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초심으로 (4)

리베르타의 운영진은 조금 더 원활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게임 속 캐릭터를 두가지로 분류해놓았다.

그것이 바로 대륙인과 이방인이다.

흔히 말하는 NPC(Non - Player Character)가 대륙인, 플레이어(Player)가 이방인으로, 대륙인은 본래 대륙에 살던 존재라는 의미, 이방인은 현실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라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리베르타 전부터 사용했을 뿐더러, 부르기 편한 NPC라는 속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이브엔은 그런 점에서 약간 특이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게임이 세상에 나오기 전, NPC는 그저 저장된 몇가지 패턴으로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존재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퀘스트를 뺀 NPC는 그저 주변 풍경과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아무리 NPC가 세부적인 인공지능을 이용해 플레이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한 그들을 대하는 플레이어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대단한 것은 플레이어고, NPC는 언제가 되어도 그저 퀘스트를 건네는 인형에 불과한 것이다. NPC의 인공지능을 만든 것이 그 플레이어이기에, 어지보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지만....

허나, 이브엔은 달랐다. 그는 NPC를 현실세계의 인간과 같이, 아니 오히려 리베르타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듯 그들과 친분을 맺었고, 삶을 즐겼다. 실제로, 이브엔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는 플레이어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반면, NPC는 마을 단위로 열이 넘었다.

이브엔의 생각이 옳았던듯 빈은 여전 고개를 떨군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훗......"

새삼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은 꽤나 많이 있었다. 그들의 대화도, 그들의 강함도....

특히, 그들의 강함은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다. 직접 확인을 한지는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난 것 같지만, 그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거의 모든 게임 플레이어가 접속하는 리베르타에서 가장 레벨이 높았던 플레이어는 홀로 310 레벨대를 돌파했던 317의 이브엔이었다.

그런 플레이어들이 일주일만에 이브엔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춘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연이은 의미모를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흘려넘긴듯 했다.

지금껏 멱살을 잡힌채 가만히 있던 이브엔은 돌연 빈의 팔을 내려놓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을 하란 말이야...."

죽어도 무제한으로 살아날 수 있는 플레이어와 다르게, NPC, 대륙인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한 결정 따위로, 한 존재의 삶을 끝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브엔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채 허리춤에 매달린 조그마한 주머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이내 붉은 병 4개와 푸른 6개를 꺼내었다. 얼마 전 먹은 것보다 색이 진한 것이, 한층 더 좋은 포션인듯 했다.

"마셔.... 사람 안 가리는 기특한 포션이니까......"

이브엔은 이렇게 말하며 포션을 건넸고, 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었다.

하지만, 포션은 끝내 전달되지 못했다. 빈이 이브엔을 향해 팔을 뻗는 그 순간보다 한걸음 앞서, 움직임이 멎을 정도의 음산한 기운이 두사람을 덮쳐왔기에....

"허튼 짓을......"

그 작은 한마디와 동시에, 이브엔의 오른팔이 무언가와 충돌한듯 높이 솟구쳐올랐다. 손에 들고 있던 포션은 물론, 반발력에 의해 이브엔은 한두걸음 뒤로 밀려났고, 빈 역시 돌연 눈앞에 나타난 검은 마력에 한두걸음 물러섰다. 아직 공격 채비를 마치지 못한채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두사람은 그렇게 각자 혀를 차며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허나, 공격의 주도권은 이미 사내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사내는 빈을 뒤로한채 오직 이브엔만을 쫓았고, 이내 검은 마력을 다시 한번 방출시켰다. 손에서부터 폭사하듯 뿜어져나온 그것은, 마치 거대한 기둥을 만들듯 뻗어나간다.

그러는 사이, 이브엔은 두개의 검을 완전히 뽑아들었다. 하지만 사내의 손을 주위로 압축하듯 모여드는 검은 기운에 불길함을 느낀 것인지, 이브엔은 곧 옆으로 몸을 굴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공간을 가르며, 정면을 가르며 검은 마력이 쏘아진다. 압축과 방출의 시간차가 거의 없어 상대로써는 당하기 십상인 공격이지만, 미리 위험을 감지한 덕분에 이브엔은 종이 한장 차이로 발끝을 스치며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써 회피한 이브엔을 맞이한 것은, 어느 사이엔가 눈 앞으로 다가온 사내였다.

"반응은 쓸만해도, 마무리가 어설프군."

순식간에 이브엔의 앞을 파고든 사내는 이런 한마디를 남겼고,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린 이브엔을 향하여 이내 검을 휘둘렀다.

