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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현은 달동네 판잣집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태어날 때 아주 잠깐의 울부짖음 후 뚝 울음을 그쳤다던 석현의 인생 역시 석현이 처음 세상에 났을 때처럼 늘상 눈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인해 사이다병 안의 농약으로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을 때와 더불어 집안에 쳐들어온 일수쟁이들이 되려 측은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볼 때에도, 우아하다 못해 굳건하게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던 어머니가 바짓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보였을 때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등을 토닥여 주고 엉망이 된 집안을 정리하고 울고 있는 동생들을 달랬다. 그리고 일수쟁이에게 찾아갔다. 울고불며 사정하고 제발, 이라거나 하는 말들이 면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신체 능력을 보장했다. 깨끗한 신체, 불순물 없는 장기 등 눈 앞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최선을 다하기를 보장했다. 깔끔한 방식이었다. 이후 석현은 불법 장기 수술을 받은 뒤 자퇴를 했다. 대학교는 막론하고 당장 재학중인 전문계고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곧장 학교 뛰쳐나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성인이 될 무렵 어머니는 앓아누웠다. 막노동을 했고 빚이 머리에 잔뜩 쌓여있었다. 더 빠르게 더 많은 금전을 득할 방법이 필요했다. 판잣집은 벗어났고, 사글세방으로 옮김에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다. 막노동 판을 전전하기야, 그걸로도 충분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유독 식욕이 왕성했고, 어느 정도 조절하려 했지만 다른 욕구들처럼 쉬이 억눌러지지도 않았다. 고질적이라고밖엔 여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욕구라는 것이 왕성한 편이었다. 집안의 기질인지 몰라도 동생들도 그 왕성함을 나름 타고나 있었고, 그 애들은 이치대로 자라갔다. 그때 즈음 담배를 사주는 친한 형은 진득지게 금전을 득할 제안을 건네게 되었다.

"키도 크고 괜찮아. 이 정도 몸하고 얼굴이면 왠만한 직장인보다 더 많이 벌어. 정말 별거 아니야. 섹스 한번. 끝."

몇 번의 고심 후 그곳으로 향했는데 조짐이 이상했다. 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그냥 조그마한 바같은 곳이라고 했지만 외관은 호텔에 가까워 보였고, 더 깊숙한 홀에서는 목소리와 덩치가 큰 남자들 여럿이 도박을 하거나 비교적 바깥쪽에 위치한 불법 환전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석현이 형에게 의문점을 표한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러더니 이곳은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불법업체라는 말을 바뀌지 않는 그 예의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석현은 형의 소개로, 개중 가장 커다란 규모의 업소에 관여하게 되었다. 속어로 호빠였다. 실제로도 그 불법업체에서 가장 성행하는 업소가 여성은 물론남성을 주력으로 내세운 성매매 업소라고 했다. 그는 형과 함께 소개를 받은 뒤 간단히 내부를 둘러보고 양복 한 무더기를 받았다.

"그거 입어."

군말 없이 탈의실에 들어가 양복을 갈아입었다. 몇번의 검사 후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도출해냈다. 브랜드 옷을 입어본 적은 없어 어색했다. 경직된 자세는 다부지게 거울을 노려보았다.

"근데 석현아."

석현이 고개를 돌려 다소 어정쩡한 표정의 형을 마주보았다. 그가 우물쭈물 서두를 열었다.

"여기가 남자들 모여놓고 하는 데잖아. 남자한테 박으려고 하는 남자들도 오고...뭔지 알지? 그래서..."

아. 좁은 입이 열렸다. 이후에 사실 여자들보다도 그런 새끼들이 더 많이 온다하며 사족을 덧붙이기도 했다. 관장을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였다. 말을 했다. 분명 말을 뱉었는데도 반응은 늘상 똑같았다. 예, 아, 뭐 그 소리밖에 안하는지 그는 의아했다. 무반응이 신기해서, 혹시 이렇게 순순히 듣기만 하고 탈주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을 자아냈다.

"왜 그렇게 태연하냐."

묵묵부답이었다.

"진짜 할려고?"

형이 코웃음을 쳤다. 석현은 잠시간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 하나를 물었다.

"그런데 관장 얼마나 아픕니까?"

첫 날부터 바로 손님을 받지 않았다. 몇 번의 질문 후, 형은 그냥 바에 잠시 있으며 보고 배우라고 했다. 너같은 애들은 당장 시작해서 사고치는 것보다 그게 나아. 급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설거지나 청소를 도왔다. 일주일 후가 되어서야 그는 뒷방 신세를 졸업했다. 룸 하나에 대여섯명끼리 들어가서 선택을 받아 가장 빨리 그곳을 나왔다. 손님들 중 너무 빼먹는 게 많고, 가게에 하도 오래 머물러 기생충이나 하숙생이라 불리는 크리스티나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사실 적극적으로 대시한 쪽은 그녀였다. 여기 오래 산 이방인이었고, 장기 이식 수술의 자국이 남아있는 선수를 초이스해 관계를 맺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음 석현은 그녀가 자신의 간이식 수술 자국을 보고 화색하며 그것을 계속이고 응시하는 것이 불쾌했으나, 생각보다 좋은 여자란 걸 알고, 점차 친숙해지고 익숙해져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는 이런저런 손님을 받으며 일했다. 가장 큰 날개는 어느 주에서 거처 없이 생활하고 있다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최근 석유 산업에 발을 들여 얼떨결에 부자가 된 남자로서 이름은 일리안이고 성은 발렌타인이었다. 소식통에 의하면 본래 그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이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에 그냥 한국에 왔다가, 도박중독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까운 도박업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의외의 안정감이 있기도 하고 본래 살던 곳에서도 그닥 발붙여 살지 않았던 터라, 이곳에 또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그냥 한 몇년간은 계속 눌러붙어 있었다. 도박을 하려는 의지가 대단해서 그 의지로 한국어도 독파한 사람이었다. 현지인 수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친한 딜러의 말로 그 사람은 쓸데없이 판을 잘 키우긴 하지만 막상 마무리 짓는 실력은 고만고만하다고 했다. 대충 돈만 많은 새끼였다. 왜 그래? 그런 얘기에 관심없어 보이는 애는 니가 처음이네. 누군가의 일갈이 두런두런 들려오자 그가 괴상한 방식으로 고개를 휘둘렀다.

"정말 그래요."

다 네 돈줄이잖아. 형이 그러면 멍한 눈으로 안주 없이 후까시만 들이켰다. 한번 물어보라고 하면 고개까지 저었다. 그런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 그 사람밖에 없었다. 밤 골목에서 그 앨 만났지. 담배 냄새가 안 나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그만큼 이상하도록 백상목같은 피부를 가진 사람도 처음이었어. 누구냐고 대뜸 물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그 사람을 업소 내부에서 별안간 다시 만났어. 주변에 사람이 몹시 많았고, 그 애 주변엔 푸른색 셔츠를 갖춰입은 연상의 남자가 한명 이미 있는 상태였는데도, 난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그 애에게 같이 자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지. 또 무미건조한 향기가 났어. 그 향기와 그 피부며,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나는 그날 빨간색 셔츠와, 그애는 검은색 셔츠와. 돌이켜보면 그랬다. 그 애는 정말로 이상했어. 이렇게 해도 됩니까, 하며 계속 존댓말을 행사하고는, 무지막지하게도 순수하고 입술을 깨물어 참는 것도 보이는데 어쩐지 그것이 마냥 아무 의도가 없다곤 보여지지 않았다. 그런 년들은 재미없어, 그래도 양주값은 한번 먹여봐야 할 것 같아. 그런 사람은 이상했다. 유독 담배를 자주 주었고 개인콜도 자주 주었다. 그리고 감내했다. 팅팅 부은 입술을 끄집어내어 그 조그만 깨물림에 맞부딪혔다.

"그냥 차라리 한번 하지."

정말 단조롭기 짝이 없다고 그는 은연중에 느꼈을 뿐이었다. 건조한 향기와 흰 손아귀는 잦게 일리안의 머릿속을 맴돌아 발을 떼내지 않았다. 향기가 마구 들큰이고 있었다.

"아니오, 저는..."

거절의 손길은 막 날라들어온 새로운 손길로 묵살되었다. 그가 도박광이란 사실은 조금 더 빨리 알았어야 했나 봤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가 없어."

석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도박도 했었는데, 얼떨결에 손님인 그를 이겼다. 그 덕에 크리스티나는 그가 일리안에게 안 좋은 눈길을 산 게 분명하다고 단언지으며, 석현을 룸에 끼고서 밤새 깔깔거렸다. 안 좋은 눈길이란 것이 후에야 다행히도 좋은 의미긴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마침 때맞추어 발동한 짓궃음을 원동력 삼았다. 그래서 섹스하기 전에 시험을 해봤다. 석현에게 떡이 될때까지 술을 먹이곤 했다. 가짜 양주나 섞인 술을 먹이거나 가죽 구두에 다 피운 담배를 지져 그것을 담았다. 구토해 침을 흘리고 얼굴을 찌푸려가면서도 참았다. 딸꾹질이 났다. 뭘 참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술을 먹이니 건조한 향기는 차라리 건조해지지 않도록 더 진하게 흘러내렸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 간단한 까닭이었다.

