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2)

머리가 아팠다. 온몸이 눅진눅진한 물기에 젖어 물에 불린 솜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차가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허리에서부터 꼬리뼈 부근을 매만졌다. 끈적한 점액이 손바닥 사이에 묻어났다. 미묘하게도, 몸 밖은 뜨겁게 달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 안에서부터 신체조직은 그 어느 때보다 공연하게 차가운 듯 감득되었다.

"히트사이클 앞둔 오메가랑 섹스하는 게 제일 끝내줘."

"그건 네 생각이고. 소리만 존나 참잖아."

누군가가 내 볼을 두드렸다.

"다음번엔 제대로 만족시켜 줘."

그러더니 요오쇼오키는 핸드폰을 꺼내 내게로 슥 디밀었다. 정사 중 찍힌 사진이었다. 온몸에 열기와, 땀과, 눈살을 짙게 찌푸리고 있는 나의 표정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콘돔, 바지 지퍼를 올렸던 그들, 내 다리뼈가 차례로 인식되었다. 눈에 들어차는 것은 흔적밖에 없었다. 다리를 나의 나름대로 힘겹게 움직여 가며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눈꼬리와 입술에 맺힌 상처와 멍이 부어터져 있었다. 콜라가 스민 교복을 벗어 빨래하듯 씻었다. 그리고 잠시간 말리다 피가 흐르는 코를 휴지로 대충 틀어막은 후 고개를 돌렸다. 복도로 향했다. 춥지도 않은데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나는 움츠려든 어깨로 팔짱을 끼고 팔을 문질렀다. 내 다리 속에는 정액이 흘렀고 다리는 파과에 비척이고 몇 알파들이 추파를 던졌다. 펠라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레 나를 바라봤다.

"어디 가?"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숨을 몇 번 가쁘게 쉬었다. 교실로 들어섰다. 쓰러지듯 온몸을 늘였다. 의자에 늘어진 몸조차 형태가 없는 듯 흐물흐물했다. 다른 감정은 없었다. 지독한 피로가 느껴질 뿐이었다.

"쇼군. 뭐하는 건가?"

나카츠카가 내 눈 안에 길쭉하게 들어찼다. 언제 왔는지,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들어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발각될까봐 조금 우려하는 채로였다. 새삼 맑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브로콜리 머리를 향해 잔잔히 인사했다. 나카츠카의 표정이 조심스러워 보였다.

"안녕, 점심 다 먹었구나."

"콜라가 묻어있구만."

"부주의하게 흘리고 말았어."

"그래. 그런데 아까부터 누워만 있고 멍해져만 있고 무슨 일이야, 제군. 수척하고. 늘상 자기 몸을 튼튼하게 관리해아 한다고. 낯빛이 안 좋고 묘하게 혈색도 평소와 다르구만. 설마 히트사이클 기간인가?"

"응." 내가 기운이 묻어나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상해. 이런 얘기는 실례지만, 열성 오메가는 자주 겪지 않는 것 아니야? 증상도 다른 이들에 비해 옅고. 그렇잖은가?"

"특이하게도 난 자주."

"그렇군."

말을 뭉뚱그린 나카츠카가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섰다. 나는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 이윽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약을 잃어버렸어."

"아니? 어쩌다?"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됐어."

"모종의 이유가 있는 데에는 이유가 또 있겠지."

하지만 그 이유의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이 좀처럼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고서, 반죽처럼 동글동글하고 느글느글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어렴풋한 이중막을 걷어내면 진실이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피곤을 풀려고 잠을 자라고 시킨다 해도 잠은 편히 잘 수 없었다. 일순 내가 그렇게 화장실 안에서 섹스했다는 사실이 전부 부자연스럽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실이었다. 나카츠카가 유일하게 노출된 내 팔을 살피며 물었다.

"이건 뭐야? 멍 같은 게 들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말을 못했는데, 코에 틀어막은 건 뭐야? 코피 아냐?"

