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직서 냅니다








작품 내에서 강시환은 신여운을 개처럼 부려먹었다. 이건 순화한 말이다. 개? 사실 동물만치 귀여운 대우도 아니였다. 자신의 사랑에 끼어들지마라며 신여운이 내어온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머리 위에 쏟아부운 것은 시작에 불과했을 정도로. 어디 그 뿐일까?

후반에는 진심을 담아 조언한 신여운을, 강시환은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조직 폭력배 비스무리한 놈들한테 떠넘기고 갔다. 그 이후 신여운이 작품에서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아, 최소 입막음, 최대 목따개였겠거니 예측할 뿐이다.

지금 강시환이 친절하게 전화로 해주는 건 그저 이미지 메이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우연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건 평범한 일상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줄이 왔다갔다하는 문제였다.

정우연은 짧은 통화시간만에 결정을 내렸다.

“내가 기필코 오늘 안에 퇴사하고 만다…….”



* * *


“어라? 신 비서님, 오늘은 늦게 출근했네요.”

뼛속까지 비장한 각오를 하고 회사에 들어서자, 쾌활한 목소리가 맞이했다. 목에 걸려 대롱거리는 이름표에는 '영업팀 이조연'이 대문짝하게 찍혀있다. 누구 조연이라고 광고할 일 있나.

“그… 예, 늦었네요. 조연 씨.”

머릿속으로 열심히 신여운의 말투를 떠올렸다. 분명 되게 딱딱한 컨셉이였는데, 사회생활 하나는 만렙이였던 정우연의 입고리는 훌쩍 올라가 있었다.

“어머.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

“아뇨.”

“아, 아…… 네.”

이번만큼은 억지로 정색하지 않아도 저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럼 비서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조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복도 너머로 빠르게 사라졌다. 화답해준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정우연은 진심이였다.

독자이자 팬으로서 소설을 읽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빙의까지 원한 적은 없었다. 그건 선을 넘어도 훨씬 넘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니, 정우연은 정말로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였다. 애초에 [검은빛 사랑]은 피폐한 작품이였으니까.

“하아…….”

어깨에 단정히 맨 가방 속에 들어있는 종이 몇 장이 심장을 달음박질치게 만들었다. 사실 걱정은 되었다. 이래도 괜찮은건지, 줄거리를 너무 비트는 것은 아닐지. 그래도 어떡해. 나는 살아야지.

정우연은 시선을 발끝에 고정한 채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다, 툭.

“정신을 어디다 빼뒀어?”

아침에 들었던 싸늘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머리통 너머에서 들려왔다. 정우연은 솔직히, 여러가지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가, 강시환…….”

“뭐?”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겨우 쳐들고 마주본 주인'공'은 차가운 눈으로 정우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가님의 Q&A에서, 키가 2m에 가깝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이야.

멍하니 미친 피지컬을 바라보다가, 강시환의 눈매가 사나워지는 것을 보자마자 정우연은 습관처럼 빠르게 덧붙였다.

“…이사님.”

강시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가 난 건가? 설마 이걸로? 새끼가 쪼잔하게. 정우연은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그를 마주 흘겨보았다.

피지컬과 미쳐버린 외모는 인정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장르가 BL이라고 해서 나까지 BL이 될 필요는 없잖아? 같은 성별인 남자 얼굴을 보고 두근대는 소년 감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일단 저리 비키지? 몸 좀 뒤로 물리던가. 언제까지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올려다보고 있을래?”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인지 강시환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간다. 더불어 정우연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렇지만 어쩌랴. 아쉬운대로 정우연은 고분고분 뒤로 발걸음했다.

분명 정우연의 몸이였다면 이렇게 강시환을 목 빠지게 올려다보진 않았을거다. 180 초반이였던 그 시절이 얼마나 지났다고, 정우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 해명부터 들어보자. 아침에도 반쯤 취해서 전화를 받질 않나… 아무리 그래도 신 비서가 이렇게 늦는 건 처음 아니야? 내가 좀 혼란스러워서.”

댁이 혼란스러워 봤자, 얼마나 혼란스럽다고. 지금 최대 피해자는 나거든! 그리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정우연은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도 정시 출근하던 신 비서가 몸 안 좋다고 지각을? 차라리 집에서 쉬지 그랬어.”

