 몇 장을 손에 들고 어둠에게 찾아갔습니다. 어둠은 갓 태어나려는 마물을 지켜보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빛이 쥐고 있던 나무를 갈아만든 종이에 적힌 글자를 찬찬히 읽어내려갔습니다.
"....이름이네.
이걸 왜 들고 온 거야?"

종이에 적혀 있던 글자는 「이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많은 이름이 적혀있던 이름 리스트.


"인간들이 만들던 이름들을 적어온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왜 그랬는데?"
"저들은 자신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름을 만들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다녀. 우리도 언제까지고 빛, 어둠 할 수는 없잖아."
"...그런가."
어둠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빛의 의견에 대해 자신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아. 좋은 것 같아."
어둠은 잠시 뒤 빛의 의견에 동의하였습니다.
둘은 곧이어 빛이 들고 온 기다란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쓸만한, 세계를 만든 신들에게 어울릴만한 이름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며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의 시간, 또 3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둘은 마음을 잡았습니다.

"나는 「블로우」로 할래."
"블로우?
그게 무슨 뜻인데?"
빛은 어둠의 말을 듣고 목록을 쭉 살펴보았습니다. 목록에는 블로우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그 뜻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이아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분명 종이를 보여주며, '인간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의 뜻을 가진 이름을 짓는다' 라고 설명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곧이어 이어지는 블로우의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뜻이 없다는 건 내가 그 뜻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까.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나가겠가는 의미야."

빛은 어둠의 말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런 이름을 짓고 싶다.' 라고.


그리하여 빛은 「이아나」라는 이름을, 「블로우」라는 이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둘 다 그 어떤 뜻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이름.


인간에게서 배운 점은 이름을 짓는 것처럼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빛과 어둠은 인간으로 위장해 인간들의 삶을 엿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아마 인간을 보고 온 다음 날. 그 날부터 빛은 즐거운 이야기를 들어도, 로지와 함께 있어도 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걱정하던 어둠은 빛에게로 다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무슨 일이야? 몇십년 전부터 의욕도 없어보이고."
"아냐."
빛은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손짓을 한번 해보였습니다. 그 모습은 신경쓰지 말아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둠은 지금은 말하기 싫은가보다, 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를 비켜주려 생각했습니다.

"..블로우."
하지만 그 이전에 빛이 먼저 어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둠은 돌리려던 고개를 빛으로 다시 향하게 했습니다.

"고민이 있어.
모든 인간들은 죽고 환생을 하며 윤회하는데, 우리도 언젠가는 죽게 되려나. 자꾸 생각이 들더라고."

빛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어둠에게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나, 내가 만든 죽음이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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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08 07:40 | 조회 : 1,726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피곤에 쩔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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