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1)

"야 빙신아."

쓰레기가 내 몸에 맞부딪혀 튕겨나갔다. 나는 구부린 몸을 잠깐 수그러뜨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순간적인 발작이라 몸은 아찔하게 떨려왔다. 정강이가 아리도록 열으로 뻗쳐오는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부시시 닿아오는 광채가 간지러웠다.

"걸레 새끼가 씨발 귀 먹었나."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막 빤 걸레가 머리 위를 부유했다. 대걸레를 가져다 머리를 헤집는 것이 익숙한 감각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맨머리를 비추는 따스한 햇빛에 나의 양 눈은 부시럭거렸다. 부정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 때 완벽하게 깨어졌다. 그날 나는 공책과 빵을 하나 사들여 쇼코의 집으로 떠났다. 쇼코는 나의 피해자였다. 내 인생 전면이 부도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 같은 것은 지금도 아리송하다. 무엇인지 모를 이유 때문에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밀어열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기를 마주했다. 그것은 무향이었다. 아무 향이 나지 않는 따듯한 눈을 마주했다. 눈이 크고 속눈썹이 엷었다. 학교 주변 강물에 잠잠히 서식하는 물고기에게 줄 밥이라며 빵 봉지를 내밀었다. 부시럭 소리와 함께 쇼코의 눈알은 서서히 확장되었다.

"쟨 누군데?" "아. 그 애구나. 아. 알겠어. 그런데." 떠들썩한 소리가 몇 번 들려오더니 멈췄다.

"그래?"

열린 문 사이로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성별이 모호해 보이는 단발머리에 키 작은 청소년이 봉지를 내밀어 떨어뜨렸다. 검은 향이 어렴풋이 났다. 나는 떨어진 그것을 주웠다. 무릎을 꿇었다. 수그린 등 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빵가게 할인권이 주머니에서 찌그러져 있길래 산 것이란 말을 했다. 그 말을 행한 입에서 미묘한 향이 다시 풍겨나왔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아이의 말도 모두의 말도 맞았다. 나는 오메가 같은 냄새가 풍기고 실제로도 그런 종류에 속했다. 하지만 그 뿌리 자체를 뽑아내고 싶다는 생각만은 그녀의 학교에 방문했을 때 불현듯 들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시시껄렁한 상념도 자살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니었다. 사실 아니었다. 자살의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무엇인지 모를 뿐이었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마도 그 이유인고 해서 생각해보니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골똘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큰 수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사실 그만큼의 긴장감도 없이 그저 병원검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쩌면 놀이공원 갈 준비를 하는 꼬마애들처럼 자살일을 기다렸다. 달력은 찢어놓았고 휴대폰, 요, 만화책, 얼마없는 것들도 포함해 내 물건들은 전부 팔았다. 몇 개월간 해온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다. 니시미야를 만난 것도 자살을 기다리다 생긴 이벤트였다. 그녀를 만날 일이 없음에도 기다림에 지루해진 나머지 그녀의 학교 주변에 가 잉어들에게 먹이도 주었다. 영화관에 가고 마지막으로 소량의 책을 읽었다. 동창들에게는 연락할지 고민하다 관두었다. 초등생 때는 끝이 별로 좋지 않았고, 중학생 시절에는 처음부터 끝을 마차기까지, 시기 자체가 전부 좋지 않았다. 과거회상은 그것으로 조용히 끝마쳤다. 문제는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 생겼다. 내가 자살을 시도하려 든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별안간 그랬다. 어머니가 그간 손대지 않았던 내 일기장이 집에 와보니 몇장은 접어 놓인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허나 어머니는 말이 없었고 평소와 같았다. 그저 평소대로였다. 허나 설령 내가 자살하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더라도,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꼭 자살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불효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아직 그런 사실을 전부 털어놓을 사람은 친구인 스미히토 뿐이었다. 그 애도 오메가로서, 나는 남창이라는 소문만 무성하다 뿐이지만 스미히토는 진짜 남창이었다. 부잣집이라는 것도 나와 좀 달랐다. 몸도 대주고 약도 먹고 여느 남창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부러웠다. 요즘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는 물음에 나는 내가 자살을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스미히토는 내가 건넨 라이터 불빛에 담배를 갖다대며 중얼거렸다.