"그래, 너 나랑 해야겠다."

일리안이 코트를 그러쥐으며 웃었다. 그리고 키스를 했다. 그러자 석현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분위기도 띄우지 않고 그렇다고 따로 말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주 무의식 중에 떠올랐다. 다만 그뿐이었다. 재밌는 분홍색 양복을 입어봐. 그날은 줄곧 비가 왔다. 석현은 어깨 부분이 젖은 분홍색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우산도 여동생 것의 분홍색이었다. 고양이가 장식으로 그 위에서 데굴거렸다. 개인콜을 또 받았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는 그의 우산을 빼앗아 자기 머리 위로 기울였다. 석현의 얼굴부터 머리카락까지 낱낱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머리칼은 평소처럼 세팅을 받지 않고 편했다. 다만 그는 무표정했다. 투둑, 투둑 빗소리에 눅눅하도록 양발을 공굴리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그러지도 않았다. 같이 놀자. 어린아이처럼 굴기는 싫지만 어찌 되었든 그 사람 앞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이 안자고 했잖아, 라고 얼마나 다독였는지 몰랐다. 왜 그래. 오늘 재미 좀 보자. 괴상망측한 옷은 어떻게 구했던 거야. 빌린 거에요. 누구한테? 기생충 누나. 걔가 누군데? 양 쌍의 발들은 빗소리에 걸었다. 둘은 이것에 익숙한 사람들인 양 굴었다. 묻고 싶다. 묻어버리고 싶은 것들, 그리고 물어버리고 싶은 것들이 혼미했다. 내가 선물했던 것 아니었나. 옷을 벗기자 건조하도록 흰 셔츠가 드러났다. 키스는 안 했다. 한쪽은 발을 조금만 더 힘주어 디뎌야 했다. 도박하는 것과 비견될 정도로 고조된 기분에 그는 이게 얼마, 간만임을 꾸벅꾸벅 체득하며 더 디디었다. 몸은 파고들었다. 숨이 아주 밭았다.

오늘 물어볼래? 그는 업소와 관계없이 따로 술집에 그를 불렀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창밖은 사무치도록 캄캄했다. 또 했어. 그가 입밖에 내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잔을 빙빙 돌렸다. 입에 자꾸 홀짝이게 만드는 유인술이었다. 아니었다. 술은 싫은데 다만 자기 의사를 쉽게 꺼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놈의 술은 지긋지긋했다. 신발에 담긴 술, 지진 담배와 찌끼, 올리브, 폭탄주 따위가 뒤엉켜 부대끼는 술. 머리가 어지러워 초점은 흩어졌다. 석현은 잦은 토기로 답답한 속을 억누르고서 술을 다시 끼얹었다. 전등까지 눈물 젖은 모양으로 정신없이 어룽거렸다. 들리지 않는 재즈 가수의 노래는 계속해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랑해 달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귀를 기울여야 할 쪽이 따로 있다는 걸 잠시간 잊었다. 그의 상대방이 연신 묻고 있었다.

"너는 섹스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내가, 내가 물었잖아.

"저야 당연히 형을 생각하지요." 망연한 투였다. 형처럼 적당히 맞추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능글거림이 힘들었다.

붉은 콧잔등이 술을 한잔 더 먹이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치기나 재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당연했다. 공사치거나 농사쳐서 명품을 빼먹을 생각이 자명한데 아주 무력해 보였다. 보드카 아니면 붉은 캄파리가 또다시 담겼다. 표정은 차분하게 굳어져 있어 웃겼다.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바보같은 눈으로 나를 보잖어?"

그가 체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조차 성장기 청소년의 얼굴처럼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피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웠다. 어지러운 분위기는 청소년의 얽은 얼굴처럼 점차 피어나고 개화했다. 석현은 은근한 토기에 줄곧 말이 없었다.

"너 가끔씩 기계 같아."

그는 포기했다.

"예."

이후에는 둘 다 말을 하지 않고 빤히 시선만 교환하는 경우가 잦았다. 가끔 석현이 저를 그런 방식으로 쳐다볼 때 죽을 것 같았다. 내장까지 뻣뻣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 자그마한 눈빛 한결에도 한아름 받은 듯 심장이 두근두근 아려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검은 눈이 많다지만 그들의 눈은 누구보다 푸르게 밝은 빛으로 일맥상통했다. 드디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고아원 갔었다. 돌아온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리고선 곧장 수녀님과 대화하며 저를 잘 처리해달라고 당부한 아버지의 안색이었다. 그 이후로 그이는 성경을 몇번씩이나 되풀이하여 읽으며 한밤 두밤 세밤을 꼬박꼬박 세어봤을 것이었다. 요새는 일어판으로 읽어. 그를 추억하느라 기억을 끄집어내느라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도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엇갈렸다. 그것은 허무함과 비슷한 감정으로 자리잡았다. 갑자기 무언가 통째로 잊어버린 것과 같았다. 그토록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에 한해선 집착에 가까운 양상을 보인 일리안에겐 아버지가 되려 속빈 강정이었다든지 했다. 후에 그런 이야기는 어딜가나 즐비한 편이라고 고아원생 친구가 디디듯 말했다. 저딴에 위로하려고 꺼낸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즉각 대꾸를 꺼냈다. 아니야. 아버지를 속빈 강정 같다고 싫어하는 아들은 말이지, 그런 후레자식은 흔치 않지. 아버지를 이해해야 말이지, 그래야지 말이지...

그런 말을 꺼냈다.

차라리 우리가 가족이었으면 좋을 뻔했어.

다시 할까. 아니, 이게 몇번일까. 나는 항상 꿈꿔왔어. 순종적인 사람이 책 읽어주는 그림을 항상 꿈꿔왔었어.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그만하면 완벽할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책 읽어주는 그림을 상상하자면 늘 그 화풍은 완벽했어. 일리안이 손을 들어 입가 주변에 말라붙은 초췌함을 덜어내었다. 머리카락이 모랫바람에 쓸려가듯 보드럽게 쓸려갔다.

"봐봐. 너 기계같아. 네 고객한테 집중 안하냐."

사실 정말로 집중하지 않은 쪽은 따로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장난을 좀 쳐본 거야. 됐다라는 푸념조가 들려왔다. 눈이 읽는 것처럼 훑어냈다.

잠시간 등불 아래 깜빡이는 석현의 넥타이에 미친듯이 키스를 하고 후에 그것을 석현의 팔에 단정하게 매달아주고 싶은 것을 생각했다.

"한참동안 있어봐."

"예?"

"네가 한참동안 내 집에 와서 계속 진짜로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안할거란 거는 아냐. 예쁜 잔에 위스키를 따를게.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돈을 뿌려줄게. 집을 줄게, 땅을 줄게, 여자를 줄게, 날 이용하도록 하게도 해줄거야."

그가 그렇게 말하며 석현을 마주보았다. 그리곤 노곤한 웃음을 띠었다. 이로 웃는 것이 아닌 감정으로 웃는 것이었다. 석현은 그 웃음에 아무 말 없이 침묵만으로 일관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팽창을 반복하는 양 속눈썹이었다. 그는 일순 그 눈이 구슬처럼 단 순간에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유아적인 불안을 체감하며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그리고 실밥이 삐져나오듯 말했다.

"아니. 넌 그런 걸 싫어했었지. 넌 정말이지 이상하단 말이야. 그냥. 내가. 뭘 줘야하지. 의아하게 느껴지겠지만 난 공세하는 것밖에 못해."

석현은 그런 것 같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눈에게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까봐 아예 눈맞춤을 피하려 눈을 감아버린 것 아닐까. 그는 잠시간일지라도 옅은 공황상태에 빠져 혼돈을 부화했다. 때아닌 순간이었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마음대로 초대하셔도 됩니다. 예전에도 개인콜으로 많이 부르셨으니까.

무색한 표정 앞의 그가 말없이 웃었다. 다시금 그는 고아원에 머물렀던 시절처럼 한없을 정도로 나약해졌다. 아버지의 긴 밤을 순정처럼 기다리던 때같이 그렇게 애달팠다. 확실히 이상했다. 특정한 사람 앞에서 추락하고 또 추락하고 안전망 없이 떨어지며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다. 직면하기 싫을 정도로 비참한 감정이었다. 갑자기 사람을 너무 가지고 싶었다. 착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남들보다 조금 눈에 띄이진 않을지라도, 그래도 마일 단위의 거리 앞에서도 반드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몹시도 굶주린 상태였다. 그리고 위장은 비참함에 쪼그라들어 매상 배가 고팠다. 개인콜을 받아들일지 기릿날을 기다릴지, 힘든 선택이었다.

"저."

"앞으로 도박을 하지 않을게."

"아니에요, 그러실 필욘 없습니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석현아, 분명 넌 가족을 사랑하는 게 맞잖아. 내가 보기엔 석현이한텐 가족을 사랑하는 눈이 있어. 나도 그걸 보고 싶어서. 퍼주고 날 헌신해주는데 넌 분명히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그런 게 보여. 어. 너무 슬퍼. 그건 네 잘못이 아냐, 노력해도 바뀌어지지 않는 감정이야. 그건 어쩔 수 없어.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진심이었다. 그토록 피곤하고 집요한 외국인 아니 손님은 처음이었다. 석현은 이제는 밀려오는 연민마저 체득했다.

