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검사의 소문 (1)

"하아.... 하아......"

기력을 다한듯 한 남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거친 숨소리는 넓은 평야를 타고 가늘게 퍼져나간다. 아니, 평야란 표현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 평야라 해도 손색 없을 만큼 넓은 대지, 녹빛 물감으로 색을 칠한듯 적당히 가라앉은 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품에 안듯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은 한마디로 숲의 공터, 라고 할 수 있었다.

흡사 초원을 연상케하는 공터의 중심, 마음의 한구석마저 트일 정도로 넓게 펼쳐진 그곳에는 단 두개의 실루엣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던듯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사람과, 그로부터 약간 거리를 둔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자. 더이상은 무리야."

그 중, 서있는 사람은 멀리서보아도 확연할 만큼 매끄러운 붉은빛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여인인듯 몸매는 굴곡이 나타나 있었고, 흘러내린 머리칼과 비슷한 붉은 블라우스와 먹빛 비슷한 검은 스키니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반복한채 쓰러져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고, 이내 그런 목소리에 답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쓰러져있는 사람은, 서있는 그녀와 다르게 정확히 어떻다, 라고 단정짓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단 얼굴은 검은 머리칼이 눈을 살며시 가린채 흩어진듯 보였으나, 상의의 목부분을 깊게 올려써 가늠을 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의상 또한 모두 검은빛으로, 전신을 뒤덮어 맨살이라고는 눈 주변 살짝 보여지는 얼굴이 전부였다. 다만, 여자와 다르게 굴곡이 없는 몸과 큰 키로 남자라 추측할 뿐이었다.

"봐주기 없다고는.... 내가 부탁한 거지만.... 정말.... 피도 눈물도 없구나......"

남자는 벌써 몇번째 마주한지 모를 푸른 하늘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고, 다시 숨이 차오르는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여인은 그의 말에 한걸음씩 천천히 내딛으며 말을 받았다.

"그야, 파트너의 부탁이니까."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파트너는 무슨......"

여인은 그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몇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기에 남자가 말을 받을 즈음 다다랐고, 이내 곁에 털썩 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 피를 나눈 사이인데.... 파트너 정도는 약과 아닌가?"

피를 나눈 사이.... 듣는 방식에 따라서는 오해의 여지를 불러올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틀림 없는 사실이다. 여전 몸을 가누지 못한채 쓰러져있는 남자는 그런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어이 없다는듯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하이얀 구름이 흘러가고, 가느다란 실바람이 불어오며, 낮게 가라앉은 풀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남자는 약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괜찮아진듯 몸을 서서히 일으켰고, 이내 조금 흐트러진 상의의 얼굴부분을 가다듬었다. 일어난다고 해도, 거친 숨을 내뱉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 상황이었기에 결국은 여인의 도움을 받고서야 제대로 앉을 수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너무 오래 쉬었어.... 이제 그만.... 다시 시작하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남자의 모습에, 여인은 말도 안된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무엇이 오래란 말인가? 휴식을 시작한지 이제 곧 5분이 되어갈 뿐이다. 정신의 피로는 커녕, 육체의 피로마저 쌓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항상 말하지만,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요소야."

여인이 말을 이었다.

"네가 부탁한 날, 분명히 말했지? 하는 건 상관 없지만, 휴식 만큼은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벌써 잊은 거야?"

여인은 일어서려는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제자리에 앉혔고, 남자는 완전히 숨을 가라앉힌 후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충분히 쉬었어.... 그럼 된 거잖아?"

"판단하는 건 나야."

여인의 말을 끝으로, 두사람은 그렇게 한동안을 마주보았다. 눈을 찌푸리거나, 째려보거나 하는 악감정이 서린 표정은 아니었으나, 두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시선을 마주친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오래지않아 막을 내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남자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한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시선을 옮겼고, 이내 푸르게 펼쳐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았어.... 들으면 되는 거잖아."

남자가 꼬리를 내리자, 여인은 그제서야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나타난 미소에, 깊은 한숨을 내쉰 남자는 이왕 이렇게 된 것 휴식을 취하기로 작정한듯 한차례 기지개를 피며 다시 드러누웠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상태는, 당연히 괜찮지 않다. 몸은 평소 이상으로 힘을 주어야 힘겹게 움직이고, 정신은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날아갈듯 울렁거린다. 기껏 5분을 뻗은 것 가지고 완치될 만큼, 상태는 그리 멀쩡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래도 할 수 밖에 없다. 천천히 즐기며 나아가기에는 너무 기나긴 시간을 돌아와버린 것이다. 그래봤자, 모두 자신의 고집에 불과한 일이지만......

남자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휴식에 몰두하려는듯 두 손을 머리 아래 받쳤고, 이내 두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무렵이었다.

"뭐야?"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돌연 두 눈을 떴다.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당연히 여인으로,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눈치챈 것인지 그는 얼마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일순 당황한 기색을 비추었으나, 이내 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어떻게 알았어?...."

"뭐.... 그런 종류의 기술이 있거든."

남자는 별 것 아니라는듯 덤덤히 말했다.

특성 < 은폐 >

그 능력은 적에게 관측되지 아니하고,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숨긴다. < 은폐 > 는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채 있을 경우, 자신의 기척을 완벽히 감추어 발견될 확률을 더욱 낮추어주는 효과를 가진다. 그때의 감각은 마치 허공에 떠오른듯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인데, 몸의 감각은 무엇 때문인지 두 경계의 사이를 이리저리 반복하는 것이다.