"너는 무슨 엄마가 네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그럴 용기 있으면 네 인생의 피해자인지 뭔지 걔한테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 들었어? 죽더라도 그렇게 한 뒤에 죽어."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은 꼭 초기화 해놓고. 근데 너 야동은 보냐?"

"아아니."

"그럼 됐어."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말처럼 그녀를 만난 이후에도, 고심하기에 바쁜 머리에 자꾸 훈김이 괴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그런 사과, 용서, 계획들은 전부 소용이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될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잘 알고 있었지만 나만 놓아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옆자리에는 스미히토가 있었고 앞자리에는 나의 도시락이 있었다. 스미히토는 자살 고백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히 밥을 먹고 있는 내게 물었다.

"너 아다냐?"

주스 빨대를 빙글 돌리며 나는 대답했다.

"그건 너가 제일 잘 알잖아."

"근데 그것도 슬슬 의심스러워진다. 네가 알파였을 시절에 섹스를 해봤거나, 그 후 다른 성질로 발현했으니까 나몰래 학교에서 섹스를 했거나, 아니면 지금도 내 눈을 속이고 뒤로는 나같은 짓을 하고 다닌다거나 그렇겠지."

나는 말이 안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듣고 있었다.

"어쩐지 그래서 아까 식수대에서 남자애들이 펠라 시늉을 낸 거야?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는데 너는 남자를 홀랑 속여먹어도 밉지는 않을 거라는 거야."

"아냐. 한번도 해본 적 없어."

주스 캔이 쪼글쪼글 해져 있었다.

"봐봐. 이런 점 때문에 밉지가 않다니까. 근데 죽는다는 건 어떻게 됐냐. 부탁한 건 했어?"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것 봐."

그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않은 채 나에게 물었다.

"그래? 니시미야 쇼코한테는 잘 찾아갔고?"

"어. 니시미야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같이 수화로 얘기했어. 그리고 주운 할인쿠폰으로 빵을 샀는데 친구로 보이는 남자애가 있었어. 니시미야도 좋은 친구가 생겼나 봐."

"다음엔 현금으로 사."

담배 연기가 주스 캔 사이를 가르고 조금 뒤에 우리 둘의 사이도 헛헛히 갈라들었다.

"응."

자살은 하지 않았다. 나는 자살을 결심한 날 170만엔이 담긴 돈 갚음용 봉투를 어머니의 머리 맡에 두고 나섰다. 4월 15일의 쾌청한 화요일이었다. 자전거에 매달리고 금문교와 비슷한 다리에 올라 푹 고꾸라졌다. 물이 아주 깊었다. 감히 산다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이 춥고 깊었다. 그런데 나는 살았다. 4에서 5m 가량의, 조금만 더 깊은 구역으로 말할 것 같으면 10m가 훌쩍 넘는 넓은 강에서 나도 모를 방식으로 양지를 찾아 흘러들었다. 생존 본능에 배우지 않은 수영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양지로 올라가 물을 뿜으며 토악질했다. 젖은 몸을 말리며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파란 하늘이 끈질겼다. 나의 본능 또한 끈질겼다. 죽겠다고 내가 스스로 말했었다. 하지만 죽음을 결심한 날 나는 당연하다는 듯 양지로 돌아갔다. 막상 낙하를 경험하니 두 번은 못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자살은 실패했다. 옷을 말리고 하염없이 구름을 바라보자니 배가 고팠다. 심란했다. 그런 와중에도 배는 고프고 나는 살아있고 나는 생명을 갈구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끈질겨서 단지 그것 때문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소중히 여겨야 할 생명이지만 막상 학교로 나오자니 그런 생각은 가시고 가시적인 혐오가 밀려들었다. 내가 자살을 시도한다는 얘기가 이미 학교에 퍼져 있어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스미히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편해질지 싶은 얄팍한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그와 헤어져 다른 길로 들어섰다. 바람이 잘 불고 여름 냄새가 청명했다. 갈증이나 달랠까 하는 생각으로 식수대로 가자 배가 걷어차였다.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토기와 함께 입가를 막았다.