"계단에서 굴렀어."

"정말 구른 게 맞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런 데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다만 우선 기력이 심각하게 소진되었다는 이유가 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의 눈빛은 고심에 빠진 사람처럼 바뀌게 되었다. 순식간에 그렇게 됐다. 그도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반쯤 확신했다. 나카츠카는 학교가 끝나거든 치료를 받으러 가라고 제안했다. 교내 보건 시설은 형편없고 보건위원이 변태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병원과 보건 시설 둘 다 가고 싶지 않았다. 오메가 증상이 문제였다. 나는 연이어 헐떡이며 부활동을 끝냈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남자는 나밖에 없을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미히토가 가게 주변에서 날 불러세웠다. 혹시나 상처를 들킬까봐 자가로 치료도 감행했다. 집안의 붕대를 구하고 감는 방식이었다. 집밖을 나서는 몇분간 머리에 생각이 없었고 마음도 그랬다. 비어 있었다. 나는 다리를 들어올렸다. 주문이 오고가는 햄버거 가게 아래 단단한 침묵만 흘렀다. 그는 계산대에 있는 점원 한명과 얘기하다 재빠르게 내게로 왔다.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말이 빨리 올라오지 않았다.

"도대체 뭐냐? 얼굴빛도 안 좋아 보이고..."

나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이건 보답."

스미히토가 햄버거 세트 한짝을 건넸다. 나의 몽롱함은 깨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직 따듯한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쭈, 고맙다는 인사도 없네."

"고마워."

"농담이야. 맛있게 먹어라."

그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참. 붕대는 왜 그런데."

"계단에서 굴렀어."

"어쩌다?"

"부주의해서."

스미히토는 유심히 붕대를 지켜보다 말했다. 바짓주머니에 손이 쑥 들어가 뒤틀렸다. 들킨 것은 아닐지 싶다가도 막상 들키면 생각보다 별 것이 없을 듯 보였다.

"조심해. 조심하라고 계속 말했잖아. 그, 또, 그리고 히트사이클이지? 지금?"

"어."

"약 안 먹었지? 발정기 잘못 온 오메가 같은 거 모르냐. 빨갛고 눈밑도 부었어. 숨도 가빠 보이고. 약은 왜 안 챙겼어. 뺏겼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명히 덥고 땀을 흘리고 있음에도 조금만 감각을 되돌리자면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단지 미약하게나마 더 따스하길 바랐다.

"응. 많이 잘 아네."

"몸 변화에 민감해서 그래. 몸파니까. 나쁜 새끼들. 또 요오쇼오키일 거다. 씨발 내가 정말..."

"자기 탓하지도 말고. 그리고 조심해서 다녀. 그런 부류인 새끼들이 은근히 많아. 억제제를 뺏는 새끼나 변태 새끼. 제일 악질은 억제제 뺏는 놈이야. 치졸해서 왠만한 알파나 베타들이라면 그런 짓도 안해. 뺏긴 적도 딱 세 번이었잖아.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너가 잘못한 게 아니라니까? 전혀."

얼굴은 전혀 상기되거나 흥분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양되어 보였다. 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정이 나서 버틸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열은 안 식었고 당장은 어떻게 할 방책이 없었다. 죄책감도 쉬이 식지 않았다. 나는 그 사이 재빠르게 식은 햄버거를 베어물으며 생각했다. 발정기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든 남들에게 망신 안 당하고 넘어가면 성공이었다. 스미히토가 말했듯 지금까지는 억제제를 뺏겨본 경험이 내게는 3번 있었고 지금이 바로 3번째였다. 첫번째는 중학생 때였는데, 내가 학교폭력 가해자란 사실을 안 후로 억제제를 뺏었다. 주먹도 잘 사용치 않아 그 때는 많이 괴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날 때린 덕분에 어쩌면 더 나아졌던 것 같다. 발정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흐리멍덩하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그때는 나름 선생님께도 알렸고 때문에 앓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형편도 지금보다 괜찮은 편이기도 했다. 새삼 되돌아보니,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돈이었다. 결국 나도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방책을 강구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두 번째로는 지금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요오쇼오키가 억제제를 갈취해 간 후 더딘 발정기를 겪었다. 어머니가 걱정하셨다. 지금같이 사진 협박이라도 당한 건 아니지만 괜스레 무서워서 말 한마디도 못 꺼내었다. 그래서 연신 거짓말으로만 넘어갔다. 내가 좀 소홀해서 잃어버린 억제제라며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다행히도 그때에는 마침 방학이어서 집에만 칩거하고 최소한의 이동만 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히트사이클은 이렇게 여러모로 나의 장애물이 되었다. 그것의 방해는 빈번했다.