대략 그러한 이유로, 남자는 여인의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게서 답이 없자 남자는 다시 '무슨 일인데?' 하며 물었고, 여인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필사적인 거지?"

남자는 순간, 뭐가? 라고 물으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방금까지 보여준 자신의 행동이 눈에 선한데,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남자는 그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여인이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네가 죽어도 죽지 않는 이방인이라면, 지금이 어떻든 마지막에 이기는 건 너야. 굳이 지금 몸을 혹사시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일이라고."

여인은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륙인인 그녀로써는 아직 완전히 이방인의 존재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 하나 만큼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그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과, 한번 죽으면 그대로 끝인 것. 누가 보아도 승리는 확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 앞의 죽어도 죽지 않는 이방인이란 남자는......

"미안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이렇게 한마디하며 남은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대륙인과 비교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이방인 내부의 분쟁에서는?"

남자의 말에, 여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확실히 대륙인과 이방인, 이방인과 이방인의 전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너도 같은 상황 아닌가?"

"내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은 인간보다 강해. 수명도 훨씬 길지. 아마, 인간이란 종족은 절대 마족이란 종족을 이길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족의 내부에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잖아?"

확실히 그랬다. 우월한 것은 단지 종족의 차이일 뿐, 그 내부에서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실제로, 자신의 상황 역시 그렇지 않은가?

여인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면서까지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럼.... 만약 강해진다면, 넌......"

역시 이정도로 묻는 것은 실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듯 여인은 결국 말 끝을 흐렸으나, 남자는 한동안 살랑이는 바람에 몸을 맏기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난.... 단지 귀찮은 게 싫을 뿐이야."

여인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한마디만으로는 아직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느 세계든.... 기본 구성은 약육강식이지. 결국은 강한 존재가 설치고, 약한 존재가 당하는 세상인 거야......"

남자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곁에 앉아 있는 여인을 한번 바라본 후, 이내 시선을 먼 대지로 옮기며 한마디 내뱉었다.

"난 그저.... 그게 싫을 뿐이야......"

동시에, 씁쓸한 풀 내음을 머금은채 스쳐가는 바람이 한차례 불었고, 여인은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붙잡으며 그의 옆모습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그가 슬픈 기색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지, 여인은 자신의 눈동자에 맺힌 그의 모습이 어딘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멍하게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돌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시 한차례 상의의 얼굴부분을 가다듬으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이걸로.... 휴식은 충분하겠지?"

여인은 그의 말에 살짝 웃었다. 나름 진지한 대화 중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슷한 무렵 그녀의 표정이 일순 무감정하게 변했다. 동시에 넓은 대지에서는 무언가 이질적인 음성이 낮게 울려퍼졌고,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돌리면서 남자의 말에 나지막이 답했다.

"뭐, 충분하면 좋겠네."

그런 여인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듯 남자가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 벌써 리스폰 시간인가."

평야라 해도 손색 없을 만큼 넓은 대지, 녹빛 물감으로 색을 칠한듯 적당히 가라앉은 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품에 안듯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는 어느 사이엔가 수십의 몬스터로 둘러싸인 위험지대가 되어 있었다. 중요한 리스폰 시간마저 잊어버리다니, 휴식을 취해도 너무 빠진듯 했다.

남자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로 튕기듯 끌어올려 두 손에 각각 쥐었다. 내리쬐는 햇살에 반사되어 두개의 검날이 날카로운 예기를 뽐낸다.

어림잡아 보아도 50을 넘는 수, 빈자리를 채우듯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보자 시절부터 흔히 볼 수 있는 늑대형 몬스터였다. 하지만, 초보자 시절에 많이 보인다고 수준마저 비슷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설정을 그렇게 세웠을 뿐, 늑대형 몬스터 역시 다양한 레벨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눈 앞에 보이는 늑대는 40 레벨대의 몬스터로, 초보자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착각하며 강제 로그아웃을 당하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한마리를 공격하면 한마리를 상대해야 하는 저레벨 몬스터와 달리, 이때부터는 한마리를 공격하면 대여섯마리가 몰려들기 때문에 솔로 플레이가 힘든 몬스터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예정과는 다르지만.... 조금 이른 스킬 숙련이라고 할까."

두개의 검을 치켜세운 남자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 다크 사이트 > 를 시전했다. < 다크 사이트 > 는 본래 어둠속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스킬이지만, 약간의 시력강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사용횟수와 영향력에 따라 스킬 레벨이 오르는 리베르타에서는 쓰고 싶을 때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뭐, 생각없이 마구 써대다가 막상 필요할 때 마나가 없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이지만......

어찌되었건, < 다크 사이트 > 로 시력을 강화시킨 남자는 오른검을 땅에 꽂은 후, 이내 허리춤으로 팔을 가져갔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의 손은 돌연 모습을 감추었고, 어느 순간 뻗어진 팔을 따라 거무스름한 빛줄기가 진하게 그려지며 가장 가까운 늑대를 공격했다.

끼이잉, 하는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먹빛 단검에 찔린 늑대가 휘청거렸고, 처음 늑대를 비롯한 총 다섯마리의 늑대가 남자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안하지만.... 마나가 아니라 조금 아플 거다."

사납게 한번 울부짖은 후, 거침없이 달려드는 다섯마리의 늑대를 보며 얼굴의 절반을 가린 검은 옷의 남자 이브엔은 작게 중얼거렸고, 이내 한마디를 덧붙이며 두개의 검을 마치 하나로 겹치듯 잡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세버 슬라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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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9-28 00:24 | 조회 : 1,53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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