"이게 배빵이라는 거야."

손틈 사이에서 역류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배를 감싸안으며 후들거리는 몸을 식수대에 기대었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치켜떴다. 남자들 여럿이 내 앞에 모여 웃으며 잡담하는 것이 보였다.

"반응이 재밌어. 지도 지가 걸레인 걸 아는지 항상 꼬박꼬박 고개 숙여주잖아."

나는 할 말이 없어 발을 비비며 서 있었다. 꾸중듣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알파였고 활발했을 시절 그랬던 것처럼 여겨졌다.

"앞으로도 많이 해보자."

제일 덩치가 커보이는 학생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들 무리가 내 곁에 있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같이 놀자고 먼저 제의해온 후 나에게 물을 뿌리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책상 서랍에 썩은 우유, 학교 연못에는 가방, 화장실 안에서는 걸레를 빨다 남은 물이 쏟아졌다. 학생은 유독 물을 좋아했다. 그것이 걸레 생활은 결산하고 좋은 사람 되라는 의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웃었다. 그 때도 부드러웠고 변함없이 햇빛 때문에 잠이 올 듯 지나치게 따스했다. 주위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웃음과 함께 저 학생들은 나를 때렸다. 그 때가 되어서야 나는 웃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제서야 비굴하게 웃었던 것이었다. 내가 비밀히 웃으며 말했다.

"싫어."

입술이 달려있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싫어?"

그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싫다고?"

"얘 지금 싫다고 했냐?"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얜 가끔 간이 붓잖아."

"정신 차려, 새끼야."

그는 다시 한번 내 이마를 쳤다. 낮은 웅성거림과 함께 다른 이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이상했다. 또는 익숙치도 않아 의문스러웠다. 왜냐는 질문밖에 나에게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랬을지는 내게 의문스러웠다.

"쟤네는 뭐야? 왜 저래."

"또 쟤야. 저 새끼는 왜 저렇게 밥통이야."

"걔 아닌가? 오메가 장애인 왕따 시킨 애."

"오메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편협한 편견으로 왕따를 시킨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식이냐?"

"인과응보네. 결국 저 자식도 오메가로 형질이 바뀌었잖아."

유일하게 가장 확실한 정보는 맞을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다는 것 뿐이었다. 제일 다부진 학생이 소매를 걷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안주하는 눈을 감으려고 잠깐 시도했다.

"멈춰!"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흡사 브로콜리를 연상케 하는 머리의 남학생이 내 앞을 막고 나섰다. 부슬부슬하게 뜬 푸른 머리칼이 일순 나의 시야에 들어찼다. 그것은 익살스러운 연재만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비단 상황뿐만 아니라 그의 생김새 자체가 그랬다. 그 남학생은 정확히는 그 주먹을 막아놓은 것이었다. 제지를 함께하며 그렇게 막았다. 또다시 부스러지는 햇빛이 느껴지고, 자살할 때와 비슷한 허망함이 몰려들어왔다.

"얜 또 뭐야?"

"난 쇼..."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씨발, 씨발." 그 사람은 욕설마다 규칙적으로 주먹을 꽂으며 그 상황이 익살스러워 보이도록 만들었다.

"미친놈아."

"이 새끼 2반 또라이 새끼 아니냐."