"사랑해요, 형. 저 진짜로 형을 사랑합니다."

"아니야. 그런 건 네 잘못이 아니지. 내가 잘못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정신없이 술을 따라먹으니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되는구나. 내가 도박을 하지 않겠다니 그런 것은..."

술 냄새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향처럼 진득하게 풍겨왔다. 그런 것은 향이라는 단어라기보단 구린내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터였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가 오랫동안 겪어오던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에게서 석현으로 척도를 돌렸다. 상사병은 끝이 났다. 그렇게 기억을 잃어버리다시피 하고, 작은 말 한마디에도 고개를 꺾어가며 차라리 피해버리고자 싶어졌다. 그는 잠깐이라도 석현의 동생인 서영이나 미영을 납치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자신에 놀랐다. 중도에도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선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사람 특유의 희미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익살스러운 것도 멍한 것도 아닌 미묘한 미소였다. 아름다운 종류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석현아. 어디 봐, 집중해."

"예"

"집중해. 딴데 보고있지만 말고."

그가 다부진 팔 한쪽을 건넸다.

"팔에 손 대세요."

"어."

석현은 불현듯 일리안이 자기 여동생인 미영이와 서영이를 합쳐놓은 것 같다고 느꼈다. 서영이는 의젓했고 미영이는 아직 불안정했다. 그 남자는 의젓하고 불안정했다. 어려우면서도 쉬웠다는 게 그리도 불완전한 형태로 다가올 줄은 몰랐었다. 귀에는 이제 피딱지가 곪을 지경이었다.

"아,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그대의 예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한국 와서 처음 들었던 노래였다.

"창밖에는 낙엽지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핼쓱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또한 누구도 불리우지 않았던 곡조였다.

겁이 나서 그래요. 어려운 게 많아요. 석현은 그날부로 근조라 불리우는 짤막하고 누르스름한 봉투,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거쳐졌을 터인 봉투를 받아들고 몸져누운 그의 어머니에게 그것을 건넸다. 기릿날이었다. 그간 일리안과의 사적인 만남으로 모인 것들도 많았다. 돈은 작금에 얼마 정도 모아져 있었다. 깜깜한 적막 속에서였다. 아직 젊어뵈는 생생한 얼굴과 헐거운 옷을 걸쳐입은 여인이 고개를 빼들었다. 어둠 속에서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에 가시지 그러세요. 석현의 어머니는 힐끔 봉투를 눈여겨보았다. 그러고선 한숨을 건너쉬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말이나 행동이 없었다. 인생은 도박장 게임이에요, 잘못하면 진짜 훅 가는 거야. 어머, 그거 진짜...tv는 은은히 빛나며 두 동생을 파랗게 물들였다. 이번 패는 또 당신이 땄어. 그의 목소리는 때없이 떠올라 티브이 화면 속의 목소리와 미묘히 겹쳐갔다. 멍하니 동생들의 아동용 담요 주변으로 가 악몽에 칭얼거림을 보듬으며, 석현은 멍하니 고독을 체감했다.

그 사람은 날이 밝자마자 노래에서 누락된 부분을 이어부르며 왔다. 지독한 바람이 한 계절의 긴 우기처럼 길게 이어오던 날이었다. 너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사진을 찍고 싶은 날이었다.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려 여자들은 자주 입안을 짓씹고, 특히 일리안처럼 단정치 않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은 시력이 훼손되어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일리안은 우산을 툭툭 짚으며 순탄하게 발걸음을 디디었다. 마치 모래사장을 가볍게 걷듯 여유로웠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가 석현의 옆편에 빙글 돌아오며 말했다. 달콤한 숨이 닿아오는 것이 적나라했다. 귀부터 볼까지에 부옇게 인 솜털이 몽글몽글 달아올랐다. 뻣뻣한. 뻣뻣하게 펴진. 소름을 느끼며 귓속에 집어넣어진 목소리 여럿이 있었다. 귓전이 못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꺾으며 외면해버리고 싶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는 도외적으로 혹 외설적으로 입술을 살짝 벌리고선 가벼이 내뱉었다.

"캔버스에 서로를 담아놓거나 같이 진득한 뭔가를 만지며 교감하자. 수영도 괜찮아. 술을 잔뜩 담은 욕조에 함께 몸을 부벼도 괜찮아. 고양이들을 풀어준 잔디정원에서 놀아도 돼."

그냥 연인들이 할법한 것을 생각해놓았다고 하는데, 일리안이 나열하는 놀잇감은 점차 성적인 놀잇거리로 변모해갔다.

"키스를 해도 괜찮아. 다만 얼음을 입안에 넣고 키스해야 돼. 체리꼭지를 혀에 묶어야 돼. 서로 온몸에 잼을 발라 햝아야 되고. 다른 사람을 불러 너를 매질하라고 할 거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일리안은 그 긴긴 바람을 전부 이고 온 미소를 띠며 싱싱하게 웃었다. 스팽킹이라구 알긴 해? 하고 잘게 잘게 퍼져나오는 파장이었다. 석현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든 괜찮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무덤덤한 표정이 그의 진심을 훔쳤다.

"나는 너랑 공식적으로 교제하고 싶어."

말 하나하나에 진심을 꾹 눌러담은 편지처럼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석현은 두 눈을 살풋 내리깔으며 말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아니면 왜 안되는지 이유라도 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불편해하실 겁니다."

"석현아, 넌 교제도 일종의 일거리로 보고 있잖아. 안돼. 내가 안된다고 해야겠어. 억지로라도 해야 돼. 억지로라도 해."

어린애처럼 신경질부리기도 하고 성숙하기도 한 사람 앞에서 어찌 굴어야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안됩니다."

이 새끼를 납치라도 해서 붙잡아둬야겠다고 다짐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미국으로 떠나든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해서라도 지긋지긋한 우리나라를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석현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보수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 변화는 바라지 않았다. 교제라는 얼핏 보면 이상한 관계에 자신이 받아챙길 도움은 없었다.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네가 뭔갈 받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사랑하지만 교제는 불가합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그는 취한 것처럼 허청허청 뱉어냈다.

"네가 진짜로 그렇게 맘 먹었다면 교제에 낭비할 시간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하는 것 아니냐?"

기미는 그 후부터 보여졌고 예감됐던 것이었다.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말들이 내뱉어지고 또한 회수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 지난 노을이 내려앉을 날엔 마음을 굳혀야만 했었다.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는 경우엔 그에 맞는 돈을 지불하겠어."

일리안이 젖어버리다시피 한 음성으로 느지막하게 내뱉었다. 그 제안이 흡족하단 것. 석현의 뇌리는 그것이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현은 그런 자신이 처음으로, 혐오스럽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저조차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 금전적인 관계로 맺어진 한 쌍의 비공식적인 교제가 시작되었다. 고백과 입맞춤은 숱하게 받아왔지만 교제 한번 나눠보지 않았을 정도로 철벽같던 사람이 시작한 관계였다. 일리안에게는 두 번째 사랑이었고, 석현에게는 그야말로 고집스럽게 뭉친 덩어리같은 관계였다. 그래서 곧 물기가 달게 배여 한입 베어물고픈 촉촉한 관계였다. 난 번개가 싫어서 그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간은 비가 주욱 왔다. 토양은 다시 눅눅해졌다. 밤은 밤바다 한가운데처럼 어수룩히 깊었다. 그는 늦은 밤 석현을 불러놓고선 방 모서리 구석에 양 귀를 부드럽게 막은 채 틀어박혀 있었다. 꼭 붙박이 같았다. 이윽고 일리안은 창문 안팎의 섬광이 무섭도록 번쩍거리며, 곧 굉음이 울리리란 것을 예감했다. 굉음은 울렸다. 몹시 컸다. 일순 일리안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그가 묻었던 고개를 들어 석현에게로 맞추었다. 두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지 모를 정도로 비어 있었다. 사람이 필요했어. 평범한 사람을 부르지 않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고, 석현도 그것 또한 납득했기에 그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리안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일리안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비척이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석현이 먼저 침대 안으로 들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딸꾹 소리가 자꾸 났다. 그가 석현의 품으로 들어갔다. 얼핏 덩치가 비슷해 꼭 맞았다. 심장은 자꾸만 크기를 불렸다. 일시적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제일 무서운 건 빛을 먼저 보는 거야. 그러면 자꾸 무서워하게 돼."

"인형을 드릴까요."

방금까지 당구장에 앉아 뻑뻑 담배를 피우며 큐에 초크를 칠하고, 가느다랗게 길던 손에 혈색이 죄 붙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딸꾹질은 당구장에 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

"아니. 그런 건 안돼. 심장이 커지고 있잖아."

