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 비서 아닌데요







정우연은 지나가던 개만큼이나 흔한 사람이다. 적당히 친구도 많고, 선후배, 교수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너무 평범해서 그냥 모르고 지나칠 만한 사람. 굳이 수식어를 붙인다면 '평범한' 일 정도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

“드디어 마쳤네.”

“…….”

“야, 정우연.”

“…….”

“이 새끼 또 왜 이래.”

귀에 이어폰을 낀 것도 아닌데. 정우연은 김진성이 아무리 그를 불러도 묵묵부답이였다. 그의 시선이 쳐박힌 곳은 휴대폰 불빛 속 자리한 작은 세계 뿐이였다.

“야!”

저 새끼야말로 왜 이래. 강의실이 떠나가랴 소리치는 김진성의 입을 틀어막고, 정우연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껐다.

“좀 닥쳐봐. 너 때문에 집중 깨졌잖아.”

“으븝, 이거 놔봐. 집중? 집주웅?”

제 입을 틀어막은 정우연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부르짖는 목소리가 시끄럽다. 그래. 감흥이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어이가 없다는 듯 따져드는 김진성을 두 손으로 밀어낸 정우연이 내심 목소리를 낮춘다.

“이 형이 책 좀 보겠다잖아. ”

“지랄. 대체 무슨 책이길래 겜창인 네가 강의시간에 게임도 포기하고 글을 읽냐?”

“……몰라도 돼.”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흐음,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내던 김진성이 응큼하게 웃는다. 설마 19 소설? 괜찮아, 나도 자주 보는데 뭐가 부끄럽다고 숨기냐. 오묘한 미소가 숨길 생각도 없이 다가온다.

“개소리 마. 아니야.”

“에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추천이나 해줘, 어?”

멍멍, 개소리는 개 집에서나 하세요.

막상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9는 맞았으니까. 장르가 달랐을 뿐이지.

어제, 대학 동기가 내 눈 앞에 웬 웹소설을 들이밀었다. 제목은 [검은빛 사랑]. 그리고 왼쪽 위에 새빨갛게 표시된 19 딱지. 제목만큼이나 새카만 표지에는 하얀 하트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말했던 한 마디가 아직도 떠오른다.

“읽어.”

그것은 권유조차도 아니였다. 나도 모르게 그 박력에 휩쓸려, 그날 밤 소설을 찾아보았다.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뚱한 표정으로 1화를 누른 정우연은, 2시간 만에 충전해뒀던 만 원을 거덜내고 말았다. 뒤늦게 알게 된 BL이라는 장르에 잠시 흠칫했지만, 재미 앞에는 장사 없다고. 카드에 담겨있던 돈이 우후죽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돈지랄 세례는 결국 완결이라는 글자를 보고 나서야 멈췄다. 정우연은 강의가 마치고도 집에 돌아와 한참을 휴대폰에 시간을 할애했다. BL소설 치고 꽤 긴 편인 500화 남짓한 소설을 거의 하루만에 끝장을 본 것이다.

[검은빛 사랑]의 저자, 동겨울은 BL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인 정우연을 홀릴 정도로 미친 필력을 자랑했다. 캐릭터 서사와 스토리는 어떻고. 뭣 하나 빼먹을 것이 없었다. 주인공에게 심각하게 집착하는 대표이사 공과, 그런 공을 옛적부터 짝사랑하여 상처입으면서도 곁에 머무는, 일개 신입 사원인 주인공. 정우연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릴 지경이였다. 완결이라는 글자가 이토록 아쉬운 것이였나.

-검사랑에미친놈 : 작가님! 단행본은 언제 발매되나요?

단행본 발매와 함께 외전도 추가된다는 작가의 말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정우연은 씰룩거리는 입고리를 차마 누르지도 못하고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댓글을 달기가 무섭게, 답글이 하나 이어졌다.

-검사랑에미친놈 : 작가님! 단행본은 언제 발매되나요?
ㄴ동겨울 : 오늘부터요^^.

어라?

이거 설마 동겨울 작가님?

같은 닉네임이 존재할 수 없는 소설 사이트에, 작가님과 같은 닉의 사람이 내 댓글에 답을 달아줬다?

“어, 어악?”

정우연은 비명도 뭣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눈을 깜빡거리고, 비벼봐도 확실한 세 글자였다. 동겨울.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입을 틀어막은 손 아래로 짭짤한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착각이 들었다. 정우연은 20살 이후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 방방 뛰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안에 단행본 발매니까 대기타야지.”