"저녁은 굶을게."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솜털이 빳빳이 일어나고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처를 들키면 귀찮아질 것 같아 그런 것도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이미 민감한데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가족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있는 부엌에서 기름 튀기는 소리가 풍겼다.

"네가 좋아하는 계란 후라이인데도?"

"마리아한테 양껏 주세요."

나는 미끄러질 듯한 끈적임을 느꼈다. 잘 닦인 다락방 바닥은 유난히 미끈했다. 내가 여기로 짐을 옮기면서부터 그랬다. 잠잘 때 까는 매트리스 같은 것이 없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맨발을 털었다. 그리고 가볍게 이불만 깔고 곧장 탁상 옆에 가 앉았다. 반성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 했지만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화장실 생각이 났다. 지금같은 상태에 가볍게 집중하는 것은 어려웠다. 실로 몽롱한 하루였다. 집에 들어오며 나도 생각이란 걸 하긴 했지만 화장실에서 정사 사진까지 찍히고 난 후로부턴 계속 멍하기만 했다. 마음은 왜인지 조마조마하고 좀처럼 놓이지 않아서 그들이 찍은 사진을 없애버리거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은 조바심만 지속될 성 싶었다. 언제쯤 정신이 새로 돌아올까 고민했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정신은 이미 뇌리에 제대로 박혀 있었지만 다만 잘 기능하는 정신 같지가 않는 것 뿐이었다. 기억이 왜 이렇게까지 짙게 입각되었는지 떠올려보니 내게 섹스는 화장실에서 당한 그것이 유일했다. 그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요오쇼오키가 나의 처음인 것이 쉽사리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예전에도 그런 일이 많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인가. 그간 나와 다른 알파들 사이의 유사 성행위가 있긴 있어도 직접적으로 정사를 하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비릿한 냄새와 고간 사이를 파고들던 손, 그리고 따귀, 추잡하게 욕정하는 나와 몸들, 육체들, 흐릿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떠들썩한 수군거림, 다시 선명하지 않은 화면과 장면 여럿이 억지스럽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 바지가 곧추세워져 있었다. 식은땀이 흘리며 나의 몸은 진동하듯 부르르 떨었다. 나는 이불에게로 엉금엉금 기어 향했다. 내 자신이 동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손을 머리 위에다 감싸 안았다. 낙하하는 물건에 몸을 방어하려 하는 사람처럼 그랬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금방 몸을 펴냈다. 깜빡이는 시야는 훤했다. 아무래도 동물들이 그렇듯 발정이 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남자 오메가가 자위하는 법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스미히토에게 들어서도, 그리고 요오쇼오키와 그 외 나를 괴롭히는 다른 무리들에게 들어서도 그랬다. 쉬웠다. 발기한 성기를 쥐고 흔들면 됐다. 스미히토가 말하길 항문으로 하는 자위나 바닥에 대고 비비는 자위도 있다고 했다. 그걸 지금까지 안하는 이유도 있기는 있다. 단지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몸을 새우처럼 꼬아 감았다. 어떻게 그럴지란 의문이 기도문처럼 입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자꾸 배배 꼬이듯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서 쑤시고 싶고 차라리 잡아뜯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지가 젖었는지 축축했다. 땀은 거의 눈물처럼 흘러나와 얼굴을 축축히 적셨다. 결코 눈물은 아니었다. 강간 중에도 흘린 적이 없던 눈물을 이제사 흘려내릴 리는 없었다. 숨을 많이 그리고 깊게 들이마시기 때문에 단지 내 퇴화한 가슴골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여질 정도였다. 왜 이러냐는 중얼거림만 반복됐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던 나는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자위를 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지만 요오쇼오키와의 그 기억을 두고 자위하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믿기지도 않았다. 나 스스로 분명 치욕스러움에도 손이 자꾸 아래로 향했다. 그는 나에게 부끄럽지도 않은 거였다. 그 사람은 바지를 끌어올려 여우처럼 희고 긴 다리를 움직였다. 그 사이로 원초적인 사랑이 들락날락거리고 때로는 행해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난항이었다. 나의 중단부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사죄했다. 오메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나의 눈은 멍해지고 입가에선 달큰한 냄새가 자꾸만 맴돌았다. 그랬다. 갑자기 떠올린 것에 나는 기분이 좋을 때 짐승들이 그러듯 부르르 떨었다. 옛날엔 그랬다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발정이 난 소년의 몸을 밧줄로 침대에 묶어놓아 자위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옛날, 옛날인지 아니면 내가 어렸을 적에도 그랬는지 조금 헷갈렸다. 확실치 않은 기억이었다. 아니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자위한다는 게,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의 내게 그런 기억을 갖고싶지 않았으면 하기에, 그냥 그 풍습을 떠올려버리고는 말았다. 아니면 충격요법으로 쓸개즙이나 담즙 같은 쓴 것을 달여 마시거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 너무 빠르게 태어난 탓인지 내가 그런 풍습을 겪어봤었는지는 흐리멍덩했다. 분명히 내가 겪은 일이 아님에도 자꾸 생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떠올리기 버거웠다. 아무래도 생각은 그만둬야 되겠다. 내가 두 눈을 훤한 시야로 끔뻑거렸다. 몽롱한 기운이 찾아들고 원초적인 사랑은 그것을 쫓아낼 만큼 셌다. 그래도 나는 자버렸다.