또 굉음이 울렸다. 그가 몸을 떨며 그것을 조금만 더 구부리고 있었다. 숨결은 빗소리 사이로 쟁쟁히 와닿았다. 이상했다. 도박장에선 그렇게나 담대한 사람이 번개를 무서워하며 떤다는 것은 일종의 이상한 반전이었다. 이 소리 들려. 빛이 난다는 게 무섭다고 했다. 밤 동안 까만 것이, 까만 흑백세계 속에서 은연히 기어오르는 섬광이 무서워서 다만 그랬던 것이었다. 그가 조그맣게 호흡했다. 책을 읽어줘. 소리는 작게나마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선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자꾸만 두통이 일고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석현은 우선 일어서 책장 안 즐비한 책들 중에 아무 것이나 골라 가져왔다.

"그거 야한 책이다."

석현이 별 대답없이 책을 후루룩 펼쳐 첫장으로 되돌아왔다. 일리안의 표정은 어둠과 침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마 또 두려워하는 표정일 터였다. 그것을 중화시켜주고 싶었다. 차라리 그가 말한 내용대로의 책이라면 목표에 부합해 오히려 더 나을 것이었다. 그는 선연히 입을 열었다.

"숨을 헐떡였다. 깊은 밤에서 음악 소리는 차차 잦아지고, 하루살이들의 울음소리 또한 짧은 수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이는 자꾸만 소리를 냈다. 들키면 안되는 것을 알았다. 허나 소리를 더 겹치게 만들었다. 창밖의 더러운 벌레들이 조금만 더 강하게 울어주길 바랐다. 정부를 감당해야 할 이런 상황만큼은 끔찍히 싫지만 최소한 그는 내가 감당할 가치가 있는 좋은 남자였다. 내게 따로 감당할 남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돌하게 추진해오는 무던함이 참 흡족했다. 우리는 오래간 싸워야 했다. 사실 그것은 두 사람 전부가 원한 사항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두 사람 전부 원하지 않았던, 지겹도록 길게 끌던 불필요한 싸움일 수도 있었다. 거부는 애무로 바뀌고 그만하라는 소리는 진득하도록 부유하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촉촉한 관계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촉촉했다. 또 물기가 많은 복숭아를 베어물듯 단 살결이었다. 그가 차차 밀착되어왔다. 그리고 막 개화하는 꼿처럼 순순히 웃었다. 우리 아직 솜털들 속이잖아. 웃음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사실이었다. 황금색 솜털은 아직 어린아이 것처럼 덜 자라 퍽 귀여웠다. 손길이 닿았다. 누군가의 애무하듯 사랑스러운 손길이 솜털에 닿아 살근살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에겐 이쯤이면 완전히 사라졌을 터였다. 소매를 잡아당겼다. 딸꾹질은 멎었다. 그는 선연히 웃으며 이젠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속삭였다. 번개가 또 쳤다. 미소 지으면서 가벼이 넘어갈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그에겐 두려움은 확실히 중화되고 있었다. 딸꾹하는 옅은 소리가 났다. 이윽고 섬광이 일었다. 몸을 만져도 얼마든지 괜찮으니까. 그가 석현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오늘 밤은 끝내자.

응.

모든 것이 끝났다. 그가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뜸 그랬다. 휴일이지. 일리안은 물론 같이 드라이브도 하자면서, 자신이 일전에 열거한 버킷 리스트들을 다 완수해보자며, 이런저런 목표로 큰소리쳤다. 그러며 차에 탔다. 석현은 일을 놓쳐 불안했다. 오래간만의 휴식이기도 하고, 설령 놀아도 적게만 즐기면 된다는 마음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겨우내 탑승한 것이었다. 핸들을 쥔 그 사람은 경찰에게 쫓김당하고 있는 것마냥 급진적으로 속도를 올려 금새 상대방을 질리게 했다. 질주하는 차량 안에서 바람을 헤쳐가는 소음이 연신 들려왔다. 차량 하나 달리지 않는 한적한 도로라 할지언정 그보다 불안정해보일 수 없었다. 의문이 들었다. 석현은 고개를 돌리고선 혹 안들릴까 싶어 옅게 소리쳤다.

"뭐하시는 겁니까?"

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별안간 발뒤꿈치를 훅 떼었다. 소음과 함께 차량이 끼긱 멈추었다. 소음, 번개도...그리고 정적이 메웠다. 석현은 제일 먼저 일리안을 살피며 그의 상태를 의심할 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석현을 응시하다가, 일순 어린아이처럼 요란히 웃었다. 석현도 멍했다. 그는 굳은 입꼬리를 딱딱하게 굴리며 신발을 탓탓 부딪혔다. 다시 호스트바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을 갖추고 있었다.

"안정되지 않는 것이 좋아. 예컨대 이런 거."

핸들에 고개를 묻다시피 하며 그도 신발을 탓탓 부딪혔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석현은 고개를 그저 끄덕이며 저조차 고개를 묻었다. 너무도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너무도 갑자기 멍청한 행동을 하며 서로의 시선만 교환하고 있었다. 석현이 양 눈을 깜빡였다. 일리안이 생각했다. 이게 뭔 병신 같은 짓거리지. 서로 눈을 마주보다 잦게 웃고 잦게 피부를 맞대어 키스하는 공상에 앓는 것은 확실히 병신 같았다. 지독히 로맨틱한 것은 지독히 싫었다. 그말을 입밖으로 꺼내려 했으나 목에 열쇠가 걸려잠긴 듯 차마 꺼내져 나오지 않았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뻣뻣이 선 햇빛이 창가를 가르고 들어왔다. 그저 마냥 따듯한 등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로를 달려 사람이 많은 포도밭 주변으로 갔다. 그나마 좀 폐쇄적이지 않은 곳으로 향한 것에 석현은 안도했다. 그리고 밭 내부의 정경도 감상할 정도가 될만큼 싱그럽기도 했다. 탐스러운 포도들이 싱그러운 잎사귀 아래서 짜게 한들거렸다. 물기 찬 이슬 사이에서 한입 씹어물면 달큰하도록 상큼했다. 거기 짠 냄새가 났다. 밀려드는 소금기에 바다 거품같은 기분을 감득했다. 햇빛은 어딜 가거나 몰려오고 있었다. 석현은 지그시 양 눈을 찡그렸다.

"오늘 흰옷을 입고 왔습니다."

"그래서 뭐. 새옷 줄거야."

흰옷이 얼룩덜룩 물들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사람 세 명쯤 들어갈까 싶은 빈 오크통에 가득 포도가 담겼다. 그것이 그들 앞에 내밀어졌다. 포도 밟기였다. 둘 다 한번도 포도밟기는 해본 적이 없었다. 고향에서도 어디서도. 그들은 그것을 수행해야 했다. 탐스러운 포도는 탐스러운 양 발에 짓밟혀 시들어져 갔다. 그래도 보다 시큼한 포도주로 환복할 수 있었다. 석현과 일리안은 나란히 짧은 바지와 포도빛 상의로 갈아입고선 통 안에 떠밀리다시피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고 길었다. 그곳에서 계속 밟아야 하는 것이 이 여행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사람도 없는 포도밭 안의 통에서 일하기가 과연 그가 한번도 해본 적 없던 데이트란 단어의 정체인가. 석현은 멍했다. 그저 기계적인 행동을 반복하며, 햇빛이 쬐어오르는 그 지루함 속에서 막연히 상상으로 이사가기 전 자신의 방을 조립하는 놀이를 했다. 이사가기 전 석현네 가족이 머물렀던 방을 떠올렸다. 방 안에 탁자를 가만히 머릿속에 뛰우고 그것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좀이 슬은 자국도 있을 수 있고, 색연필이 어지러이 흩어져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무 무늬를 조심히 살펴야 했다. 분명히 뱀 여럿이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양의 마호가니와 비슷한 무늬였다.

"김석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일리안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서 포도를 주워먹고 있었다. 포도가 입새 아래 관능적인 알으로 톡 터졌다. 체액이 튀는 것과 같았다. 입을 맞추기를 은유로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탁자는 부시어졌다. 곧 그가 시선을 꼼꼼히 채워 스미고 있었다. 이상하기야. 석현에 생각에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업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연약하고 나약하다니 이상했다. 하기사 무언가 자폐적인 면모도 있어보였다. 확실히 그의 감정표현에선 유독 누락된 부분도 많았다. 석현이 줄곧 말이 없자 그 사람은 다시 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심심해?"

석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석현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입맞춤했다. 석현의 말캉한 혓속 아래 포도의 시큼한 뒷맛이 스며들어갔다. 혀가 더욱 부드러워져 먹을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일리안이 체액같은 포도즙이 묻은 선연하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끼끗했다. 석현이 굳은 낯으로 일리안을 몰아붙였다. 어찌나 몰아붙였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찐득한 포도더미 위에서 양 발을 헛디뎠다. 쾅 넘어지고 말았다. 통에 넘치도록 쌓인 과실들은 보호대 역할을 해주었다. 부산스러움이 가득 메웠다. 일리안이 또, 차에서처럼 익살스럽게 웃으며 석현의 볼에 다시 입맞춤했다. 석현도 아주 살짝만 웃음을 보였다. 허나 그것이 바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입맞춤은 빳빳이 날선 햇빛 한조각 속 솜털에 닿아 반짝 사위었다. 포도알이 성인 남성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차례로 투두둑 터져나갔다. 아이 한명이 욕심껏 한손에 탐욕스럽게 쥐어챙긴 것처럼 터져버렸다. 일하는 도중인데. 흘러나온 외마디 두엇은 석현의 잇새를 가볍게 두드리는 살덩이로 금새 없어졌다. 새빨갛게 단 맛이 났다. 얼핏 포도 맛이 났다. 녹색 알갱이가 열기에 사근사근 부서졌다. 일리안과의 입맞춤은 별미였다. 석현이 평생 입맞춤을 안 해보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일리안은 익숙한 맛이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살덩이로 교감하는지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더 맘에 들었다. 한아름 크기로 안아주고 싶을만치 가까워지고 있었다. 석현이 충족할만한 요소가 담뿍 담겨있는 남자였다. 허나 함부로 주려고 하지는 않고 있었다. 진심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최대한 그리 행동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와인은..."