"2반 자식들은 위계질서가 확립 안된 새끼들이야. 다 철밥통 새끼들 뿐이야."

그들은 우리를 때렸다. 주먹이 멎어들자 나는 눕다시피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방어 기제로 감쌌던 팔을 풀고, 서서히 식수대 바닥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일그러져 욱신거리며 아팠다. 내가 일어선 순간에는 주먹이 날아들지 않았다. 저들이 먼저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잘가. 다음엔 꼭 내 것도 빨아."

그들은 함께 달려나갔다. 내가 얼굴을 들자 그제서야 나는 나를 둘러싼 주변을 맞이할 수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려고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는 초록이 시원하게 들어찼다. 자연적인 머리칼임에도 그의 자연적인 흑색에 약간의 녹빛이 첨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꼭 엽록소가 풍부한 채소 같았다. 나는 잔디에 못지않게 푸르른 색의, 가운데와 곳곳이 특히 퐁실퐁실 솟아있는 머리칼을 응시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거기다 명찰을 슬쩍 훑고 이름을 붙여 말했다.

"나카츠카 토모히로."

그 애도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어, 어. 그래. 나다. 나카츠카다."

"그래. 2반이구나. 방금 구해줘서 고마워."

"핫핫, 별 일 아니다, 그런 것쯤이야."

"응?"

"괴롭힘 당하고 있는 선량한 시민은 나같은 걸인이 도와야지. 그건 당연한 일이다. 만나서 반갑다. 너도 참 대단하던데. 시민이 악인을 상대로 싫다는 거부 반응을 그렇게 당당히 표출하다니 말야, 어쩌면 너같은 사람을 나의 슬하로 두는 것도...어쩌면 그런 것쯤은 허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약간 아리송해졌다. 나카츠카는 내가 오메가이며 내가 몇 년 전 일어났던 왕따 사건의 가해자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방금 그들이 했던 말만 들으면, 솔직히 토치고등학교에 조금만 다니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그것을 안 이상 사람들은 내게 더 이상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그의 탁 트인 양 눈은 맑았다.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무결히 맑도록 바랐다.

"그렇구나. 고마워."

"별일 아니래두."

내게 그것은 조그만 웅얼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뭐라고?"

"별일 아니라고 말이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찾아와라. 아무때나 들어주고 실행할 수 있다."

"그런 말이었구나. 미안."

"제군은 귀가 잘 안 들리는 모양이네." 나카츠카가 이해하는 눈빛으로 눈썹에 둥근 산을 그렸다.

"고막이 살짝 파열됐어. 그래서 그래."

"뭐! 고막 파열? 어쩌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애들 때문에." 내가 옷을 털며 말했다. 나카츠카는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 되었으니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의 흰 옷을 털어주며 그를 타일렀다. "나카츠카. 지금은 일단 늦었으니 각자 반으로 돌아가자."

나는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그에게 그리 말하고는 서둘러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조금 수그러든 나카츠카는 같이 밥을 먹을 것을 제안했다. 도시락도 맛있는 것으로 싸왔다고 했다. 계란말이에 전갱이 튀김, 된장국, 깨를 뿌린 단무지 등이 그것이었다. 마침 사람의 손으로 오랜 시간 소요해 만든 음식이 그리웠던 참이었고, 항상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던 나로서는 달리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리고 그가 내게 다른 학생들과 달리 호의를 보여주었기에 수락했다. 스미히토를 그새 머릿속에선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군들."

내가 스미히토가 앉아있는 벤치로 향했다. 나카츠카가 그 뒤를 따랐다. 스미히토의 동공은 미묘하게 확장되어 있었다.

"이 얘는 누구냐?"

"아, 이번에 날 도와줬던..."