-
노트북을 켜 보니 니시미야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사하라라는 초등학교 동창과 같이 만나자는 제의였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나의 기억에 뚜렷한 학생이었다. 유일하게 수화를 배워 니시미야와 친해졌던 애였다. 그걸 계기로 우리들이 못살게 굴어 결국 전학을 갔다. 나는 노트북을 들어 마저 연락을 보내려다가, 그만두고 그냥 엎어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굉장히 뻔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피곤하기도 했다.

"그래서 피곤한 이유가 뭐냐?" 스미히토는 무엇인지 모를 덩어리를 튕겨내었다. 그것은 톳코타이의 드러난 발목으로 꽂혀 되돌아왔다. 그들이 재밌게 웃었다.

"별거 아냐."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어제 발정기 속에 뒤척거렸던 것이 상기되었던 것이다. 얼굴이 햇빛에 감싸진 덕분으로 발개진 나의 낯빛은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눈가 주위는 피곤이 잘 드러날 수 있게 거뭇해져 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싫었다.

"그건 그렇고 다리는 또 왜 그래?"

"뭐가?"

"발자국."

나는 내 다리를 흘끔거렸다. 짙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쇼코의 동생인 유즈루에게 맞았던 흔적이었다. 그것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유즈루라는 아이가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이 어릴 듯 보였지만 단순히 키가 작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저번 쇼코를 찾아갔을 때 빵을 떨구었던 아이인데, 그때 잠깐 이야기를 나눈 이유로 그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쇼코랑 이야기하면 자기한테 걷어차일 수 있다는 규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통을 들이댔다. 검고 짧은 머리칼이 훅 끼쳤다. 그것들은 내 흉부 위에서 조심스럽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냄새 맡아봐.''

