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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이 눈을 떼냈을 때, 그곳은 마치 여느 감금업체처럼 강박적이라는 느낌만을 뚜렷이 선사해주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만 칠흑처럼 깜깜했고 사물이란 것들은 죄 전무해 보였다. 피맺혀 흐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 입을 틀어막고, 바로 그 순간 끌려간 것의 정황을 되돌려 보았다. 그것은 명백한 납치였다. 안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지할 곳 없이 깜깜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 상태도 느끼어 보았다. 손은 특별한 개조 수갑을 덧채운 듯 겹겹이 꽁꽁 묶여있었고, 얼굴은 실컷 얻어터져 얼얼해 있었다. 잇몸 한 부분이 모조리 터진 구강에서 차차 핏물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귀만이 잔뜩 예민해져 있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인지 유추조차 가능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 석현이 바 내부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던 일리안의 걸음걸이였다. 아무 사람이나 무의식중에 관찰하는 버릇이 진가를 발휘할 때였다. 그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때?"

그것이 다였다. 묵묵부답이었다. 적막이었다.

"뭐야? 이유도 안 묻고."

애써 고개를 갸우뚱 놀리다가, 핏대가 벌겋게 선 손이 석현의 살갗에 닿았다. 석현은 이상하도록 대답이 없었다. 구슬을 입안에 넣고 굴리듯 양 눈을 느릿느릿하게 살펴보았다. 햝는 건 분명 아닌데, 그렇게 여김에도 거침없이 느껴졌다. 햝듯이 눅눅하고 끈적한 시선이었다. 속눈썹이 맹렬히 떨렸다.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그의 숨소리가 흥분으로 부풀었다. 별안간 짝 소리가 울려퍼졌다. 석현의 얼굴이 돌아갔다. 돌아간 얼굴은 다시 제자리로 서서히 돌아갔다. 일리안은 멍하니 형상을 응시하는 동시에 알알이 혈액이 맺어져 나온 볼을 엄지로 슥슥 닦았다. 그는 척 발을 낮췄다. 그리곤 석현을 향해 속삭이듯 말을 건네었다.

"이상해. 너만 보면 주체가 안돼. 사실 고향, 아니 내가 살던 곳에 있을 때는 너같이 예쁜 남창을 봐도 별로 동요하지도 않았거든. 그런데 너는 참 좋아. 너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 너무 좋아."

"..."

"아. 미쳤다고 말해도 좋아."

그는 잠시 시선을 흐리게 두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감금업체야."

"알고 있습니다."

"불 켜."

순식간에 불이 켜져 눈알이 따끔했다. 누군가가 빠져나가는 기척이 들리고, 석현의 눈이 차차 지하실을 살피었다. 화장실, 세면대, 침대가 구비되어 있는 좋은 감금실이었다. 문은 단단한 금속 재질의 커다란 문이었고, 배식구의 넓이는 대략 가로 100에 세로 20으로 좁은 편이었다. 창문은 없었다. 환풍구만 아주 조그맣게 설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석현은 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대가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고. 일리안이 자신을 감금한 데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이유는 빤했다. 가능한 것은 따로 있었기에 그저 감금실을 빠져나갈 궁리로 가득 찼다. 울면서 사정해봐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일수쟁이들이나, 오래전 저에게 일당을 밀려 주었던 사람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울며 사정해도 그냥 더럽다는 듯 치워내고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괜히 울음으로 힘을 빼는 것조차 곤란했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말허리를 이어붙였다.

"오늘은 일단 피곤할테니까 자고."

그 가스가 바로 그가 그토록 어이없다고 여겼던 수면가스였다. 하지만 생소한 만큼 알려지지 않은 그런 가스의 효능은 별로 좋은 것이 못 되었다. 우선, 석현은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는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입가가 다 여물지도 않은 동생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병약한 몸이기도 한데. 혼자서 그런 고생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또 업소에도 나가봐야 했다. 가족들이 할 걱정도 문제였다. 시간을 더 끌면, 마음 졸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감금된 것 때문에 어머니를 걱정시키게 만드니 이게 무얼까. 그의 마음에 작은 불만이 일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마저도 걱정으로 금새 사라져 버렸다. 석현은 밤중에 조용히 일어나 바깥을 둘러보았다. 걱정에 수면이 방해할 새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감금업체의 직원들이 나타나, 석현은 그들과 이열치열 맞붙은 후에야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졌다.