입이 떼어졌다. 석현이 방금 키스를 했다곤 믿을 수 없을만큼의 건조한 눈길로 포도 알갱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든 와인이 더 풍부한 맛일 것 같지 않어? 어? 그런 거야. 야, 왜 웃어, 정말 그렇잖아."

석현이 햇빛 아래를 피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제대로 그날의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그랬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정도가 있었다. 분명히 정도란 것은 있었다. 입맞춤으로 와인을 빚는 것은 자제할 줄 알아야하는 그런 정도가 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말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굳게 존재하던 것은 어느새인가 급박히 속수무책 식으로 무너져내리고, 원하는 시간 속 원하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급조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와인 맛도 결국에는 풍부한지, 신지, 아님 입맞춤의 맛인지도 확인 못하게 되었다. 실컷 뒹굴어 시간이 없는 탓이었다. 옷은 푹 젖긴 했지만 어차피 감안하고 나눠준 것이라 괜찮다고도 했다.

두 남자가 포도밭을 빠져나갈 때가 되자, 마침내 노을이었다. 해가 황금빛 솜털 아래 더욱 선명한 빛깔로 찬란히발광했다. 솜털까지 서 있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오롯이 그만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단단해졌음을 느끼며 몸서리쳤다.

연결되고 싶었다. 모든 단어가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사물이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감정은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도 연관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었다. 그것들을 깨달은 날 아침 햇빛은 사무칠수록 강하고 굳세게 찔러왔다. 일리안은 물감 안에 있었다. 다 움츠려버린 화풍 속은 아직 미미해 적적했다. 작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고서 즐거워하는 재미였다. 석현은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그는 그런 것도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하고 또 일리안을 찾았다. 그 점심 동안 포도즙을 발라 온몸에 향기롭게 치장했던 것처럼, 물감을 몸 곳곳에 발라 키스를 다시 반복했다. 입맞춤이 아니라 키스일 뿐이었다. 물감이 얼굴에 묻었다. 얼굴과 정강이, 목덜미에 묻었다. 살색 페인트가 진하도록, 얼핏 얼씬얼씬 묻어나오도록 묻었다. 입을 너무 많이 맞춰서 입가가 헐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고 있어. 너도 지금 같아 따위의 소리들을 반복하니 절로 기분이 고조되었다. 속삭이는 소리에 귓전이 너무 간지러웠다. 금욕적이란 것들은 애초에 불가능하단 의미처럼 여겨졌다. 세상의 감정을 다 즐기고 후에는 제발 나 좀 슬프게 해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행복에 몸부림치고 싶었다. 너라면 그게 가능할 것 같아서 입을 맞춘 것이었다. 그렇게 속삭이는 쪽은 누구였을까. 아둔한 기억 속 어렴풋이 물감에 절인 다리가 목덜미를 감싸왔다. 체육으로 보기 좋게 아름다워진 양 다리가 느릿하게 목을 조였다. 이런 방식으로 교감하는 게 좋았다. 별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둘 사이에서 유연하게 일맥상통했다.

"나 말고 누구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

"왜 그래야 합니까?"

그가 대답없이 누군가를 사랑해주는 것처럼 웃었다. 그들은 다시 교감을 나누었다. 신체적인 것도 정신적인 교류도 몹시 충만한 상태였다. 석현의 정신도 일리안과 사랑에 빠진 것을 가장함에도 초연했다. 그런 정신으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이윽고 석현이 고개를 파묻어왔다. 물감을 푼 오색물이 손 하나 휘저으면 건들거리는 연기 모양으로 흐릿하게 피어올랐다. 그의 얼굴 아래 선 깔끔한 솜털보다 사랑스럽고 혀 두덩이보다 뜨거운 열기로 꽁꽁 무장한 물감이었다. 다시 키스가 반복됐다. 살내가 옅게 났다. 일리안의 모습은 셀 수 없이 수많은 덧칠들로 고스란히 담겼다. 사실 그런 것은 그 자신이 직접 그려야지 더 적합할 터였다.

"이런 게 네 모습이야, 석현아."

온 여름동안 만남은 이어졌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싱거웠다. 미지근한 열기 속에서, 건조한 바람과 유연하게 파고들어와 뻣뻣이 솜털을 간지럽히는 숨결 사이를 느꼈다. 열기구는 재미있고, 중국관은 지루했다. 영화는 시간이 없어 보지는 못했다.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지루할지라도 풍요로웠다. 페인트칠한 연인의 그림과 제철을 곧이곧이 날 포도주만 있다면 풍만하게 행복했다. 갖고 싶어지는 마음은 좀 더 깊숙해지고 선연해지고 있었다. 원색적인 야만이 그 어떤 감각보다 견딜 수 없도록 야만적이었다.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마음 같았으면 당장에 제 집에 눌러앉아 살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더 많은 걸 하고 하다못해 온몸에 잼까지 발라서 서로를 햝아주도록 하고 싶었다. 더불어 그들까지 부양하겠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현이 거절하리란 것이 빤했다. 우리 같이 살까. 그 적은 마디에 깊은 무게감이 있어 느리게 디디듯 거북이처럼 디뎌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그걸 그만둬. 메꿀 돈은 있었다. 그만둔다면야 사활을 걸고서라도 책임져 줄 수 있었다. 그는 금욕적이기 때문에 거절을 내놓은 것일까. 아니, 아니다. 석현이 그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금욕적인 간청을 내뱉었던 입은 간통을 꾀하고 있었다. 호스트바에서였다. 온몸을 억지로 다 벗기운 듯 불안하게 뜀박질하는 가슴과 함께 석현은 전혀 다른 곳을 질주하고 있었다. 질투심에 만취했던 것도, 못내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심술이 났던 것도, 한때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게 간통이야. 석현아."

늙은 단어에 석현은 잠시간 눈을 내리깔며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약한 미열이 일었다. 평소에 늘 그랬던 것을 못 하듯 평정심을 유지하기 버거웠다. 석현이 교제를 시작한 후에도 업소에서 일하는 것을 아니꼽게 본 것이었다. 사실 불안감은 일리안도 다름없었다. 둘 사이의 불안감은 점차 불편히 조성되는 조화처럼 더 빠른 속도로 간편하게 꽂아내렸다. 솔직히 이게 착각이라고 생각 안해. 목청을 돋우었다. 둘 다 비할 바가 없이 붉도록 까맣도록 아름답고 선연한 색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걸 감안하기로, 먼저 얘길 끝내지 않았냐고 석현이 공손하게 받아쳤다. 애시당초 그런 걸로 싸우는 것도 이해가 안가서 최대한 적은 시간 안에 끝내려고 했다. 교제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너는 완연하게 내 소유임을 인정하고 언제든 나나 너가 원하는 때에 서로 키스하고 사랑해주고 애무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서로를 무겁게 짓누르고 혀를 부비고 얼굴을 맞대고 깨물고 할퀴든 섹스하던 뭘 하든 서로 아예 먹어버리든 씹어삼키든 다 괜찮은 거야, 미쳤다고 말해도 좋지만 그런 것들은 내게 그렇게 무거운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지금까지 어떻게 그가 정상적인 척하며 살아왔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또, 너는 그때 내리로 그런 불편한 다른 관계는 끊어내리겠다고, 우리들 사이에 이물질이 되는 것은 내쳐버리겠다고 그렇게 다짐한 것과 마찬가지잖아, 석현아, 석현아, 석현아, 석현아, 석현아, 김석현, 내 말 들어, 내 말을 들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너가 좋다고 막 그러는 거 다 거짓말이잖아. 석현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양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여전히 형형히 빛났다. 그것은 캄캄한 적막 속에서 물끄러미 움직이는 형체로서 느껴졌다. 그는 결코 이런 것을 요량 삼아 따라붙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달콤한 단어가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존재 여부도 확실치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환희는 놀랄만큼 빨리 가셨다. 환상은 놀랄만큼 빨리 부시어졌다. 피로가 석현의 신경을 휘감았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왜 호스트바 일을 시작한 것인지를 반추하며 두 눈을 떴다. 상대를 공허한 시선으로 응시하였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반성을 일깨우도록 하는 석현만의 자조적인 불편함이었다. 일리안은 자신의 도박 전력과 현재는 쉬고있는 자신의 통장 잔고를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편함이 함축된 시선을 느꼈다. 석현의 경멸스럽다면 경멸스럽다고 할 수 있는 시선에, 그는 놀랄만큼 평온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가 나기 마련인 기억과 시선을 헤아리며 그는 평안감을 되찾았다. 처음부터 잘못인 것 같다고 감득했다. 그냥 돈이 끼이면 뭐든 자신의 인생에 한해선 엉망이 되어버렸다. 시간을 보내주는 대신 돈도 보내주겠다고 하지 않나. 일리안은 저의 돈으로 석현의 시간을 샀다는 암묵적인 사실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는 크고 성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쥐어잡았다. 석현은 그길로 피곤함을 느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애완동물을 조련하듯 일리안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남겼다. 군더더기 없이 담담했고 딱히 어르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새부리에 건네듯 옅은 입맞춤 뿐이었다. 일리안은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서, 가지고 있는 두 눈을 보기 좋도록 예쁘게 치켜떴다. 일순 석현이, 양눈에 저의 아버지가 구슬피 울던 모습을 연상하며 깊은 공허에 잠겼다.

