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중독 (4)

아 졸리다. 세상이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아마 내가 한수씨를...한수씨? 교수님? 교수님이 왜 여기 있지? 혼란스럽다. 교수님이 죽었다. 죽어 배를 드러내고 피를 질질 흘리며 흡사 번데기에 쌓인 매미나 복숭아처럼 죽었다. 제발 죽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이 사람은 반응이 없다. 어떡하지. 꿀꺽. 갈증이 일어난다. 허기가 일어난다. 솜털이 부스스 일어나며 배가 고파온다. 어떡하지. 또다시 침을 삼킨다. 내장이 훤히 드러나 있다. 내 손은 칼집이 난지 오래다. 피칠갑을 해놓은 주머니칼이 눈에 띈다. 피마자 오일 냄새가 부단히 풍겨온다. 아니 고작 이 작은, 과도만큼 작은 주머니칼, 이 쇳덩어리로 사람 한명을 죽였단 말인가? 배까지 찢어놓았단 말인가? 나는 칼을 두 손으로 꾹 부여 잡고 덜덜 떤다. 하염없는 슬픔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꼭 복숭아를 먹을 때처럼 교수님을 먹는다. 나는 이게 인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수 씨. 한수 씨이, 고마워요. 내게 몸을 내주어서. 나는 섹스보다 이게 더 좋아. 이게 더 나으니까. 나는 복숭아보다 당신의 몸이 더 좋아. 이게 더 맛있으니까. 이게 더 나의 몸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니까. 나는 이제 진짜 인간이 되었어요 교수님, 아니 한수 씨.









나는 죽어간다. 눈을 번뜩 뜨고 죽어간다.

"한수 씨 저는...인간을 먹으니까 인간이 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계속 복숭아만 먹었으니까."

''''잡혀가기 싫다. 이대로 영원히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즣겠다.''''

"아니 한수 씨.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나는 생쥐를 닮은 커다란 눈을 부릅뜬다.

제발! 그가 내 목을 조른다. 아닌데, 살아 있어야 하는데. 눈이 혼란스럽다. 동공이 여기로, 저기로 사방팔방 움직인다. 그가 목을 힘껏 쥔 손에 힘을 뺀다. 너, 힘들어 보여. 말이 차마 나오지 못한다. 복숭아. 그래, 그는 복숭아로 피어오르고 있다. 그 어느때보다 확실한 복숭아다. 그렇지만 이내 과즙을 잃어버린, 살의 한쪽이 수갈색의 번잡함으로 더러워진 복숭아가 될 것이다. 그는 순결을 잃었다. 나와 섹스함으로서 이전까지의 모든 순결을 잃었다.

죽지마. 죽지 마! 안돼, 죽지마! 그가 소리친다.

선과의 이중성. 선과의 복숭아. 복숭아만 날름날름 먹어치우던 선과는 나를 만남으로서 강렬한 질기를 얻었고 나를 만남으로서 복숭아 말고 고기를 먹었고 나를 만남으로서 아버지를 거역했고 나를 만남으로서 순수를 소각했고 나를 만남으로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남으로서 나를 먹었다.

그리고 복숭아로서의 자신을 탈피했다.

하지만. 그가 복숭아로 존재했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 너무도 확실했다. 그게 조금 슬펐다.













나는 도마 위에 복숭아를 올렸다. 그것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잇새에 복숭아 과즙을 머금었다.

"맛없어."

복숭아가 맛이 없다. 상했나? 딱딱한 복숭아인데도 사각사각한 식감이 덜하다. 살짝 기분 나쁜 맛도 나는 것 같고. 살짝 들어 모양새를 살펴본다. 상한 부분이 없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색도 없다. 색이 슬은 파리만이 끈덕지게 맴돌 뿐이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것을 더 자세히 본다. 눈이 찌푸려진다. 앗, 나는 순간 놀라서 뒤로 물러난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은 상성의 복숭아가 아닌 사람의 내장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장이다.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나는 내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한수 씨 냄새...

교수님의 창자다. 긴 것을 꽁꽁 뭉쳐놓았다. 나는 도마 위에 창자를 놓았다. 그것의 모양은 어떤지, 이음새를 살펴보다가 이내 부엌의 문을 열고 나간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린다.

"세상에."