''응?''

''쇼코랑 같은 냄새지? 같은 샴푸를 써서 그래.''

살냄새의 종류는 아니었고 확실히 샴푸 냄새였다. 그런 걸 보니 유즈루는 오메가가 아니려니 하고 홀로 추측했다. 여자일지 남자일지도 모호했다. 다만 어린 티가 많이 나는 입술 언저리가 패였다. 유즈루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진기가 그 사람의 목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무슨...''

''같이 목욕했어. 그만큼 거리낌없는 사이야. 그 애랑 사귀고 있어. 그니까 들이대지 말라는 소리야. 알아먹어?''

유즈루도 쇼코와 같은 곳에 살고 있으니 자전거로 타서 금방 갈 정도의 거리는 되었다. 그 애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녔고 뭐든 찍기를 좋아했다. 나도 찍혔다. 아마 유즈루가 지우지만 않았다면 남아 있을 것이다. 찍힌 조각조각의 장면들을 사진 속에 담아 오롯이 간직하고, 쇼코의 메세지에 따르면 단정히 붙여 놓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 애는 꼭 그렇다. 뭐든지 담아 간직해놓을 것 같아 덧없이 희끄무레하거나 더럽거나 혹 관리가 잘 안 된 사진은 없을 듯 했다.

"아무튼...그런 게 있었어."

"주변에 엮이는 사람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어?"

"그럼 갑자기 그런 이상한 짓, 그니까 안하던 짓을 할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나는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였던가 생각해보았다.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어디 가게?" "억제제 받으러 가게." 버렸을 수도 있고 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지만 너무 무료해 시도해보고 싶었다. "어디 갈 거면 쟤랑 같이 가." 그가 톳코타이를 가리켰다. 무신경한 눈길을 주는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스미히토가 왜 그를 나와 붙여주는지 줄곧 알 수 없었지만, 추측하건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고객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대하기는 불편했다. 위압감이 생기거나 거칠어보이는 인상도 아니었다. 그래서 달리 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다시 스미히토의 호의를 거절하고 홀로 가려 발걸음을 떼었다. 머리 뒤에서 파장이 일어 떠들썩했다. "아니. 갈게." 가만히 있던 톳코타이가 말했다. 나도 별 수 없이 어깨만 조금 들썩였다. 그는 스미히토와 가볍게 키스하고 이번에는 나를 지키는 모양새를 냈다. 그것은 웃기고 어색했다. 말만 안할 뿐 그도 히트사이클 증상을 불편히 여기는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오메가라는 이유로 두 남자끼리 동행하는 것이었다. 히트사이클이 뭐고 또 거기에 꼬이는 알파들은 또 무엇이라고 그렇게 됐다. 어떨 때에 사람들은 오메가를 시한폭탄처럼 취급하기도 해서 이따금씩 따분한 동행이 필요했다. 그가 알파인지 베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선 그것 때문에 나는 그에게 미안했다. 그런 것쯤이야, 나는 내가 알파였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싫어하던 변종으로,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될 줄도 정말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복도로 꺾어 들어갔다. 요오쇼오키가 보였다. 주변에는 굳게 입을 다문, 그러나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시끄러울 듯한 학생들 몇몇이 모여 있었다. 다부진 몸체는 창가를 가로지른 햇빛을 막았다. 나는 할 말을 물려두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죽일듯이 노려봤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지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톳코타이에게 떠나라고 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 무리를 마주보았다. 요오쇼오키의 낯빛은 여전히 불그스름한 햇빛에 번져 똑같이 붉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피부가 붉고 못생긴 도깨비처럼 보였다. 내가 입을 열었다.

"억제제는 아직 안 버렸지?"

"물론." 그가 대강 말했다.

"내게서 뺏은 걸 돌려줘."