''더 어린 사람은 나인데 이상하게 그가 나보다 더 어린 연인이 된 것 같다.''

잘잘못을 따질 겨를 없이 머릴 섞고 입을 섞었다. 다부지게 핏대가 선 손이 머리나 목덜미를 잡고 키스할 때면 눈부시게 광인이 되었다. 혀로 찌르고 깨물고 두드려도 상관않았다. 때로는 거기서 다리를 더 올리고, 팔을 더 깊숙이 감싸들었다. 석현과 일리안은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많은 시간에 적은 것들을 함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바닷물을 입에 머금고 허공에 뿜거나 스파게티를 나눠먹었고 경찰놀이를 했다. 그리고 석현은 자신이 그런 건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새삼 그는 석현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석현이 그 자신의 인생에 끼칠 것들에 대해 헤아려보았다. 왜냐면 일리안은 결코 그와 떨어지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일상적이고도 히스테리컬한 후회나 혼란으로 꾸며진 잡념들이 수없이 그들이 떠나간 바닷가 주변을 배회했다. 달은 모래에 스미어, 해는 바다에 스미어 접착성 있게 사라져갔다. 그 모든 초침들이 의미없이 지겹고 길었다. 조개껍데기같이 바스락거리는 시간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도 바뀌어 석현의 건강한 몸에 오래간만에 감기가 드나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은은한 미열이 볼과 이마를 감돌았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붉은 홍조같은 것들로 부드럽게 뒤덥혔다. 그는 아주 잠깐동안 작업을 쉬기로 결정했다. 막노동도 부족해 이어가던 것이 어느 사이엔가 그런 업소에도 불과한 것으로 변이되어 버렸다. 권태와 지루함이 그해 여름을 싱그럽게 메웠다.

왜 항상 우리는 이렇게 황폐하기만 할까. 석현은 잠시간 그런 생각에 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첫 동성애의 기억은 몹시도 메마르고 황폐했다. 거기다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것에 석현은 무의식적인 적의를 느꼈다. 그새 여자는 생강차와 죽을 든 종이가방을 쥐고서 그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 걱정에 마지못해 뗀 걸음이기도 하였지만, 크리스티나는 일리안의 행방에 미약하나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못내 부족했던 석현의 시간마저 그 사람이 죄 빼앗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신발을 벗고 펜션 가장 깊숙한 곳으로까지 침범해왔다. 크리스티나가 붕 뜬 눈으로 차분치 못하게 한번 물었다.

"일리안 그 사람은 왜 아직도 안가니?"

"모릅니다."

석현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그런 것에 대해 물러터지도록 무지했다. 그녀는 그냥 두 눈을 눈이 부신 듯 차차 깜빡이며 내뱉을 뿐이었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것은 현재 석현이 처해있는 상황을 뒤로한 일리안을 시사하기도 하고 있었다.

"..."

디바 가수의 우짖음만이 진득한 침묵을 켜켜이 가르고 있었다. 그 노래가 뭐가 그리 좋다구 말이야. 크리스티나는 먼지덮힌 테이블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도 들어 다 늘어졌겠어."

"..."

"그것 좀 바꿔라."

묵묵히 죽을 받아먹는 손길이 뜨거웠다. 입가에 묻힌 죽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피부는 점점 더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붉음이었다. 왕성한 식욕은 금새 죽그릇을 비워냈다. 크리스티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불덩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라면국물 온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맛있어요."

"어, 맛있긴 하지."

그녀가 생색냈다. 짭쪼름한 맛이 숟가락 안에 입혔다. 안개가 뒤섞인 찬 공기는 냉랭하게 뒷 속내를 부글부글 파고들었다. 석현은 모든 게 지겹다는 생각이 별안간 떠오른 것에 대해, 또다시 그런 생각 또한 지겹다고 느꼈다. 뒷맛이 붉은 혈색 아래서,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서로 지금 당장 서로의 형체가 없어질 것처럼 나누었던 애무, 사장당한 눈물들, 손짓 하나하나에 난도질이라도 난 마냥 배배 온몸을 비틀며 아아 쉬이 소리질렀던 그 기민함, 깨물고 햝고 잔뜩 맛봤던 살덩이의 미각, 두 혀, 조개가 풍만한 스파게티, 한창 게걸스러웠던 그들이 마주 보았던 서로의 조개같은 풍만한 웃음, 모든 입맞춤, 바닷물, 감기, 미열, 크리스티나, 와인, 첫경험, 마법같은 하루들, 그리고 모든 순간에 온전하게 있었던 그 사람마저도 목구멍 아래로 꿀꺽 삼켜지며, 그것들은 곧내 지겨워졌다. 나는 왜. 석현이 뜨겁게 갈라지는 파도와 태양을 응시하며 입속말했다. 왜? 그런 것들에 이유가 생기는 순간부터 지겨워진 것임에 불과했다. 처음 순간에 석현은 순수한 의도 아닌 돈의 의도로 시작했고, 아까 목구멍으로 우악스레 삼켜버린 것들이 차차 그의 곁에 생겨나게 되자, 일순 그렇게 되자 별안간 이유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그래버렸다. 지겨웠다. 햇볕도 짜증나도록 질긴 바람도 빠질 데 없이 지겨웠다. 그는 햇빛 한조각이 사위어있는 그녀에게로 고갤 돌렸다. 어스름한 창 때문에 잘 보여지지 않았다. 뭉친 속눈썹들이 맹렬히 석현을 독시했다. 이 순간만은 석현만을 담겠다는 양 치열했다. 그녀는 미약하게나마, 눈에 보일락말락한 정도만큼이나마 노력 중이었다. 그것은 황폐한 기억에서 방황하는 석현에겐 못내 오아시스와 가까운, 그보다도 더 기름진 무언가였다. 일순 눈길이 한곳에 마주쳤다. 그녀가 배죽 튀어나오듯 웃었다. 그러나 실제로 웃었는지는 햇빛이 너무 부셔 따로 가릴 수 없었다. 허나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다른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야만 했다.

"어머, 이런 모자 써도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

손이 어쭙잖은 분위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석현이 비스듬히 쓴 가리개를 좀 더 매만지며 고쳐 씌웠다. 이윽고 다시금 시선이 맞닿았다. 저 고르지 못한 불그스름함은 과연 홍조일까, 그저 햇빛 뿐일까. 그녀가 헤아리며 대놓고 이것 보라는 양 웃어보였다. 석현의 볼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싱거운 콧소리를 냈다. 그러고선 석현의 가리개를 짖궃게 푹 눌러씌웠다. 그는 다만 무언가를 쫓는 사람처럼 형형한 눈으로 가리개를 벗었다. 눈조차 낯빛처럼 꼭 불그스름하게 달아 있었다. 미열이 바람에 부셔져 조각조각 퍼졌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서 있는 해와 달처럼 길게 입을 벌려 허허로이 웃었다. 햇빛이 다시 파장하자, 이윽고 발코니 아래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일리안이었다. 그는 무언가 깊은 고심에 잠긴 듯한 낯으로 그들을 반겼다.

"와 있었어?"

크리스티나가 놀라 뒤돌았다. 그의 표정은 더 견고하게 굳었다. 마치 뭐하는 것이냐고 추궁하듯 보였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간 뭐 했어?" 그녀가 물었다.

"여우사냥." 시선은 석현만을 향해 있었다. 석현은 마지막 잔에 남겨진 찻물까지 털털 털어먹으며 느릿느릿 자리를 뜰 뿐이었다. 일리안은 굳이 그를 따라잡지 않으며 크리스티나에게 냉담히 말했다.

"너 여기 왔구나."

"응, 쟤가 아프다고 하길래. 넌 얘가 아픈데 어디 가 있었던 거니?"

"말했잖아."

"왜 거짓말해?"

여우는 사냥이 되지 않을뿐더러 설령 된다한들 그가 사냥 같은 것을 나갈 리도 없어서. 단지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크리스티나는 점차 찝찝해져가는 무언의 불안을 느끼며, 그에게로 도피하듯 도망쳐가 석현의 뒤를 따랐다. 발코니를 벗어나, 내부는 어두웠다. 커튼이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 집처럼 차르르 펼쳐져 있었다.

"참 예민한 사람이야."