이른 날 아침 석현의 눈가에 얼룩덜룩히 멍이 들었다. 일리안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멍든 눈두덩에 금방 키스라도 건네줄 것처럼 갸륵히 그를 노려보다 말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는 그것 외론 별말이 없었다. 개밥이 들어있는 그릇을 내밀 뿐이었다. 석현은 약간 주저하며 그것을 먹었다. 평소 먹성이 좋았지만 그런 것들은 배고픈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섭취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과자 같은 것이 입안에서 자꾸 씹혔지만 별반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음식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 단지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가리를 굴릴 뿐이었다. 딱히 공격할 만한 수단도 전무했다. 방금 받은 개밥그릇을 제외하면. 심지어 손이 묶여 있어 공격 시도도 불가능했다. 그는 밧줄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목줄."

그리고 목줄을 묶었다. 그것은 석현의 활동에 어떠한 물리적인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적어도 질질 짜고 울면서 사정은 할 줄 알았는데. 수치심도 안 느끼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일리안의 마음에 고정시킨 의문이 피어올랐다. 지나치게 덤덤하고 지나치게 초연한 것은 장점이었으나 수상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도망칠 궁리로 석현이 바삐 셈한다 해도 부득이하게 상관이 없었다. 요점은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르리라고 여겼다.

"멍청한 거야, 아니면 마음이 단단한 건가..."

"..."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착하다고 칭찬해줘야 하나. 아니면 밥이라도 더 줘야 되나."

그가 슬슬 다가오는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석현의 고개를 휙 잡아들어 입술이라도 맞댈 것 같은 구도가 된 데에도 별로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귀에다 속삭인다면 그래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인가 하여 갖다대었다. 일리안은 자신감에 사로잡혀 목석같은 석현의 귓전을 살살 간지럽혔다. 속살이 부들부들 떨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석현은 여전히 굳은 낯이었다. 석현이 이전에 그와 느꼈었던, 그리고 크리스티나와도 느꼈었던 보드랍고 끈덕진 기류가 분출해나오면, 그 순간부터는 무슨 페로몬에라도 사로잡힌 것처럼 잔뜩 상기되어 어지러웠다. 에로틱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최소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되니까 제발 그래줬으면 했다. 사실 어느 한쪽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바랬고, 다른 쪽은 제비꽃처럼 절개있게 개화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감추고 있었다.

"말해."

기회였다. 석현이 어깨를 옅게 움츠러뜨리며 굳은 얼굴을 돌렸다. 민감한 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보자니 더 민감해보였다. 밧줄 때문에 달리 저항할 수도 없을 터였다. 붉은 혀가 삐죽이 튀어나와 함함한 덜미를 햝아올렸다.

"응?"

이쯤되면 정말 말할 때도 되었다. 그러나 석현은 건조한 눈빛을 감추며 차마 흥분에 못 견디는 청년을 가장하였다. 상대방은 그저 흠뻑 넘어갈 따름이었다. 일리안은 이것을 오롯이 소유한다는 사실에 따른 행복 탓에 거의 폭발해버리기 직전이었다. 성욕에서 느끼는 쾌감보다 그런 소유욕의 쾌감이 배로 강렬했다. 툭툭 끊어지는 말이 아랑곳않고 들려왔다.

"왜 그래?"

미친 것 같았다. 파르르 떨려오는 등 뒤에서 두 눈을 빛내며 함박 물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일리안은 석현의 예상과 목적에 부합하도록 행동했다. 분별력이 없었다. 또한 어김없이 시선이 바빴다. 아버지를. 나는 아버지를. 상대방의 눈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석현의 정신은 일순 잘못 낀 안경처럼 어렴풋해졌다. 아니 나는 괜찮아. 누가 이기는지 궁금했다. 결국 욕망을 이기는 것은 누군지 함박 물어버렸다. 또 아아 하고 솜털들이 뻣뻣이 일어섰다. 그 솜털들은 아기나 막 자란 소년의 솜털처럼 짤막하고 뻣뻣했다. 새털같이 엉긴 미세한 털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더웠다.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섬세했다. 그는 볼에 앙증맞게 돋아난 솜털 다음으로 목을 낱낱이 훑었다. 흰 손아귀에 흰 목줄기 하나, 다시 페인트로 덮혀 얼룩져 더럽힐만큼 아름다웠다. 일리안이 목젖에 숨을 묻었다. 오르내리는 목젖 사이로 혀가 빼돌았다. 조급하게 빼도는 혀, 침, 아니, 그것이 과연 눈물인지 땀인지 부러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을 그간 다른 사람들 손에서 뛰놀게 두었다니 말도 안되었다. 환희의 말미에서 그는 이윽고 심한 질투를 느꼈다. 석현의 목은 별안간 졸리기 시작했다. 손아귀는 죽이려는 사람처럼 거세게 매달려왔다. 석현은 입술을 깨물며 조그만 파동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그뿐이었다. 완전히 묶여 저항할 틈을 주지 못했다. 그는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에 거슬릴 정도로 맺히는 것을 느끼며 오롯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숨소리에 숨이 부족했다. 건조하게 매달려오는 소음 없이, 방안에선 오로지 흥분한 두 사내의 숨소리 뿐이었다. 그것들은 간간이, 이따금씩 반항의 기미도 혼합하여 들려오곤 했다. 두 숨결이 달리기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조류의 솜털처럼 겹겹이 아름다운 눈꺼풀의 눈물이 식을 즈음 그는 증오를 멈추었다. 조르기가 멈추었다. 길고 긴 증오였다. 질투는 그렇게 그까지 버릴 때쯤 멈췄다. 그는 손을 가볍게 떼낸 이후 석현의 목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다시금 목을 훑었다. 입술이 스멀스멀 벌레처럼 서식해오고 있었다. 입맞춤은 지울 수 없는 흉터마냥 남았다.