"나카츠카 토모히로." 아마이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나카츠카 토모히로 군." 그는 이름을 말하고서 스미히토가 앉은 벤치에 앉았다. 나는 달리 엉덩이를 붙일 곳이 없었기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곳에서 멍하니 도시락을 꺼내 깨작거리며 먹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맛이 없었다. 나카츠카의 허락을 받아 깨를 뿌려 담백하고 고소한 밥을 나눠먹고 싶었지만 느낌상 그런 제안을 건넬 분위기가 아니었다.

"브로콜리." 내가 스미히토를 바라보았다. 그가 건넨 말이 맞았다. 아마 나카츠카를 부르는 말인 것 같았다.

"난 브로콜리가 아니다. 그런 수준낮은 별명으로 불리다니 썩 불쾌하군."

그들의 낯빛이 평소완 다르게 가무잡잡했다.

"스타워즈를 본 거야, 스타트렉을 본 거야? 아니면 둘 다?" 그가 도시락 안의 조림을 깨작거리며 물었다. 스미히토는 아까부터 줄곧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젓가락을 움직여대고 있었다. 나카츠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브로콜리, 대답 안하냐?"

"둘 다 보지 않았네. 그리고 브로콜리라니 본좌는 그런 무례함을 제군에게 용납치 않았어."

"스미히토. 그러면 안돼."

"왜, 솔직히 브로콜리 같긴 하잖아."

애초에 본래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은 척을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교정해보려 없던 거짓말을 꾸며냈다.

"나카츠카, 스미히토가 조금 낯을 가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새..."

"난 낯가린 적 없는데."

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밥숟가락을 들었다. 이제 토론은 중단하고 점심 먹기에 열중하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나카츠카가 툴툴거리며 자신의 계란말이를 집어먹었다.

"까칠한 서민이구만." 오직 그 툴툴거림만 남길 뿐이었다.

"살면서 좋은 척 해야 할때도 오는 법이야." 내가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제군?"

"좋을대로." 그들은 저마다의 고개를 돌린 채 나를 응시했다. 말에는 긴 공기가 새어나왔다. 스미히토는 울상과 짜증이 반쯤씩 섞인 얼굴로 여전히 도시락엔 한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안 먹을 것이면 버리라고 했다. 요즈음 통 안 먹어 걱정이지만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젓가락을 가벼이 내려놓았다. 나는 벌써 다 먹고야 말았다. 맛 없는 것을 억지로 먹어내는 것은 내가 좀 잘했다. 나는 그대로 일회용 도시락통을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러 갔다. 돌아와보니 스미히토도 자신의 도시락을 어떻게 처리는 한 것인지 도시락통이 그의 손에 단정히 그러쥐어져 있었다.

"너 그러다 날지도 몰라."

"무슨 소리냐?"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야위어서 날개뼈가 다 보이잖아."

재미없고 싱겁다고 말하듯 그는 웃었다.

"퇴화됐지. 쟤는 정말 뭐야?"

"은혜를 갚은 까치."

"밥 얻어먹는 까치는 아니고?"

내가 혀를 쑥 내밀며 화답했다. 그때쯤 다른 사람이, 스미히토의 다른 방문객이 그의 뒤로 찾아오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어지간히 재미없어."

도시락과 화대를 갖고 오는 그 남자의 표정은 굳었다. 나는 왜 안 좋은 패만 가지는지 불현듯 예상치 않은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 터였다.

내 원상복귀였다.

아니었다.

원상복귀라기보단 본래 상태에서 살짝 더 저하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알맞을 터였다. 내 행동에서 무엇이 문제였냐는 답을 물을 필요도 없이 모든 행동에서, 샅샅이 문제를 찾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저녁식사 중 왜 죽으려 했냐고 내게 잔잔히 물어보았다. 너무도 잔잔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냥 네, 나 왜냐는 대답만 할 뻔했다. 나는 몇 초후 그것의 의미를 깨닫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 이유와 자살일, 정신 상태, 강가에서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마치 라디오가 대본을 읊듯 줄줄 말했다. 어머니는 오직 자살의 이유만 물었음에도 그랬다. 그것은 나의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그럼 그게 사실이었니?"