커다랗게 곧은 양 손이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 귀머거리 여자애하고 연락했냐? 언제?"

요오쇼오키는 동문서답을 뱉었다. 또한 그런 잡다한 사실은 나와 마주치지도 않던 그가 어찌 안 것인지 약간 궁금하기도 했다.

"연락했는데 일주일 전쯤에 내가 보냈고 어제 그 애가 내게 보냈어." 내가 가능하다면 보관하고 있는 억제제를 좀 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좆까라고 했다. 나를 부주의한 년으로 만들 거라고 했다. 나는 그가 너무 많은 감정과 의미들을 내게 쏟아붓는 것 같다고 여겼다. 이후 나는 시선을 돌려가며 줄곧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억제제를 찾기는 글렀고, 해를 입는 것보다 무료한 게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록 사람이 많아 힘들겠더라도, 혹 맞거나 또 강간 당할지도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허..."

"어떻게 알았어?"

"뭐가."

"그..." 뺨을 내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고개를 돌려 다시 바라보려고 하자 다리를 쳤다. 곧 중심을 잃고 쓰러진 탓에, 나는 그들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가만히 살피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보였다. 좌측의 학생이었다. 누굴까 하며 고심에 잠겨있던 사이 누군가가 얼굴에 발을 들이밀었다. 들이밀었다기보단 그것으로 짓눌렀다. 드디어 알아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의 친구였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전학을 가서 몰라봤었다. 그 반듯한 턱선은 여전히 남겨져 있었다. 오래 볼 틈은 없었다. 요오쇼오키가 나의 얼굴을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그의 얼굴 또한 멀어졌다. 내 얼굴도 꼭 그렇게 멀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오쇼오키는 수업에 갈 시간이 되자 언제나 그렇듯 홀연히 떠나갔다. 그 외 무리들도 요오쇼오키가 떠나자 같이 떠났다. 제일 마지막에 따라붙은 학생만이 멈칫하고 날 내려다보았다. 내가 일어섰다. 그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나의 친구였다. 바지를 털어내고 힘없는 다리에 완력을 실었다. 나는 그대로 세면대로 가 발자국과 상처가 남은 얼굴을 씻어냈다. 따가움이 조금 번졌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요오쇼오키와 함께였을 때보다 좀 더 침울해보이는 그를 반듯이 쳐다보았다.

"너 이름이 뭐였지?" 그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라사키야. 무라사키 가쿠쇼." 거울의 나는 나를 줄곧 물끄러미 쏘아보고 있었다. 멀끔해진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초등학교 때 전학가고 나서부턴 줄곧 보지도 못했어."

"그러게."

"저." 무라사키가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번갈아 곁눈질했다. "아까 일 말인데, 그럴 생각 없었어. 미안해." 이윽고 내가 거울을 등져 거울 속의 그가 아닌 진짜 그를 보았다. 건조한 낯빛 아래 으레 아버지들에게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에게서 그런 종류의 표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서 나는 빠르게 물기가 촉촉한 손을 털었다. "괜찮아. 그런데 요오쇼오키는 정말로 억제제를 안 준대?"

무라사키는 모호하게 답했다.

"아마 그럴 것 같은데. 너한테 재미를 좀 보고 싶나봐. 싫어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그래."

그러면 내 억제제는 못 받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붙잡지 않는 한 그랬다. 나는 그가 웬만한 것에라도 집중을 잘하지만 좀 별난 성격이라고 여겼다. 하여간 억제제와 연관된 일이라면 좋게 넘어갈 법도 한데 오메가를 대하는 사람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저, 이시다. 아직도 기분이 안 풀린 거라면 정말로 미안해."

멀거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앞으로 얼굴을 위치시킨 채 서둘러 떠났다. 요오쇼오키가 그랬듯이 문간을 풀썩 뛰어넘으며 복도로 빠져나갔다. 뒤에서 급히 뚜벅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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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1:49 | 조회 : 1,368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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