"말했잖아."

그가 석현을 끌어안았다.

"그 년은 죽을 거라고."

석현은 막 깨어난 새처럼 조용히 밭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인지 그 년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너도 좋지?"

그가 석현을 끌어안은 채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석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은 불쾌함을 거치지 않고 굳어 있었다.

"나랑만 살자. 나랑만 여기서 살자. 말 잘 들으면 더 크고 넓은 집에서도 살게 해줄게."

"안됩니다."

"대신 인형을 사줄게."

우리는 아기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란 단말마는 저편으로 넘겨둔 채로였다. 그는 냉랭하면서도 즐거움이 얼핏 서린 음성으로 인형을 흥얼거렸다. 명랑한 곡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짓으로 석현의 귀 뒤를 쓸었다. 공기는 네 입으로 들어가 숨쉬기 위해 만들어졌고, 말은 네 불그스름한 입에 한번이라도 올려지는 그 영광과 혀의 횡단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테다. 달콤한 종용을 지껄이며 그는 여전히 희희낙락했다. 긴장을 지나치도록 내놓고 있었다. 석현이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자 그것은 더욱 지나치게 심화되었다.

"이거다, 이거구나. 그날 자위를 했구나."

그가 백살 먹은 노파처럼 혹 어린 아이처럼 길게 입을 벌려 웃었다. 석현은 자신이 바랬던 것이 이루어짐에 내심 환호하며 멍하니 자신도 상대방을 향해 웃어보였다. 길게 입을 벌려 웃었다. 사실 판단력이 기능한다면 온종일 죽상이다가 별안간 웃는 사람을 이상하게 볼 법도 했다. 일리안은 그러하지 않았고 잠시간 씨가 트며 개화하는 꽃잎처럼 웃었다. 고향꽃처럼 그랬다. 아버지가 웃는 모양과 너무도 닮아 있어, 기실 그의 목덜미에는 잘디잔 소름이 돋아났다. 잠깐 뿐이었다.

"좋아, 내가 풀어줘야 돼, 그렇구나? 응?"

입맞춤, 교합, 그것이 끝나면, 아, 그는 죽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석현의 입장에서 정말 흥미롭게도 이 사람은 너무도 바보같았다. 어째 이리 단편적인 흥미를 곧추세우게 하는가. 그에게는 미친놈에게 잘못 걸렸네 같은 사뭇 일반적인 원망도 없이 가엾었다. 은근하게 어수룩한 것도 아니고 대놓고 물러터진 것만 같아 그랬다. 바보같은 사람. 바보같이 부자였던 사내. 아버지를 너무도 사모했던 바보같은 사내를, 그간 업소에서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정한 손길로 애무했다. 언젠가 일리안은 그랬었다. 바보같은 말투로 다정하게 말했었다. 우리, 우리 베니스로 떠나자꾸나. 거기서 행복하게 인형 두명과 살자꾸나. 원하지 않습니다. 가죽 장갑이 부딪히는 소리와 피가 맺혔던 양 무릎, 변함없이 흰 손아귀와 희끄무레한 얼굴들 속속들이 사이에서 밤은 노상 어슴푸레한 방관의 향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
"얼음을 먹을래."

한순간이었다.

조악한 위화감이 은은히 석현을 감싸들었다. 행위가 끝난 이후 건어처럼 끊임없이 땀을 흘리며 맥도 추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쳐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빠르게 맥을노출하는 기회가 있을 수 있냐고 말이다. 사람의 눈구슬은 기회를 노림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종이컵이니 쓸모가 없었다. 일리안은 유리컵에 쏟아부은 얼음을 바깥의 직원의 냉장고에서 꺼내오라고 지시했다. 유리컵이 쟁반 위에 종이컵과 함께 건네지고, 얼음은 그 위에 보석 묶음처럼 가지런하게 놓였다. 얼음을 만지면 손이 아팠다. 그래도 그냥 들었다.

