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동하






정우연은 멍청하게 제 상사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니. 댁 애인 이름도 모르… 그럴리는 없지. 그렇다면 정우연이 빙의된 시점이 적어도 선동하의 등장 전이라는 뜻이 된다. 어쩌면 살아남을 가망이 있는 걸까.

“머리 그만 굴리고 대답해. 누구냐니까.”

안그래도 불안한데 재촉하지 마십시오, 이 자식아.

이미 선동하의 이름을 말해버린 이상 주워담을 수는 없다. 그야, 저 무지막지한 사내의 뒷통수를 때려서 강제로 기억상실증을 불러올 수는 없잖는가. 또한 처음에 세워뒀던 계획 역시 박살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려던 계획 말이다. 제 심기를 거스른데다가 퇴사 사태까지 벌였으니 이미 내 존재감은 너무나도 커졌다.

그렇다면…… 역시 막장으로 가야하나.

“제, 제 전 애인입니다!”

“…신 비서의, 전 애인?”

이 자식 봐라.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심각한 일 중독이자 충신으로 묘사됐던 신여운이기에 연애와는 그만큼이나 동떨어진 인물이였다. 작품 내에서도 그에게 애인은 물론이고 전애인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딴 승부수를 낸 건, 처음부터 선동하와 강시환의 만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렇습니다. 숨겨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강시환의 눈고리가 가늘어졌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떠보려는 거다. 사실은 거짓말이지만, 최대한 당당한 듯 어깨를 쫙 피고 그를 노려보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강시환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신여운 비서님에게, 애인이 있다?”

“정확히는 있었다, 죠.”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왜 댁한테 애인까지 허락받고 사겨야 하냐.

어이가 없다는 듯 멀뚱히 올려다보다가 서릿발 같은 한기를 담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이러다 누구 하나 잡아먹겠네, 진짜. 왜 선동하가 그에게서 도망쳤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매번 눈깔이 돌아간 강시환을 심지어 침대에서 상대해야 했던 선동하가 가여워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 신 비서의 전 애인 이름은 왜 튀어나왔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혼나는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얼마 전에 전 애인, 그러니까 선동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회사에 곧 들어오게 됬다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표님, 꽤 잘생기셨잖습니까. 혹시 그것 때문에 입사했나 싶어서…… 그게 질투가 나서 그랬습니다.”

내가 신여운에게 빙의한 시점이 작품이 시작된 시점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까지 모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선동하는 끽해봐야 며칠 후에 첫출근을 할 거다. 그러니 회사에 곧 들어오게 될 것이 맞고, 전 애인이래도 마음이 남았다면 질투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우연의 넘겨짚은 예상이 맞다면, 말이다.

“큭.”

말도 안되고 그럴싸한 변명을 들은 강시환은, 걱정과 달리 웃고 있었다. 곱게 휘어진 눈고리를 시작으로 그가 온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하, 하하, 유치한 면이 있네, 신 비서는. 질투라니. 설마 사직서도 그 때문인가?”

“그으건, 그렇습니다….”

우선은 긍정. 그가 여기까지 넘겨짚어주니 오히려 편하게 수긍하면 되었다. 정말로 강시환이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이 목숨 걸고 떠올려낸 변명을 듣고 저렇게 쳐웃는 걸 보니 쟤도 어지간히 미친놈이다, 싶었다.

정우연은 불퉁한 목소리로 이만 일 보러 나가보겠습니다, 라며 덧붙이고 멋대로 대표실을 나갔다. 나오고 나서도 혹시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아차-했지만 의외로 그는 별 말이 없었다.

졸지에 비서실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되었다. 그래봤자 이 몸으로 정상 출근한 적도 없지만.

‘라벤더 향.’

라벤더는 신여운이 좋아하는 꽃이였다. [검은빛 사랑]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항상 신여운이 강시환에게 떠다 바치는 차가 라벤더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강시환이 좋아하는 꽃인가 싶었지만 마실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는 서술이 왠지 걸렸다. 이제 보니 신여운이 좋아했던 게 틀림 없다.

부드럽고 향긋한 라벤더가 그나마 심신의 안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강시환, 저 새끼랑 같이 있으려니 여러가지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솔직히 사기 아닌가? 키도 크고, 외모는 말 할 것도 없는 데다가 남자들의 로망이 담긴 신체와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 생수병. 심지어 목소리도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다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세이렌의 노랫소리나 다름 없어서 그렇지. 아름다운 노래로 홀려 바닷속으로 끌고 가버린다는 세이렌과 강시환은 퍽 공통점이 많았다. 예쁜 껍질 속 흉한 속살이랄까. 또, 잠시 정신을 놓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의 화법에 끌려 들어간다는 점도, 그리고 어느 순간 목줄이 틀어쥐어져 있다는 점도.