이럴수가. 나는 얕은 신음을 뱉는다. 거실이 전부 피, 피로 가득하다. 벽지가 성수 세례라도 받은 것 마냥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집안이 붉다. 전부 한수 씨로 붉다. 테이블 위 피가 범벅으로 묻은 주머니칼이 올려져 있다. 테이블도 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유일하게 멀쩡한 것은 Tv와 편백나무 책장 뿐이다. 소파에 교수님이 올려져 있다. 온통 피를 집어넣은 남자의 배가 뻥 뚤려 있다. 바닥은 뇌쇄적인 핏물을 끄른 자국이 남겨져 더럽다. 한수 씨가 꿈틀거리며 바닥에 자국을 남긴 모양이었다. 나는 참상을 당한 한수 씨의 몸과는 대조적으로, 멀쩡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바라본다. 더러워. 나는 그의 눈에 손을 올린다. 엷은 눈꺼풀이 느껴진다. 그것마저도 피에 젖어있을까, 하여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눈꺼풀엔 혈액이 엉겨있지 않았다. 그의 눈을 감긴다. 잘가. 숨결이 완전히 끊겼다.

수돗물을 잔뜩 머금은 핑크색 걸레를 짠다. 물기가 조금씩 나올때가 되서야 그것을 타닥타닥 편다. 쭈글쭈글하다. 나는 걸레를 조심스레 바닥에 대본다. 바닥을 닦는다. 박박 닦는다. 한수 씨가 남긴 마지막 발악, 아니 흔적은 그렇게 사라진다.

내가 산 톱으로 그의 남은 몸 부위를 분리한 뒤 나머지는 잘 손질해서 보관해두었다. 나머지 먹을 수 없는 부위는 검은 봉지에 넣었다. 이제 냉장고는 그의 고기로 가득 차 있다. 아, 비린내가 난다. 비리고 누리끼리한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흡사 개 냄새와 닮은 그의 냄새가 집안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듯 하다.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연경 씨의 화장대로 간다. 향수로 추정되는 분홍 병을 꺼낸다. 그것을 치익치익치익치익 뿌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제 그의 냄새가 나지 않아.

냉장고에 또 뭐가 없나? 나는 냉장고를 열어본다. 제일 개방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포도를 꺼냈다. 색깔이 보랗다. 포도를 꺼낸 뒤 대충 씻어 그릇에 올렸다. 먹음직스러운 포도가 알알이 물기를 머금어 새초롬하다. 나는 하나를 톡 따 입에 넣는다. 달다. 달아. 아 그렇구나. 복숭아 말고 포도도 달구나. 한수 씨는 짭쪼름했는데. 세상엔 단 것도 있구나. 투두둑. 눈물이 볼 위를 타고 떨어진다. 나는 오열한다. 고작 포도를 먹은 것에 오열하며 소리친다. 한수 씨, 검은 봉지 안에 싸인 한수 씨, 보고 있어? 나는 드디어 사람이 되었어. 드디어 사람이 되었어.





연경은 무덤덤하다. 그녀는 눈을 몇번 신경질적으로 깜빡이다가, 그 사람 어딨어? 라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냉장고에요. 그녀는 냉장고를 한번 뒤져보라고 말한다. 나는 그대로 실행한다.

"그 안에 술 없어?"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몸에서 진한 술냄새가 난다. 입술에 바른 붉은빛 루주는 다 번지고 눈두덩이에 두껍게 칠한 색조 화장품도 다 번진 상태다.

뭐해? 그녀가 묻는다. 술이 없는데요. 술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술이 하나도 없다. 그녀는 짜증스레 눈살을 구기곤 명령한다.

"거기 창고 열어봐. 도화주 있을거야."

나는 창고 문을 연다. 유리병에 복숭아와 즙이 담겨져 있다. 즙이 아니지, 아 저것은, 알코올 맛 복숭아구나. 문득 토기가 올라온다. 나는 입을 막고는 그것을 훅 든다. 또 복숭아다. 그녀에게 건넨다. 컵에 따른다.

"잠깐 거까지...응 됐어."

그녀는 컵에 담긴 액체를 모조리 털어놓는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아. 내가 모르는 답이에요. 나는 소리지른다. 아아아아아.

"무책임해." "어쩔 수 없어요." "네 민낯이 이랬다니 충격이야." 보기싫어, 듣기싫어.

"고기 드릴까요? "내가 뜬금없이 권한다.

"맛은 어떤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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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4-04-02 23:53 | 조회 : 99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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