"있지."

"..."

얼음을 씹어내는 소리가 퍼졌다. 얼음을 다시 한번 건네자 석현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내었다. 얼음이 들어차 말을 잘 못해 웅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조숙한 어린아이가 지껄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야? 네 아버지..."

"..."

석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혹여나 알아챌까 시선을 깔아두면서였다. 아버지라 함은 석현의 인생에서 좋지 않은 단어였다. 도박으로 생을 마감하고 인생의 24시간을 채운다는 느낌으로 살고 그런 거였다. 내키는대로 자식과 어머니를 팼던 사람으로 그는 추억하고 있었다. 석현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돈을 줄 때 드디어 사랑도 줄 수 있었으나, 아버지가 죽자 그것도 내키지 않아 그의 등줄기에 빨대를 꽂고 빠는 것도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도박을 사랑했다. 일리안도 도박을 사랑했다. 내키는 대로 돈을 쏟아붓고 잦게 흥분해 자주 재산을 죽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 뿐이었다. 그에 한해서 아버지는 속빈 강정 같았고 그의 연인에게도 그것은 일맥상통했다.

"우리 아버지는 꼭 너 같았어."

얼음이 아직도 녹지 않아서 조금. 일리안이 차차 다가오며 석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했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석현도 자신의 입술을 서로 맞부비며 이빨 끝치만 보일 정도로 서로를 벌렸다. 얼음을 녹일 새로운 입가가 필요했다. 따듯한 혀가 닿았다. 어느날인가 포도즙 사이에서 뒹굴고 입맞춤했던 날이 떠오를 정도로 달콤한 감칠맛이 혀 아래 남았다.

"내 아버지가 이용했던 입맞춤이었어."

얼음을 입맞춤으로 녹여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을 걸 그랬었다. 능숙해서 의심했던 실력이었다. 살덩이가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만들고 쪼여보며 능숙치 않게 행동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입안의 얼음이 녹아 없어질 즈음까지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그가 먼저 포갰던 입을 뗐다. 작은 감금실에 몸을 포갠 서로의 눈이 똑같이 동그랗게 뜨였다. 방 안에 서로의 숨소리밖에 안 들려서 미묘한 기분이었다. 키스가 먼저 유혹한 것이다. 입맞춤, 얼음, 석현이 그를 먼저 유혹했다고 저 스스로 조그마한 이성을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자조했다. 석현의 혀로 자신 입안에 얼음을 모조리 녹여버린 것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죽을 것 같았다. 온몸을 성욕에 몸부림치고 침대 위에서 정사를 나누고 하는 개같은 일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좋았다. 지나친 행복 때문이었다. 사실, 그런 입맞춤이야 호스트바에서도 얼마든지 실행해볼 수 있었지만, 그리도 고요한 곳에서, 오로지 그만이 소유한 남자를 안으며 입맞춤하는 것은 지나치게 좋은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감금됐다는 사실에 석현이 동요하며 평소답지 않게, 어울리지도 않는 유혹을 감행한다거나, 긴장해 굳은 것도 업소에선 쉽게 보지 못했던 묘미였다. 그것은 꽤 흥미로운 유흥거리였다. 사랑은 그의 입장에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방식의 일종이었다. 굳이 납치해버리는 것이 뇌가 터질 것 같은 환희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여겼다. 숨소리가 터져나갈 듯 했다.

석현에게는 유리컵이 필요했고 이 상황이야말로 그 목표에 적합한 상황이었다. 널 믿어, 아, 팔에 밧줄이 쓸려 아프다면야 어쩔 수 없을 게야, 다른 걸로 바꿔 묶을테니 잠깐 휴식해, 그렇지, 그러면서 흐물흐물 만들어주었다. 경계심도 푼 데다 나 잡수라는 것마냥 밧줄도 무방비하게 풀어버렸고, 체력 소진, 비이성적인 감정, 좋은 위치선정 등등이었다. 무원칙한 성격에 자기 몸을 함부로 다뤄 더욱 적절했다. 석현이 조용히 일리안의 등 뒤로 들어섰다. 유리컵을 들었다. 반동이 이상하리만치 없었다. 석현은 쓰러지듯 허청허청 일어나 일리안의 뒤를 보았다. 슬슬 그것이 내리꽂혔다. 즉흥적인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약점이 많다는 것을 상기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은 안나도 옛날인 것 같았다. 허나 납치할 것이면 뒤를 안봐주고 제대로 진행해야 될 것 아닌지. 어디든지 엇비슷한 형태였다. 호스트바에 취직한 이후 그에게 좋은 점은 그런 군상들을 구분하기 뛰어나도록 변화했다는 데 있었다. 손을 조금씩 더 들고, 석현은 머리를 찍었다. 머리통은 아주 가까웠다. 가까이 소음이 났다. 꽂혔다. 유리컵이 깨져나가는 소음이 감금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피가 진동했다.