둘은 펜션 가장 깊은 곳에 어린아이처럼 모였다. 그것은 법칙이었다. 흥분에는 유아적인 퇴행이 동반되기 마련이었다. 어느새 커튼 사이로 부들부들히 비집어오던 햇살이 멎었다. 숨소리가 새근 멎었다. 사위어 있는 허연 머리칼이 외부적인 힘으로 빗어내리듯 힘없이 흘러내렸다. 피부 아래로 바늘이 콕콕 신경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석현은 흥분해 있었다. 온몸을 덥힌 식은 땀방울들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정도는 미약했다. 탄탄하고 까무잡잡한 피부 아래 뭉친 이국적인 속눈썹이 부드럽게 석현을 담아냈다. 시작되었다. 그녀가 먼저 지그시 입술을 누르는 순간 억눌러야만 했다. 석현은 무언가를 억눌러야만 했다. 자신의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오려 했다. 그것이 격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반드시 눌러내리고 입맞춤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것은 사명심에 가까웠다. 그것은 미친듯이 날뛰었다. 점차 거세어졌다. 감각할 수 있었다. 서로의 팔이 둘러져 원을 그리다시피 하고, 살덩이는 더 깊숙히 침범하길 갈망했다. 왜 그러는지 저들도 깨닫지 못한 채 좀 더 끌어안았다. 목구멍이 날뛰어도 끝없이 이어나갔다. 흥분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처럼 진득하게 배어져나왔다. 아무려면 어쩔 것인지, 반드시 끝은 나야 했다.

"미쳤다고 말해..."

속삭이는 소리가 작았다. 큼지막한 손은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손이 수술 자국이 남은 석현의 딱딱한 배를 매만졌다.

"숨고 있어, 계속 숨고 있어. 이러는 걸 숨기고 있자."

누구보다 강하게 저항하고 있음과 동시에 누구보다 유하게 작은 몸뚱이를 오롯이 받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허덕였다. 내 동생도, 꼭 너처럼 이런 자국이 있었어. 간에 문제가 있어 수술을 했던 동생이 있어. 그녀는 언제까지나 일리안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역시 이 나라와 석현에겐 이방인이었다. 어느 날이고 삐끗 노선을 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지껏 부지해오던 위치를 버리고 고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왔다고 들었었다. 도망친 인생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부류야. 도망친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 자부하는 생각은 너무도 게으른 거라고 그랬어. 거짓말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러했다. 또한 그녀는 사랑했다. 남몰래 안았다. 작고 여린 솜털과 홍조가 풋풋한, 몸뚱이는 더없이 다부진 커다란 소년을 사랑함에 앓았다. 그녀의 동생도 꼭 그렇게 작았다. 어느 날이고, 죽어버린 동생에게 사랑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는 그것들을 그녀가 지껄여주길 기다렸다. 예찬을. 사랑의 예찬을 한번 더 지껄여주길 속삭이듯 비밀리로 기대했다.

내가, 내가 그 애를 죽여버렸어.

일리안은 눈길을 한 사위 햇빛처럼 낱낱이 훑어내리며 끓었다. 끓어내렸다. 해는 여전히 다 진 하늘 아래서 끓었고, 그조차도 조금의 정취를 감상하며 살살 끓었다. 일리안이 해를 혐오하는 사람의 집처럼 빈틈없이 채워진 커튼을 뚫어내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들어갈까. 그리고 화장실에 가 맨들맨들한 면도날을 멍하니 바라볼까. 그치만 마냥 멍하게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언젠간 그것도 찌르고 부숴야 될 산물이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럴 필요를 석현이 자꾸만 제공해주고 있었다. 석현이는 왜 자꾸 나가는 거야. 왜 나가는 거야.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거야.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리며, 그런 정신머리로 햇살이 끈끈한 창문에 머리를 턱 떼내었다. 석현이 극한의 애정적인 사람, 그렇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 석현은 많은 사랑을 흘리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가족에게, 크리스티나에게, 그냥 알고 지내는 형에게도 예의를 둔갑한 사랑을 헌신해주기 일쑤였다. 가족에게 보살핌과 돈을 친구에게 돈과 우정을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냐고 생각했다. 일단 알고 지내자면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일리안은 그래서 저같은 막무가내도 석현이 유연성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고 여겼다. 찡찡거리는 사랑을 지껄이는 얼간이에게 엄마같은 남자였다. 아님 아버지같이 집착의 대상이라든지.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그의 뇌리에 거쳐지면 전부 사실이었다. 다만 그는 그 자신을 예외로 하고, 사랑을 주는 남자가 싫었다. 일리안은 그를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주머니. 마구 퍼주고 다니며 이것저것 흘리는 주머니를 수선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고치려고도 시도해봤다. 하지만 석현은 정상인이었다. 수선할 필요가 없었다. 그도 석현보다는 외려 자신에게 수선이 필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어도 삼켰다. 수선이 필요없다면 부러 찢어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수거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그새 입술을 닦으며 바삐 횡단하던 석현이 눈에 띄었다. 고칠 사람. 납치해서라도 고쳐야 되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보통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그렇게 여겼을 뿐이었다.

"테이프 가져가."

일리안은 석현과 자신이 지난 여름 동안 질리도록 들어, 어느 사이 음조조차 낮게 늘어진 테이프를 건넸다. 감정을 통제하는 감정을 갖추려는, 그 무언의 호의와 함께였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다. 석현은 무덤덤한 낯으로 답했다.

"이걸 말입니까."

"더 이상 안 들어서. 바빠 보이네."

"예, 짐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서..."

석현의 입술은 예쁘게 헐어 있었다. 일리안은 그것에 극심한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을 직면하며, 입술에 빤하게 시선을 두었다.

"돈을 더 줄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제안을 이미 전에도 말했다는 말은 빼기로 했다. 돈이라니, 저 사람은 정말 한낱 실낱같은 관계를 돈으로라도 부지해나갈 셈인가 했다. 그의 뇌리가 툭 멈춰섰다. 이윽고 짐가방을 챙기는 손길이 멎었다. 불만 말고 우선 대책을 내놓는 게 자본적인 측면에서의 방법이 아니었던가. 석현은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입술만 벌린 채로 머뭇거렸다. 그러고선 제안했다.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으십니까?"

"응?"

"저희 업소에도 저말고 괜찮은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색한 침묵이 외마디 끝을 가르고 들어섰다. 그때부터였던지, 그의 눈자위에서 쉼없이 진득한 초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오늘 나 빼고서 무엇을 했나. 오늘 그녀와 굴을 까 먹었습니다.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그는 모르고 있지 않았다.

"석현아."

"..."

"날 조롱하는 거냐, 아니면 희롱하는 거냐?"

그가 손을 들었다. 석현의 머리가 재빠르게 쥐어 박혔다. 석현은 신음을 참으며 쥐어박혔다. 워낙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임에도 석현은 놀란 기색 없이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단지 머리가 쓰렸다. 그뿐이었다. 일리안의 입이 아이처럼 무구하게 벌렸다.

"넌 날 완전히 무시하고 있구나. 내가 싫어?"

"아닙니다."

또 이렇게 되었다.

"거짓말이야."

"아닙니다."

"네가 그 여자하고 그러는 꼴 다 봤어. 벌을 받아야겠어."

일리안은 흥분할 때마다 으레 내뱉는 모국어와 다른 언어 중간에 가로새긴 미지의 언어를 나직스레 내뱉으며, 종내에는 아이같은 손길로 그의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러고선 정말 아이같이, 벌을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석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유다같은 새끼라고 욕했으면서 좀전까지 바보같게두...그것이 그를 더욱 자폐적으로 보여지게끔 만들었다. 더없이 다정했다. 석현은 유아적인 공포에 시달리며 그의 팔을 홱 뿌리쳤다. 그래도 그는 낭만에 차올라 고양되어 보였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관절 저 사람은 미친 걸까, 아니면 흥분한 상태인 걸까.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가 다정한 손길을 뱀처럼 슬며시 건네었다. 내가 왜 유다니. 왜 그 애가 유다일까. 기어오른 의문감이 슬그머니 알알이 사이로 잠식하는 순간 두통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석현아. 그렇게 부르지 마. 휜자위에 박힌 구슬을 어찌할까. 너도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야. 그가 노여움으로 약간 띵한 머리를 감싸매고서 생각했다. 언젠가 나더러 그랬었잖냐? 그녀는 당신과 같은 이방인인데, 왜 그녀를 싫어하느냐고. 그 말에 나는 짐짓 순수같은 네 무지함을 탓하며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웃고 싶은 것을 억눌렀어. 이방인이라니, 이방인이 모두 같은 신세라고 한데 묶는 모국인의 텃세였을까. 거기다 싫어하느냐고. 아니, 차라리 그런 인간은 나무 아래의 백열전구처럼 빛이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마냥 꽁꽁 감싸매놓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고 여겼다. 이방인은 아니었고, 더군나다 그는 제 어머니가 그 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국에 깊은 고양감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나다 그가 석현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소유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바위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금새 고유한 자질을 깨지게 만들 수 있었다. 1마일밖에서도 그런 인간이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꽁꽁 묶어놔야겠다. 리본과 도박장 아래 휘장으로 트리처럼 호사스럽게 묶어놓으면 전부 끝일 것이었다. 그런 사람은 원래 그렇게 한 곳에만 집어두어야 했다. 그는 그즈음 마지막 계획에 접어들고 있었다. 석현과의 여행의 일환으로 마니에르로 가득 채운 욕조에서 피로를 풀며, 그를 납치할 계획을 설계하려 애썼다. 술은 그랑 마니에르가 아니면 싸구려 양주로도 변모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조금 절망했다. 고아원에 있던 때처럼 한없이 나약해진 정신머리였다. 하지만 확실한 다짐이 하나 세워졌었다. 이번주 내에 도박판을 벌여 만약 이기면 너를 가져가겠어. 정말이야.