그녀가 일순 일어서 나를 다그쳤다. 물기가 눈가에 짜게 맺힌 것 같아 보여 미묘했다. 그리곤 밥상에 얹힌 170만엔 돈봉투를 들어 보였다. 한쪽 손에는 어느새 쥐었는지 조그만 은제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라이터를 딸깍이고는, 불길과 돈봉투가 닿을만치 가까이 둬놓았다. 돈 때문도 있거니와 불이 엮이니 나도 어머니처럼 재빠르게 일어서 그녀를 만류했다. 죽지 않을 거니? 좀 전과는 평이하게 다른 격양된 음성이었다. 내가 한숨 한번을 뱉어내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죽지 않을게요. 약간의 울음과 격정이 어머니의 얼굴에 맺혀갈 즈음 돈봉투에는 불이 붙었다. 어머니가 소리 지르며 봉투를 탁탁 부딪혔다. 불씨를 꺼뜨리려 노력했건만 그것은 점차로 거매져 나중에는 봉투의 형식적인 형체조차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돈봉투는 잘 탔다. 자살 소동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남은 건 그 강가에서 무단으로 뛰어내린 내게 남기는 처분 뿐이었다. 처분은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았다. 다만 가슴이 조여오도록 뒷꿈치를 탁탁 털어내 격정을 숨겨내었다. 기다려지는 것은 여장이었다. 나는 이번에 개최하는 축제에서 그것을 하기로 했다. 그냥 반에서 어쩌다 보니 나를 추천했고 다른 사람들도 없고 하니 별다른 말 없이 그것을 맡았다. 히트사이클 기간이 겹쳐서 그 증상이 발현된다면, 그런 우려와, 내 증상이 유독 심각한 것만 빼면 괜찮았다. 그곳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 자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확연해 보였다. 확연하다고 하기에도 뭣했다. 선생은 아직 나를 호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 사적인 사건으로 호출하는 것도 사생활을 방해하는 행동의 일환인지, 솔직히 좀 헷갈렸다. 그래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나는 정학 처분을 받았다. 강가에 함부로 뛰어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강가가 아니었다. 쇼코가 다니는 학교 내 못가에 무단으로 뛰어든 것에 대한 처분이었다. 토치고등학교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일주일 정학 처분의 마지막날이었다. 일기장이 강물에 떨어져서 그것을 주우러 갔을 때 누가 타이밍 좋게 캐치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나보다 배짱 있는 사람 있느냐는 식의 제목으로 학교 게시판에 실려 있었다. 나는 내 계정을 로그인한 해킹범을 탓했다. 그 게시글 때문에 내가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단으로 쇼코의 학교 주변 강가에 뛰어든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간에 강가의 자살 소동에 관한 파장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 무단낙하를 빌미삼아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었다. 사실 빌미라야 많은 것이었다. 오메가, 무단, 비단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그냥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괴롭힐 수 있었다. 당연했다. 그곳의 공기 냄새를 맡으며 나의 숨은 조금씩 가빠졌다. 호흡과 겹쳤다. 부드러운 솜털이 빳빳이 떠 가끔 햇빛의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체감은 따듯하고 몽롱해서 그 어떤 배란기 증상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다만 외적으로 불편해보일 뿐이었다. 나카츠카는 내게 우려를 표했다.

"괜찮아." 나의 히트사이클을 바로 앞둔 시간이었다. 어쩐지 그래서 그랬다. 모든 증상은 거기서 비롯된 거였다. 나는 도시락을 안 챙겨왔기 때문에 점심을 굶고 스미히토가 원조교제를 하는 계단 주변을 비척거렸다. 스미히토는 내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평소 그를 이용하는 고객인 톳코타이를 나에게 붙여줬다. 나는 솔직히 아직도 궁금하다. 왜 하필 그의 고객이었을지가, 아니었다, 아마도 대단한 은밀함으로 팽배한 사람이고 아마도 그의 수풀이 위대할 것이었다. 톳코타이가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밖에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지켜줄 구실을 생성하도록 노력했다.