“아, 몰라.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지.”



* * *



선동하는 착하다. 그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강시환 앞에서만 전 애인이였던 것처럼 행동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철저하게 민폐라는 걸 알지만 어쩌랴. 이쪽은 목숨이 걸렸다. 안되면 바짓가랑이라도 잡지, 뭐.

일단 친해지는 게 우선이였다. 아무리 호구같은 선동하지만 처음 보는 비서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말을 트려고 했지만 신입인 선동하와 대표 직속 비서인 신여운은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는 이르다. 간접적으로 다가갈 방법이 없다면 직설적으로 매다 꽂으면 된다.

“…저랑 친해지고 싶으시다고요? 비서님께서요?”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입 선동하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물었다. 앳된 얼굴 탓인지 소년미가 물씬 풍긴다. 비서실 너머의 짜증날만치 큰 놈과는 다르게 신여운보다 약간 더 큰 키였다. 항상 강시환 옆에 서 있어서 비교적 작아보였지, 작다기보다는 지극히 평균적인 키였다. 역시 강시환이 탈인간적인거다.

비엘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수가 작고 보들보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마냥 귀여운 수가 대체로 당신보다 훨씬 크고 훤칠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럼에도 귀여우니까 수지만.

“좋아요! 신여운 비서님이시죠? 저는 선동하예요. 저 면접 볼 때 가장 오른편에 계셨던 분 맞죠. 잘생기셔서 여기서 뵙자마자 바로 알아봤어요. 혹시 저 기억하실까요?”

혹시 부담스럽다고 거절당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선동하는 상큼하게 미소지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긴장이 쫙 풀렸다. 아, 힐링된다. 조각상이 말을 해. 사랑스럽다 못해 성스러울 정도다.

“그럼요. 동하 씨도 멀리서부터 눈에 띄시더라고요. 되게 예쁘시잖아요.”

“정말요? 제가 예뻐요? 감사합니다, 비서님도 예뻐요.”

얼핏 들으면 정말 게이같은 발언이긴 했다. 남자보고 예쁘다니, 편견이 깊은 사람이라면 싫어할 말이였다. 하지만 역시 선동하는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건지 웃으며 깔끔하게 받아쳤다. 같은 남자에게, 심지어 훨씬 더 예쁘장한 남자에게 진짜 정우연의 얼굴도 아닌 신여운의 얼굴로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 웃겼다.

선동하는 베시시 웃더니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이, 형제는 있느냐,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들.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마음 편한 대화였기에, 나는 강시환이 제안했던 쉬는시간 무제한을 제대로 이행해주었다. 그 결과, 어언 30분만에 선동하로부터 형이라는 호칭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럼 형, 조금 있다 봐요!”

“그래. 점심 사줄테니까 처리할 것만 처리하고 연락해라.”

“네!”

기분 좋게 복도에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자마자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문에 기대고 선 강시환이 서류를 들고 있었다. 시선만 이쪽으로 고정한 채로.

“신 비서는 많이 한가한가봐.”

낮은 저음이 이럴 때조차 듣기 좋게 서늘했다.

“…전 애인이랑 일도 안 하고 2시간 동안 떠들 정도로,”

설마 일 좀 안 했다고 저러는 건가. 본인이 계약서에 먼저 제안했던 쉬는시간 무제한은 어디로 사라진거지.

“한가하신가 봅니다, 내 비서님은.”

아니다. 이 놈은 그 짧은 시간에 선동하에게 반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 저가 갖고 싶은 놈이랑 나랑 고작 대화했다고 이러는 거다.

강시환이 얼어버린 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었다. 그가 보던 서류를 힘줄 돋은 손에 곱게 모아 들고는 다가왔다.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히며 또각또각 소리가 노골적으로 울린다.

좆됐다. 소설 속 신여운과 같은 결말은 사양이다. 음, 그냥 여기서 뛰어내릴까? 그게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까? 여기 27층인데.

“내가 머리 굴리지 말랬지, 신 비서.”

“대표님이…….”

“내가 왜.”

“계약서에, 쉬는시간 원할 때 가지라고, 분명히… 끅.”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딸꾹질이였다. 강시환이라는 거대한 짐승으로부터 온 원초적인 공포 때문이다. 애써 침착한 척 입술을 꾸욱 모으고 말을 이으려 했지만.

“제시하셨… 끅.”

소용 없었다. 씨발. 정우연이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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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7-26 18:04 | 조회 : 1,307 목록
작가의 말
사직서

1년하고도 한 달이 지났네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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