일리안이 예상 외로 한번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의 긴장감이 증폭되었다. 의외로 맷집이 강한 모양이었다. 그가 마른 침만 애꿏도록 삼키며 목젖을 오르내렸다. 위기였다. 일리안은 피가 흐르는 머리를 그대로 냅둔 채 조용히 물었다. 무언가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잠잠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침묵만 그저 무얼 바라느냐는 것마냥 태연하게 흘렀다. 다시 한순간이었다.

"..."

"석현아, 네가 그랬어?

그가 눈을 들어올려 석현을 쳐다보았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 같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마악 깨지려는 참에 먼저 당겨 건드렸다. 석현은 양 눈을 조용히 깜빡였다. 무책임하게 오고가는 시선이었다. 탄성이 있었고 팽팽하게 노랬다.

"네가 그랬어?"

그가 되물어도 반응은 여전히 깜빡임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

"네가 그랬냐고. 내가 묻잖아."

"..."

"너 아닌 거 알고있어."

일리안의 눈썹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신뢰하면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궁리하는 불안한 표정이 석현의 눈에서도 보였다. 그것을 내비춰보이면 안될 터였다. 왜 자꾸 추궁하는지 그저 빨리 지나가면 좋을 줄끈이었다. 긴장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일순 석현은 불안감에 자제력을 잃다시피 했다. 속셈을 세우며 골몰하던 머리가 굳어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이 핏대 불거지도록 뻣뻣이 굳고,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려워졌다. 그 정도로 자제력을 잃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러했다.

"..."

"너 아니라고 네 입으로 말해."

피는 계속 흘렸다.

"어?"

"나밖에 없는데."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제하고 싶음에도 억지로 머릿속에서 떠올려졌다. 그는 또다시 유아적인 불안감으로 되돌아갔다. 구슬처럼 투명한 눈알에 피범벅이 된 머리가 고스란히 담겨졌다. 저러다가 깨지면 어떡할지 싶은 유년기스러운 공포였다. 구강이 구깃구깃 구겨지는 느낌에 목젖조차도 서서히 당겼다. 방아쇠를 당기듯 당겨지는 것이다. 총알이 새어나와 피융 하는 유아적인 소음으로 전율하며 심장을 조였다. 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흥분되었다.

그리고 심히 불안해졌다.

믿었는데 또. 아냐. 괜찮아. 관리. 관리를. 관리를 할 거야. 내가. 내 손으로. 석현. 석현아. 다시. 다시. 널 수선할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깔끔하게 고쳐줄게. 이쁜 잔에 담아 위스키로 담글 수도 있었다. 그렇다니깐 이라고 또 말하고, 불안감과 환희가 더불어 찾아와 머리는 계속 피가 멎지 않았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 머리를 잘 폭행했다고 생각했다. 일리안은 피가 흐르는 머리를 한번 쓱 만져보았다. 손가락에서 끈적하게 흘러나오는 혈액을 대충 입은 옷에 묻었다. 구슬같이 예쁜 눈알, 인디언 추장의 딸이 가진 그런 구슬보다 예쁜 눈알이었다. 그것을 꼭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먼 개척자들처럼 그조차도 곧 그것들을 원하고, 광활한 토양보다도 아름다운 그것을 대륙 앞에서 기꺼이 탐할 것이었다. 일순 석현의 눈알에 가로새긴 실핏줄이 부드러운 피로 가득 찼다. 삼십 촉 백열전구 아래서 그것은 가히 불그스름하게 빛이 났다. 홍협이라고들 했다. 무화과 위에 적시도록 떠오른 홍조였다. 그는 몇번이고 물었던 질문을 반복했다.

"너가 그랬어?"