"날씨가 덥네." "..." "추운 건지 더운 건지." "..."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나보다 더 겁이 많았고 나를 지켜줄 이유가 없으면 굳이 행동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리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뭐했어?"

여학생들과 남학생 한 명으로 이뤄진 무리 몇몇이 다가와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톳코타이는 눈치를 보았다. 그들이 일주일 동안 뭘 했길래 요즈음 뜸했냐고 묻자 정학처분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들도 이미 사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무단낙하 얘기를 조금 꺼내며 빌미를 이야기했다. 오늘 예감하던 일이 들어맞았다. 누군가 무단낙하를 빌미삼아 날 괴롭히려 든다는 것 말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것보다는 먼저 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톳코타이는 벌써 가고 없었다. 고개가 들려져 눈앞의 복도는 금새 사라졌다.

"머리 완전 이상해."

"가만 있어봐. 야, 끈 줘봐."

그러면서 방울이 달린 끈으로 장난을 치거나 했다. 머리 몇 조각이 나뉘어 다르게 묶였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애들 몇이 달라붙어 내 머리칼을 매만졌고, 어떤 아이가 콜라를 사왔다. 통통하고 작달막한 어떤 학생은 내게 성큼 다가와 질문했다.

"이시다, 축제에서 여장하기로 했냐?"

나는 그녀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 커다란 손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

"도와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이번주인데 준비 빨리 해야 하는 거 아냐? 네게 보여줄 거리라도 있냐?" 그 말을 뱉자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통통한 그 여자애를 툭 치고 다른 아이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 애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쥐어보고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꼭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멍청이."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설탕물처럼 끈덕진 액체가 몸 주위에 흩뿌려지는 느낌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콜라 자체는 정말 좋아하지만, 설탕은 녹아내린 부산물이고 언젠가 끈덕끈덕하게 늘어붙어 빨래도 힘들어지고 씻기도 힘들어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연속해 터지는 웃음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머리 땋아준 것이 아깝게 됐다는 그런 말이 두런두런 들리며, 그러면서 그들에게로 연속하는 웃음이었다. 셔츠가 액체를 만나 몸의 형태가 다 비춰보이게 달라붙었다.

"야해."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자애 한 명이 배를 꾹꾹 눌렀다. 판판한 가슴을 눌러가며 매만졌다. 액체가 부드럽게 스민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두 어개 정도 됨직한 머리를 타고 흘렀다. 그와 더불어 진득한 콜라도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었다. 목덜미 위를 땀방울처럼 방울지게 흐르는 액체를 나는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비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콜라 좋아하지."

"그래. 이런 식으로 먹여줄 줄 몰랐는데."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먹여주니까 꼬와서 그래?"

"아니."

"왜, 너 같은 애들은 주기에 많이 먹여줘야 된다면서." "몰라?"

"무슨 소리야."

"재미없다." 마른 남자애 쪽이 하품을 했다. 나도 재미없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알 수 없는 소리를 종알거리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새어나가는 소리만이 느껴졌다. 그들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진작 이럴 것을 괜히 아쉬움이 스쳐지나갔다. 그 덕분에 콜라가 몸에 덮어씌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의 과오였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걸어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덩치 큰 남자애들이 눈에 띄었다. 그 아이들이었다. 내 숨을 죽였다. 그 무리는 남자화장실 입구에 따라붙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 많네."

뒷편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주인가 며칠 되지 않았던 날에 날 괴롭혔던 아이들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랐다. 어쩌면 한 아이일지도 몰랐다. 두 발이 움직였다. 시야가 흐리멍덩해서 횡단하기에 버거웠지만,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황급히 다른 화장실로 도피하려 몸을 떼내었다. 두 명쯤이 다가와 내 주변을 빙 둘러서려 애썼다. 누군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왜 질질 흘리고 다니냐?"

