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의 마왕님 19화

용사의 마왕님 19화

부제 : 소설책



산책 아닌 산책을 한 날로부터 내내 난 한번도 이 방을 나간 적이 없었고 오로지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 하나로 의지하며 날을 보냈다. 날이 지날수록 점차 나는 시간 감각을 잊어버려 오늘이 며칠짼지 모르는 채 지냈다.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세이를, 마왕을 기다리는데 지쳐가 무력감을 느낄 때쯤 알렉스는 자기 방에 있는 책들을 가져다줬다.

"태일, 오늘은 특별하게 소설책 가져왔어요."
"...웬일이야. 매일 경제학 관련된 책을 갖다 주더니."

알렉스는 하루를 멀다하고 매일 같이 같은 시간대에 들어와 말 같지 않은 소리 혹은 책을 가져와 그나마 날 외롭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 그래서인가 처음보단 그가 편해졌다.

날 납치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편하다고 느끼고 있다.

"저에겐 경제학 관련 책밖에 없었으니까요.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더라고요. 심심풀이로 읽어봤는데 재밌어요. 태일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같고."

소설책을 든 알렉스는 방에 가구라곤 하나뿐인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노란 표지를 한 두꺼운 책을 받아 자연스럽게 알렉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두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매번 봐도 늘 신기해요."
"뭐가."
"검은 머리요. 그러고 보니 태일이 살던 세계에선 검은 머리가 흔하다고 그랬죠?"
"오히려 당신 같은 머리 색은 보기 드물었다고."

알렉스는 책을 들고 오면서 가져왔던 작은 그릇에 담긴 청포도를 하나씩 뜯어내 입속으로 넣어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타르트?"
"내일은 타르트 가져오도록 할게요. 아, 거기 부분 설레지 않았어요? 난 되게 설렜는데."
"어. 그러네. 셀레는 부분이네."
"생각보다 소설이라는 거 재밌더라고요. 내일도 가져올까요?"
"로판으로."

입안에 톡 쏘는 상큼한 청포도는 맛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어느새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페이지의 모서리를 살짝 접은 뒤, 책을 덮고 몇 시간 동안 누워 있던 알렉스의 허벅지에서 일어났다. 내가 책을 덮었다는 건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뜻과 똑같았다.

알렉스는 내 뜻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 또한 청포도가 가득 담겨 있었던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갔다.

"내일은 조금 일찍 올게요. 뭐 필요한 건?"
"딱히, 없어."
"네. 좋은 꿈 꾸세요."

알렉스가 나가면 또다시 방은 금세 조용해진다. 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벌레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또 하루를 보냈다. 태일이 납치된 후부터 마계는 우주중한 날이 계속 되고 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주일이나 지났다."
"....죄송합니다."
"멍청한 것들."

마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옥좌에 앉아 자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자들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다가 아델을 부른다. 방금전까지 보이지 않던 아델은 어느새 마왕 옆에 서서 그가 자신에게 명을 내리기를 기다린다.

"지금 바로 인간계로 향한다."

마왕의 무심한 듯 뱉은 말은 귀족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리이었다. 그곳에 있던 몇명의 귀족은 조아리고 있었던 고개를 들어 마왕을 바라봤다.

"고개 안 숙이지?"
"히익.."

말 한마디에 고개 들었던 귀족들은 퍽이 아닌 쾅 -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아미를 박았다. 그들 중 한명은 잘못 박았는지 붉은 색의 피가 이마에서 흐르기 시작한다.

피를 흐르고 있는 귀족을 보고 혀를 찬 발렌시아는 아델과 함께 성을 떠나 인간계로 향하려는 마왕을 붙잡는다.

"그건 옳은 선택이 아닙니다. 마왕님뿐만이 아니라 저희들에게도 태일님 소중한 분이십니다. 허나 당신은 마계의 왕, 우리들을 통치하는 유일한 왕입니다. 그런 당신이 마계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혹시나 딩신이 다친다면.."

피를 흐르는 귀족이나 이마를 박은 귀족들이나 여전히 조아리고 있는 귀족들이나,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발렌시아의 말에 동의하는 듯 조심히 고개를 들어 끄덕인다.

"그대는 내가 다쳐서 올 마족으로 보이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한낱 인간때문에.."
"태일은 한낱 인간이 아니야. 내가 돌아올때까지 체이스 셀 발렌시아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겠다."

발렌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뒷짐지고 마왕을 향해 허리 숙인다. 자신의 뜻을 받아드리는 발렌시아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며 마왕은 아델과 함께 성을 나선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점차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행운을 빌어주는 발렌시아였다. 태일을 납치한 알렉스는 마왕이 오는지 모르는 채 자신의 여동생, 레이나가 연 티파티에 향한다.

"어머, 황태자 전하."
"오라버니..?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혹 내가 티파티에 방해라도 된것이냐?"
"네? 아뇨.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갑작스러운 알렉스의 등장에 당황한 사람은 레이나, 그녀 혼자였다. 티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옷차림을 정돈한다.

알렉스의 눈에 들도록 옷차림을 정돈하는 영애들을 뒤로하고 레이나는 조심스레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묻는다.

"영애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모든 물어보세요!!"

한 영애는 알렉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물어보라 말했고, 알렉스는 그 영애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준다. 알렉스의 미소에 좋아하기도 전에 다른 영애들에게 눈초리를 받아 시선을 아래로 두는 영애였다.

"저번에 추천해준 책을 재밌게 읽어 다른 책도 추천 받고 싶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저번에 가져갔던 소설책도 벌써 다 읽어가 벌써부터 다른 책을 찾던 태일의 모습이 떠올라 알렉스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연모와 사모의 한글자 차이' 라는 책은 어떠신가요?"
"책 제목만 들었는데도 재밌을거 같군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언제든 물어보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레이나와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소설책을 보며 재밌게 읽을 태일의 모습에 알렉스는 티파티에서 나와 윈더를 불러 '연모와 사모의 한글자 차이'를 가져오라는 명을 남긴 후, 자신은 태일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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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02 17:21 | 조회 : 2,15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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