석현의 머리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주먹이 꽂혔다. 반복되는 사진처럼 그 얼굴은 돌아가고 피는 터졌다. 그는 이성을 상실하다시피 했다. 피를 보자마자 나타난 반동이었다. 일리안은 여전히 기세등등 할 것이다. 너랑 있어. 너랑 있을래. 난 내게 적중하려 때리는 네 주먹을 좋아하잖아. 일리안이 서로 바라다보며 마구 웃듯, 되려 싸움붙는 상황에 고양된 것처럼 말했다. 상황을 탈피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여겼다. 잃어버린 정신력에 불과하지만 그는 일리안에게 동요되지 않으려 애쓰며 입속말으로 중얼거렸다. 나름 급한대로 일리안에게로 몸을 떼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주워담았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주워담을 것이 없었으므로 우선 부리나케 화장실로 향했다. 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우선은 두 사람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한 쪽은 석현이 아니었다. 일리안은 다소 긴 훈련 그러니까 이상한 소양으로 맷집에 강화되었고 석현은 강점이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색무난한 몸체였다. 일리안이 뻥 뚫린 개방형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었다. 그는 한가로이 그와의 싸움도 고무된 상태로 진행했다. 잃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납치의 목적에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어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억거렸다. 먼저 화장실에서 석현이 집어든 것은 면도기에서 빼낸 칼날과 유리 재질의 세정제 한 통이었다. 무기로 쓰기엔 초라했지만 상대방이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이라면 괜찮은 얘기가 되었다. 개싸움은 면할 수 있었다. 석현이 부리나케 달려들어 유리병을 휘둘렀다. 개싸움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적으로는 무리였다. 물론 빗나가기엔 했다. 둘 다 술에 취한 듯 힘이 빠져 있지만 날렵하기는 여전했다. 일리안이 분별력 없게 주먹을 던졌다. 세정제. 세정제. 입속말로 무슨 이유랄 것 없이 반복했다. 석현이 달려들어 세정제를 던지려 시도했다. 그것은 곧 무산되었다.

"야."

"..."

"널 두고 못 쓰러져. 못..."

석현이 폴짝 뛰어 세정제를 내리쳤다. 세정제가 파드득 소리를 진동시키며 산산조각 났다. 머리를 두번이나 맞았다.일리안이 두 눈을 깜빡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친 머리에서 진득하게 검은 피가 거뭇거뭇 흘러나왔다. 그가 놀라움 섞인 웃음을 내비쳤다. 이럴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마냥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벌려 빠르게 내뱉었다.

"씨발! 석현아!"

끝음이 서서히 쓰러져갔다. 이에 그의 몸도 서서히 쓰러져갔다. 머리가 터져나간 것이었다. 피 박힌 입술도 모조리 터져 너덜너덜했다. 석현이 일리안의 머리카락을 콱 쥐었다. 그가 비척거렸다. 냄새는 없었다.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당장 보이는 것이 변기밖에 없었다. 일리안이 다시 일어섰다.

"석현아...왜, 나랑 같이 살아야지."

"이러지 마십시오." 그런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되풀이되는 끝머리의 노래만 시의적절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사랑한다고 했지?"

"한번만 더..."

석현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뒷눈으로 문밖을 살폈다. 잠겨있나 살폈다. 그는 치명상을 입어 쓰러지다시피 한 일리안을 뒤로하고 신속히 화장실 밖으로 향했다. 일리안이 비척거리며 걸어나왔다.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그저 비웃으며 옆편으로 저벅저벅 걸음했다. 비틀, 또 한번 비틀, 그렇게 힘없는 걸음으로 걸었다. 석현의 손에는 이미 면도날이 들려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보탬이 된다면 나름대로 큰 보탬이었다. 경직된 석현은 잔뜩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열어주십시오."

"석현아, 네가 날 좋아해...난 생포, 생포하라고 할 거야. 죽여주지 않은 게 다행이지?"