뜻밖의 소리였다. 더불어 내 뒷덜미도 순식간에 채였다. 나는 190cm 정도 됨직한 우리 학교 제일의 거구에게 붙잡혀 한순간에 그의 손길 안에 매달렸다. 나는 조금 익살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뭘 흘리고?"

"이거."

손에 들린 것이 흐릿했다. 히트사이클 억제제였다. 무슨 영문인지 외려 무기력해졌지만, 나는 사유를 물을 틈도 없이 곧장 그것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떻게 뺏었는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몸의 행동이 둔화되고 열이 조금씩 뇌리를 뒤흔들었다. 어쩌면 체격 차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몸이 약해지는 대신 멀었던 시야는 원래의 시각을 되찾았다. 그애는 요오쇼오키라는 이름의 남자애였고, 야구부 코치한테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름이었다. 야구부 소속도 아닌 내가 어찌 그와 친하겠냐만은, 어찌 지겹도록 이름을 올렸겠느냐만은 그는 나와 여러 담화를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타고나길 부자고 총아인지라 밑바탕도 되고 해서 최고 선수로 탈바꿈하는 건 무리도 아니라 장담했다. 그런 그였다. 코치의 얼굴을 잠시간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균열에서 완전히 부서져 파편이 되었다. 나는 곧 깨지는 평화에 부딪힌 머리를 매만졌다. 요오쇼오키는 곧장 내 몸을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가벼운 손길이었다. 나는 뚜껑이 닫힌 화장실 변기 위에서, 낙하해 부러진 새처럼 안착했다.

"줘."

내가 다시 뻗었다. 두 소년이 비릿한 냄새가 감돌아 풍기는 화장실 내부에 나를 무릎 꿇렸다. 뺨에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의 주먹으로 맞은 것이었다. 두 대 맞았다. 딱 두 대였다. 나는 얘기했다. 놔줘, 그것 좀 놔주라고, 움켜쥔 머리가 미약하게 따끔거렸다.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입으로 횡단해서 나에게 조금의 쇠맛을 주었다. 온몸을 맴돌던 힘이 빠져나갔다. 변기가 내 앞에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을 치떴다. 그의 손 어디에도 히트사이클 봉지가 없었다. 대신 요오쇼오키 친구의 바지주머니가 볼록했다. 나는 불현듯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씨발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변기 앞에 머리를 기대어 꿇렸다. 붉은 욕설이 번진 양 뺨은 차차 부풀어올랐다. 그것이 얼얼해지자 요오쇼오키는 두 눈을 조용히 내리깔며 나에게 말했다.

"네 말 대로 올해 축제는 진짜 끔찍하겠어."

"이러는 이유가 뭐지?"

"이유가 뭐겠냐? 이 새끼 가해자잖아."

"너 벌받는 거야. 인과응보 모르냐?"

누군가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들이 내 양 팔을 들려 변기 위에 뉘이듯 살포시 내리놓았다. 그리곤 히트사이클 억제제를 대충 바짓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나는 묵묵히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 사이의 그림자, 그러니까 요오쇼오키의 그림자는 특히나 길쭉하고 옆으로 넓찍하게 보여졌다. 필시 덩치가 월등히 커서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쩐지 모를 피로함이 체득되었다. 요오쇼오키가 변기 위에 힘없이 늘어뜨린 나의 몸을 향해 한마디 했다.

"벗어."

나는 파들거리는 두 눈을 내리깔아 살폈다. 그들이 연이어 바지 지퍼를 내렸다.




*본 단편은 만화 목소리의 형태의 설정을 기초로 두고 있는 동인 형태의 작품입니다*

4
이번 화 신고 2022-06-06 21:46 | 조회 : 3,839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알오버스입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