“꼭 회사에 나와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를 그렇게 각별히 여겨주니 고맙군.”

조금 질린 표정으로 강시환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지가 불량배도 아니고, 왜 저러는거지. 심지어 저래도 잘생겨서 더 짜증났다. 작가님, 왜 저런 놈이 공인가요.

“뭘 거기서 멍하니 서 있어? 일 참 좋아하시던데. 그렇게 좋아하는 일 하러 와야지.”

빈정대는 말투가 안그래도 심란한 속을 긁어댔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강시환의 쓰레기통 입이였지만 괜스레 울컥했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굳이 저렇게 도발해야해? 정우연은 무심한 표정 속에 속마음을 숨겼다.

비서실은 이사실 옆에 붙어있었다. 그러나 오늘, 정우연은 그곳에 발조차 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비서실을 지나쳐, 이사실까지 쫓아 들어갔다. 그런 정우연이 보이지 않는건지, 그냥 무시하는 건지 강시환은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아앉고는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강시환에게 반드시 빅 엿을 선사하리라, 가슴에 참을 인을 세기며 정우연은 매고 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사직서]

굵은 네임펜으로 휘갈겨 적은 A4 용지의 겉면이 잘 보이도록, 친히 강시환에게 서류를 돌려 놓아주었다.

“신 비서…?”

예상대로 강시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신 비서. 지금 뭐하는거야?”

“사직서 냅니다.”

“……하하?”

“저는 오늘, 지금 이 시간부로 퇴사합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죠.”

무슨 용기가 나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정우연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이사실을 나가려했다. 어딜 가.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지만.

순간 소름이 돋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였으리라. 획 돌아본 강시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이였다. 여전히 잡힌 손은 그대로였지만.

“이사님이야말로 뭐하시는 겁니까. 저 퇴사한다니까요? 그 더러운 성격, 더 못 참아 드리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묘했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정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그래서?”

그럼에도 잡힌 손목을 놔주진 않고,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강시환이 답답했다. 소설로 볼 때는 오금이 저릿해지는 그 말투가 너무 좋았는데, 실제로 듣자니… 그래. 초딩같다. 그것도 무개념 초딩. 뭐라고 부르더라, 초딩공?

“하……. 좋아요. 제가 사직서 쓰고 나가는 게 이사님의 프라이드에 어긋난다면 이렇게 하죠. 이사님이 절 자르신겁니다. 전 잘렸고요. 됐죠?”

그러니까 붙잡지 마세요. 딱 잘라 이야기하는데 뜬금없이 눈 앞을 커다란 손이 가렸다.

어, 미친. 뭐야.

저도 모르게 굳어버린 정우연이 입만 벙긋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 튼 에어컨마냥 냉랭하기 짝이 없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열은 없는데.”

“……뭐요?”

“병원에 데려다라도 줄까? 몸 많이 안 좋아?”

틀렸다. 이 새끼는 답이 없다. 정우연 인생, 22년 동안 이렇게 노답인 새끼는 처음이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동겨울 작가님부터 찾아가야겠다. 저 놈 성격 좀 고쳐달라고.

“됐습니다. 됐으니까 퇴사 좀…….”

“앰뷸런스 필요해?”

“됐다고 미친놈아.”

도무지 말을 곱게 하고싶어도 곱게 나오지 않게 만든다.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는 강시환에게, 마지막으로 일침을 날렸다.

“선동하랑 둘이 잘 붙어먹어봐라.”

흥이다, 새끼야. 정우연은 강시환의 손아귀를 세게 내쳐버리고는 미련 한 줌 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가 누구…!

-…려 봐!

-신 비서…!

난 이제 프리다. 정우연 도비 이즈 프리, 시발.

정우연은 귓등으로도 그 불쌍한 외침을 듣지 않았다. 곧 가방 속 휴대폰에서 미친듯이 진동이 울렸다.

[강 이사님]

정우연은 휴대폰을 그대로 꺼버렸다. 쫓아올테면 쫓아와봐라. 난 더 멀리 튀어버리겠다. 그런 심보로.

그리고 그 일을, 정우연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11
이번 화 신고 2021-06-13 00:01 | 조회 : 1,822 목록
작가의 말
사직서

1화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기뻐요. 아시겠지만 독자의 댓글은 작가의 힘이 됩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