석현은 콜라 한캔을 까 마시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처음 마셨던 술을 기억하는지, 캄파리, 위스키, 혹은 보드카였는지 아직도 기억하는지 질기게 물어봐도 그 답만은 해줄 수 없었다. 기억이 안 났다. 무엇보다 지겹기 때문이었다. 석현이 기억하는 그와의 모든 것들이 지겨웠다. 못내 떠올라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살겠다는 욕구를 적적히 담고 있는 것과 같았던, 평소의 왕성한 식욕은 꺼멓게 달아올랐다. 술 냄새가 인중 근처에 은은히 배였다. 석현은 엷은 구역질을 느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배설 같은 감각이었다. 종내에 그는 우욱, 우욱 하며 구토했다. 죽과 찻물이 먼저 게워져 나오고, 싱싱한 식욕으로 분에 넘치게 넣어먹었던 굴이 기름진 비린내로서 떨어져나왔다. 그것은 비릿한 굴내로 치환되었다. 해산물이라면 으레 우러져나오기 마련인 비릿한 향기를 느끼며 그는 입매를 닦았다. 입술이 선선하게 달아 있었다.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석현은 돌아오는 날 일리안의 차를 탔다. 그녀는 미리 먼저 가 있었고, 둘은 말이 없었다. 다만 주차장에 세워진 커다랗고 미끈한 차 안에서 석현은 자신의 몸을 제공할 뿐이었다. 황폐한 수렁과 자욱한 수렁이 그를 겹쳤다. 돌아온 내부는 고요했다. 세상이 잠들었다고 석현의 집마저 곤히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 서영이, 미영이의 코고는 소리, 혹은 잠자다 얼씬얼씬 코가 막히는 소리 등이 한데 섞여 들렸다. 석현은 바지를 내렸다. 스위치를 내린 어두운 단칸방 내부에서, 이윽고 석현의 몸은 어둠과 하나된 형체로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움과 가쁜 숨이 잔뜩 혼합된 한복판에서 석현은 또다시 가쁘고도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일리안과 처음 관계했던 그 때를 떠올리며 신음을 억누르고서 호흡했다. 그는 일리안을 생각했다. 또 크리스티나를 생각하며 그녀와의 첫 관계도 꼭 일리안과의 첫 관계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꼭 두 사람의 속내가 환하게 차오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두 사람이 섞인 것 같았다. 기실 석현도 자신이 일리안과 그녀 중 누구를 생각하며 호흡하는지 몰랐다. 확실히 아는 것은 그런 짓을 할때면 자신이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거나 혹은 한낱 밀가루 반죽처럼 느껴진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 날 버려요. 하지만 당신도 이랬던 적이 있으시지 않으신가요...구토와 과식, 반복된 루트가 끝난 휴식 이후 석현의 반복행위는 업소에 나가는 일상이었다. 석현은 베니스로 가자는 그의 제안에 전혀 다른 아귀의 단언조를 들이밀듯 내뱉었다.

"난 농약이 싫고, 사이다 병이 싫고, 나나 아버지처럼 나약한 사람들도 싫습니다."

그는 과도하게 익살스러운 자세로 나지막히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일리안은 부리나케 그를 불렀다. 그는 뭔가 미묘하게 뒤틀리도록 기뻐보이는 낯이었다. 붉은 향이 지펴오르는 한가운데를 걸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칩들과 도박할 때 세우는 행운인형을 여럿 가져오곤 도박장으로 석현을 데리고 갔다. 시끄러운 향기였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 귀를 메웠다.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쾅 치며 도박장을 클럽으로 만드는 이들이었다. 룰렛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캄파리 두어잔이 연신 붉은 광을 내며 한꺼번에 입으로 들어갔다. 일리안과 석현은 도박장 뒤에 조그맣게 자리한 방으로 들어섰다. 황금 붙박이와 화려한 병풍이 어지러이 세워진 곳에 전리품처럼 의자가 자리해 있었다. 일리안이 읽던 일어판 성경과 영어로 된 또 모를 책이 부산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뽐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석현은 그곳에 앉혀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섬세해 도통 납치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스 안대가 이마 위에 포근하게 안착했다. 일리안이 안대끈을 단단히 묶은 뒤 금실 밧줄로 몸을 단단히 포박했다. 몸에서 나는 굳은 술냄새까지 전부 포박시켰다. 석현은 자신의 몸을 포박할 때까지도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다. 익숙해져서 그러고 있겠다고 생각되면서도, 묵묵부답이 지독하게 이어지자 이내 그것이 약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일리안은 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예."

"내가 갑자기 안대까지 씌우고 묶기도 했는데. 아무리 힘이 세다해도 경계심이 너무 없어."

납치라는데 말이지, 아니 사실 괜찮았다. 그의 생각에 납치도 괜찮은 판타지였다. 또한 그가 얼마나 깊게 이뤄오고 바라왔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유서 깊었다. 가끔 아버지와 그의 한국인 어머니를 한데 묶어다놓고 24시간이고 줄곧 질문을 시켜놓기도 하고 싶었다. 납치는 사실 괜찮았다. 그런 욕구는 사랑에게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잔잔한 음성으로 답했다.

"이러시는 거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갑자기 일리안이 행하려 하는 특별한 플레이 요구도 많이 받아봤기 때문에 그런 돌발들은 익숙했다. 또 요즈음 그가 적잖이 마음이 상한 것 같기도 해, 그냥 맞춰주기로 했다. 지겨울지라도 괜스레 일리안이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싫었다. 그는 그저 딱 이번주까지만, 이번주 내에 업소의 다른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 주든지 해야겠다 싶었다. 홱 소리가 지펴올랐다.

"그래?"

잠자코 있으라는 신호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는 석현이 그를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부유했다. 눈이 시선을 맞추어 서서히 햝듯 금실 밧줄을 훑어내렸다. 시선은 느낄 수 있을만큼 노골적이었다.

"잠깐만 고개숙이고 내가 이길 때까지 기다려."

이긴다는 말을 당연스럽게 했다.

"예."

"그럼 같이 또 해보는 거야." 그리고 석현아. 사랑해, 우리에게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부연함이 예상치 못하게 진득 파고들었다. 그가 늘 그렇듯이 뜻모를 소리 두어 줄기를 내뱉었다. 귓바퀴에 낱낱이 파고들어오는 숨소리였다. 석현은 멍하니 숨죽였다. 부시럭대는 소리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시 도박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현은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미 사태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뜨려고 시도하지 않았지만, 무엇이 있는지는 체득하려고 시도했다. 온통 깜깜하고 밝아져있다는 것만이 식별되었다.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일순 석현의 등 뒤에 그가 모르는 사람들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이 석현의 의자를 끌었다. 그에게서 반항할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폭력을 이용해 기절을 시도했다. 어찌나 과묵하고도 고지식한 사람들이고, 또한 얼마나 양호한 실력이었던지, 그 과정에서 괴성 하나 함부로 들여서 나지 않았다. 일리안이 납치 목적으로 고용한 그들이 먼저 석현의 입막음을 한 탓이 더 컸을 터였다. 해보라고, 가능하면 해주고 싶었다. 이후로도 움직임이 점차 잦아질 때까지 고조된 폭행은 지속되었다. 일리안은 도박에서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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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맞고 있었다. 나는 그때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 때 즈음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웅크리고 있었다. 권투 장갑을 낀 것처럼 매맛이 잘 든 손바닥으로 무엇을 했는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들어오고 있었다. 소리 덕에 알 수 있었다. 약간 가쁜 숨이 내부에 차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심장이 아팠다. 내리꺼지는 것처럼 자꾸 자꾸 아팠다. 숨을 죽였다. 눈을 감았다. 입술을 잔뜩 깨물고 있었다. 피가 베어물렸다. 어머니가 본다면 혹여나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꾸중할지도 몰랐다. 이불을 걷어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힘을 많이 줘서 쉽게 걷어내어졌다. 눈은 여전히 고스란히 감고 있었다. 자는 척 하지 말고 일어나. 고조된 목소리였다. 눈을 조심히 뜨고 심장이 변함없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어룽대는 전등 사이로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아버지 고유의, 고조되고도 날선 음성을 들으면 목구멍에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꾸역꾸역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차오르면 코가 매웠다. 흰자위는 뻣뻣이 붉어졌다. 불빛이 스민 나뭇조각 같은 찌꺼기가 뒹굴었다. 그 날 무엇을 받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감각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방법이었다.

많은 얘기가 오고갈지라도 어느새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면 어머니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득 자각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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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29 | 조회 : 2,525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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