현재 시간 11시 24분. 12시 안에 발매된다는 이야기니, 기다릴 가치는 높았다. 정우연은 단행본의 첫댓글이 되겠노라 굳게 다짐하고 침대에 기부좌를 틀었다.

기다리자. 기다리면 낙이 올것이니라.

페이지를 몇 번이나 새로고침하고 뜬 눈으로 12시 정각을 맞은 정우연은 허탈해졌다. 단행본은 개뿔, 공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기대한 내가 미쳤지. 과제나 해야겠다 싶어 휴대폰을 집어던지려던 그의 손에서 띠링, 하는 알림소리가 났다. 과제를 왜 해. 내가 언제 포기하려했다고. 정우연은 당장 알림을 확인했다.

-검사랑에미친놈 : 작가님! 단행본은 언제 발매되나요?
ㄴ동겨울 : 오늘부터요^^.
ㄴ동겨울 : https://www.BlackyLove0000/zero

“이건 또 뭐야…?”

확실히 닉네임은 작가님이 맞다. 작가나 되어서 독자한테 이상한 사이트 주소나 보낼 리는 없을텐데. 혹시 단행본이 타 사이트에 발매된걸까. 괜한 의심을 뒤로 하고, 정우연은 링크를 클릭했다.

타고 들어간 사이트의 화면을 채우는 것은 그저 검은색 화면에, 중간에 위치한 하얀 하트 아이콘이였다. 꼭 표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하트 아이콘이 녹아 없어지는 모션이 나왔다.

곧 하얀 글자가 또박또박 세겨지기 시작했다.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정우연…]

“이런 미친.”

소름끼칠 정도로 반복되는 자신의 이름이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나갔다. 정우연은 놀라 뒤로가기와 홈 버튼을 연타했지만 사이트가 나가지는 일은 없었다.

“망할…!”

키를 누르는 것을 포기하고, 정우연은 휴대폰을 강제로 종료했다. 사이트에 악성코드라도 있던걸까. 개인정보가 해킹당한거면 어떡하지. 동겨울이라는 닉네임이 작가님이라는 확신은 증발해버렸다. 분명 작가님도 해킹당하셨던 걸거야.

“하……. 내일 수리나 맡겨야지.”

이젠 과제고 뭐고 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정우연은 휴대폰을 침대 옆 탁상 위에 던져놓고는 이불 속에 기어들어갔다.

금새 단잠에 빠져버린 정우연은 몰랐다. 꺼진 휴대폰에 반짝이며 하얀 글자가 새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
.
[단행본 발매되었습니다.]



* * *


삐리리-
삐리리-

익숙한 전화벨 소리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문지르고 몸을 일으킨 정우연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는 수신자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잠이 제대로 깨지 않아 이불을 돌돌 말고 있던 정우연조차도 번쩍 정신을 들게 만든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자고 있었어?

어쩐지 어이가 없다는 말투다. 정우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제야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올렸고, 곧 눈도 의심하게 되었다.

이곳은 정우연의 집이 아니였다. 잡동사니여야만 할 방바닥이 깨끗했고, 회색 러그까지 깔려있었다. 심지어 낡은 철제 책상(이였던 것)은 잘 빠진 나무 책상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벽지에 꽂혀있는 책마저 정우연의 것이 아니다.

-신 비서, 대답해.

“…….”

-신 비서?

“허…….”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저기,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납치된 것 같거든요?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전 원래 이런 곳에 안사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좀 해주실래요?”

하. 두근거리는 심정을 속사포처럼 늘어놓은 정우연이 애써 침착하게 숨을 뱉었다.

-신 비서. 혹시 아침부터 술 마셨어?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의 주인이 딱딱하게 되물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표정을 구기던 정우연이 그 상태 그대로 굳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였다.

“저 신 비서 아닌데요.”

-그쪽이 신 비서 아니면 누군데.

코웃음소리가 같이 들린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그딴 건 이제 상관없었다. 정우연의 예상이 맞다면 신 비서는 바로 ‘그’ 일테니까.

“신여운…?”

-역시 아침 술 마셨네. 내가 요새 너무 빡세게 굴려서 시위라도 하는거야?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다. 정우연은 떨리는 손으로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뗐다. 그제야 확인한 수신인은 강 이사님. 빼도 박도 못할 그 직함이였다, 젠장.

현실이라기엔 너무 비현실적이고, 꿈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보다. 자꾸 여기가 [검은빛 사랑] 소설 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공인 강시환의 비서이자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 신여운이라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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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6-11 23:39 | 조회 : 2,514 목록
작가의 말
사직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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