그가 팔을 걷어 무엇인지 모를 물건에 중얼거렸다. 일순 덜컥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타고 흘러나왔다. 석현의 심장에 다시 한번 방아쇠가 당겨졌다. 분명 위기였다. 애애앵 소리가 진동하듯 퍼졌다. 감금업체 직원들을 호출한 것임을 직감했다. 명확할 수밖에 없는 위기였다. 석현은 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아니었다. 깜냥이라기보단 맷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더군나다 감금 업체 직원들은 따로 훈련까지 받은 상태였다. 석현은 고심에 빠졌다. 무엇보다 먼저 갈아치워야 할 일거리 또한 남아 있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우선 후한을 제거하자는 생각으로 석현은 몇번이나 폭행당한 일리안의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힘이 다 소모된 탓인지 다부진 그의 몸은 힘없이 늘어졌다. 그는 그 몸을 가벼이 눕혔다. 그의 입에선 계속해 피가 흘러내렸다. 이빨부터 혀 전체가 끈덕지게 붉었다. 끊임없이 요란스레 발동하는 사이렌, 피, 쿵쿵거리는 소음이 겹쳐 들렸다. 시끄럽기가 도박장을 넘어섰다. 흥분을 부추길 요소는 넘쳐났다. 일순 일리안이 비척였다. 석현이 경계 태세로 곧장 그의 목을 조르려 시도했다. 일리안이 완력으로 석현에게 끄응거리며 겨우내 입 맞추었다. 석현은 자신이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무시해버렸던 것이었다. 피맛이 났다. 일리안의 이빨과 혀에서 모조리 피맛이 났다. 일리안이 모국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말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석현의 입에도 피가 잔뜩 묻었다. 석현은 왜 자신이 가만히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품으며 다시금 그를 제압했다. 석현은 당장 생각나는 대로, 목숨을 끊을 수단을 떠오른 뒤 쓰러진 그의 목을 매만졌다. 그리고 힘껏 졸랐다. 목젖에 정신없이 입맞추던 날을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숨막히도록 아픈 곳에 둔 채 최대한의 고통을 주었다. 숨막히는 컥컥 소리가 몇번 들려왔다. 괴롭기가 비할 데 없이 아릿아릿한 숨결이었다. 이윽고 멎었다. 목숨이 끊어진 듯한 일리안의 얼굴이 창백한 낯빛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석현의 숨이 가빴다. 그가 잽싸게 코밑에 손을 대보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으나 아주 옅게, 정말 쉬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밀하고 얇은 숨이 살아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을 확률은 몹시 희박했다. 입 주변의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순간 석현의 눈알은 장기 수술을 받던 그때의 같은 두려움으로 막연히 부드럽게 휩싸였다. 그와 먹었던 위스키, 목넘김이 부드러웠던 연기와 욕조, 바다, 칩들, 굴, 모든 것이 뇌 아래로 수직 하강하는 듯 했다. 아버지에게 죽지 말라고 말하던 때가 생생한데 아직 이렇게 죽으면 안되는 것인데 왜 왜 왜 안락한 무덤 곁을 떠나갔는지 의문인 아버지처럼 그렇게 하강하고 떨어지고 떠나갔다. 베니스로 떠나자꾸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 속내를 덮혔다. 얼음 냉기가 아직도 심장에는 거센 듯 미미하고, 사랑스러운 살덩이 두개로 남겨져 있었다. 그가 눈썹을 곤혹스레 찌푸리려던 때였다. 잘못 낀 안경처럼 시야가 어른어른 어렴풋했다. 죽였다는 생각에 숨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던,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철옹성같이만 여겨지던 문이 열렸다. 그리도 가볍게 열린 것이었다. 석현은 그대로 숨을 들이쉬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한 8명 정도로 보여졌다. 누가봐도 승산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찌저찌 하면 잘 갈수도 있겠다, 하고 그는 희망을 품었다. 뚫을 수 있었다. 한 레게머리가 먼저 석현의 앞을 막고 주먹을 던지며 무식하게 달려들었다. 그런 것들은 약과였다. 녀석들은 복도까지 끌고 가 석현을 발로 마구 팼다. 석현은 우선 온몸을 달팽이처럼 웅크리다가, 좀 싸울 기미가 보이자 벌떡 일어서 닥치는 대로 면도날을 휘둘렀다. 일리안과 같이 있다보니 저도 미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면도날로 사람을 난도질하고 눈알에 찔렀다. 적중하기 어려웠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휘갈기면 어쩌다 들어맞는 것이었다. 피가 얼굴에 튀고 멍이 이곳저곳 들었다. 발가락은 좀처럼 펴기가 힘들 지경으로 경직되었다. 석현은 아예 눈앞이 안보이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래도 훈련받은 녀석들이라고 쓰러져도 좀비같이 몇번이나 달려들었다. 석현은 비겁하지만 낭심도 좀 차고, 포박하다시피 힘으로 억누르며 억세게 버텼다. 정신력만큼은 거셌다. 마침내 전부 따라붙지 않게 되자 석현은 곧장 고행길처럼 하염없이 긴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쌔고 쌨다. 달리고 달렸다. 직원들이란 패거리가 복도 앞을 막고 나섰다. 석현은 깨진 조각 몇 개와 면도날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두 발은 목조를 삐걱삐걱 밟으며 아무렇게나 걸었다. 그들의 코앞까지 도달하고, 급한대로 손에 쥔 날을 눈알에 꽂아내렸다.

"씨발!"

묵묵하게 가면서도 석현은 이따금씩 쏟아지는 욕설에 귀가 아팠다. 복도까지 2명을 단말마에 해치운 후 뚜벅뚜벅 걸었다. 당장이라도 걸음 속력을 올려, 코앞에까지 다가온 엘리베이터 버튼을 정신없이 삑삑삑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억누른 채로 조심히 한 번 지그시 눌러냈다. 버튼에 피가 조금 묻었다. 그는 최소한 깨끗하게 쓰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안은 커다란 혈액이 응고되어 둘러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더러워졌다. 그곳에서 또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었다. 일단 시설은 사람이 굉장히 많고, 그가 만나온 사람들도 슬프게도 많았다. 그럼 얼마나 많이 죽인 걸까, 뭐 그런 질문을 생각할 정신력도 죄 소모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제발.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그는 속내로 중얼거렸다.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이제 정말 한 걸음만 더.

바지에 피가 흥건했다. 길이 너무 뜨거워서 이상하게 일렁였다. 사시사철 공사판 현장에서 일한 석현으로선 낯설지 않은 모습이였다. 그럼에도 뜨거움 아래 피가 딱딱히 굳는 것엔 익숙하지 않아. 왜 유독 힘든지는 알긴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만 주억거렸다. 공사판을 지나갔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자취를 감추기 좋은 길로 횡단했다. 석현은 담배를 일절 피우지 않았지만 어쩐지 이런 상황에선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되게 주먹질 당한 몸을 가다듬으며 석현은 그렇게 느꼈다. 우선 어이없게도 당장 떠올리는 곳은 그가 알고 있던 국수집이었다. 연관성은 없지만, 오이 고명과 계란 하나가 올라간 따끈따끈한 잔치국수가 간절했다. 그러나 돈이 한푼도 없었던지라 호스트바로 무작정 향했다. 밤까지 영업하고 있어서 몸도 마침 씻어낼 수 있있다. 다행히 때마침 기가 막히게도 내부에는 크리스티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핏덩이야?"

석현이 조용히 검지손가락을 입에 올렸다.

그는 핏덩이가 된 몸을 목욕물에 이끌었다. 훈김에 근육이 뻣뻣하게 풀렸다. 이윽고 신경이 흐물흐물하게 융화되어 공기 중을 부유했다. 어이가 없지만 그곳은 아름다웠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최소한 둘 아니면 셋.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방식으로든 감지되었다.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잠깐의 눈맞춤이 싸늘하게 식은 사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더운 아스팔트 위를 지나가면서도, 닫힌 국수집을 서성일 때조차도 끊이지 않았다. 일리안은 죽었을 것이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지라도, 앰뷸런스를 불러도 당장 살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저 그런 확신이 뇌리를 강하게 메웠다. 확실했다. 그이는 끊임없이 이어가던 질긴 것이 그것 하나에게 픽 죽어버렸다. 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옅었다. 석현은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을 온몸으로 맞으며 잘게 떨었다. 추위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입매나 입술빛은 떨리거나 푸르게 변색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굳은 얼굴이었고, 특히나 그날은 정말 딱딱히 굳어 일말의 유약함도 허락할 것 같지 않는 낯이었는데, 살인을 감행한 날 말이다.

"붕대 먼저 감아라. 살갗 아려."

그러나 석현은 그 상처에 물 부어도 아프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벌어진 상처에 붕대를 감아내었다. 욕조에서 나온 다음이었다. 사람을 죽였더니 그런 아픔도 그의 마음에 감수할 법 했다. 석현은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정액의 뒷맛을 삼키려 애썼다. 성기를 쥐고 부드럽게 감싸안았던 그의 혀였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말투가 그의 귀에 선했다. 습기찬 지하실에서, 식은땀과 더운땀이 연이어 누출되는 감금 업체 안에서 성기를 맞부딪히며 그들은 끈덕지게 교합을 계속했던 것이었다. 혀를 감싸안으며 얼음을 녹여주었던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한참동안 그것을 녹였다. 허나 일리안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흐릿하게 사라져 벌써 없는 사람 같았다. 석현의 입맛에 꾹꾹 씹었던 개밥도 흐릿하게나마 맴돌았다.

그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석현이 이용하지 않는 해결 방식이었다. 물론 그는 일절 그런 방식으로 회피하지 않았다. 허나 하루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석현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후 그런대로 눈에 띄이지 않게 집에 들어와 그 다음날에도 일찍 현관문을 나섰다.

석현은 모든 게 단지 꿈이라고 여기며 머리를 숙였다. 그 모든 소란, 죽은 일리안, 쓰러진 사람들, 폭행, 감금업체. 그에 관한 모든 것들은 다만 하나의 장몽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도 안하고 일리안이란 사람은 그냥 없었다고 여겼다.

"몸이 왜 그래?"

"아."

석현이 고개를 더욱이 수그렸다.

"어?"

"좀 싸웠습니다."

"네가 싸울 애는 아닌데."

점장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참견을 하고 나섰다. 석현은 묵묵히 형 주위로 가 영업준비를 마쳤다. 타오를 듯 마셨던 술에 목이 쓰리고, 아파도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자신이 점차 예민해지는 것을 느끼며 석현은 고개를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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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33 | 조회 : 922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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