허나, 말은 이렇게 해도 사내는 이브엔의 반응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실 마력을 비롯해 기운을 응축해 발사하는 기술은 어떤 것이 그렇듯 시전시간이 긴 편이었다. 그렇기에 응축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피해도 늦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러한 공격들과 다르게, 사내의 압축공격은 응축과 발사의 시간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압축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무렵은, 이미 벽에 무참히 쳐박혀있을 터였다.

그러한 변칙 공격을, 눈 앞의 검은 남자는 단순히 감만으로 피한 것이다. 단순한 감이라고 해도, 그것을 따라줄 반응속도나 반사신경이 없다면 시작도 안될 이야기지만 말이다.

사내는 사선으로 휘두른 검을 재차 치켜들며 다시 한차례 검을 내리그었다.

"그깟 공격.... 네놈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지만, 그 말과 다르게 사내의 검이 향한 곳은 이브엔쪽이 아니었다. 이브엔을 기준으로 몸을 반쯤 돌린 정반대의 방향, 어느 사이엔가 뒤를 향한 사내는 눈 앞의 또 다른 적을 눈에 담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그 한마디와 함께, 높이 솟아오른 검에서는 거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와 앞으로 쏘아진다. 마치 이브엔의 < 세버 슬라이시스 > 와 비슷한 초승달 형태로, 공간을 잡아먹을듯한 크기의 그것은 공간의 바닥과 천장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며 빠르게 날아간다.

이윽고 벌써 몇차례인지 모를 거대한 충격이 공간을 뒤흔들며 지금까지 중, 가장 짙은 흙먼지가 일대를 감싸안았다. 공격을 한 사내는 물론이고, 공격을 당한 빈과 이브엔 역시 흙먼지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 누군가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피를 한움큼 토했다. 피를 토하지 않더라도 내상이 심한듯 거친 기침을 연차례 내뱉었고, 괴로움에 찌든 목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빈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바닥을 이리저리 구른듯 통증은 온몸 가득했고, 머리 역시 깨질듯 아파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피를 토한 감각은 없었다.

처음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오며 피를 토하는 소리가 뒤를 따를 때, 빈은 그것이 자신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흐릿한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쩐지 익숙한듯도 한 거친 숨소리, 빈은 한사람 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그 이름은......

"이브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어 소리를 따라 이동한 빈은 곧 짙은 흙먼지속에서 홀로 쓰러져있는 이브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지 입가에는 피가 가득 고여있었다.

빈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이브엔의 상체를 일으켜주고는, 입가에 고여있는 피를 닦아주었다. 이브엔은 여전 거친 기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뭐하는 거야.... 왜 그 공격을 나 대신 맞는 거냐고!...."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브엔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허나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 실제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는 넌.... 왜 갑자기 뒤에서 뛰어드는 건데......"

"그야......"

네가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라는 말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브엔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빈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막 다음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브엔은 거친 기침과 함께 다시 한차례 피를 토했고, 빈은 그런 이브엔을 말렸다.

"더이상 말하지마!.... 이대로는 정말...."

이브엔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절대로 죽게 하지 않겠어......"

빈은 그런 이브엔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그에게,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살짝 웃어보인 빈은 이브엔에게 말했다.

"절대로 죽게 하지 않겠다니.... 정말 그럴수 있겠어?"

"뭐.... 지금은 무리겠지......"

이브엔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대꾸했고, 빈은 그런 이브엔의 말에 살짝 미소지었다.

"그럼 거짓말이잖아.... 뭘 그리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방법 좀 생각해봐...."

이브엔은 여전 고통이 가시지 않는듯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

빈은 그런 이브엔의 말에 다시 한차례 웃었다. 정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빈은 이브엔을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한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쉽게 죽을 생각 따위는 없다. 이브엔의 말대로 어찌 되었든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마계의 게이트를 통과해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짙은 흙먼지 때문인지 사내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지금 당장 사내가 자신들의 위치를 찾는 것이었고, 최선의 상황은 지금 당장 해결책을 생각해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뭐, 지금으로써는 흙먼지가 가시기 전까지 해결책을 찾는 것도 힘들어 보이지만....

생각이 길어질수록, 빈의 시선은 점차 내려갔다. 그런 시야에 피범벅이 된 이브엔의 자켓과, 좀 더 아래 그 피로 물든 자신의 오른손이 들어온다.

피.... 손.... 다시 피.... 다시 손....

그리고......

그때, 빈이 눈빛을 빛내며 이브엔을 바라보았다.

"있어...."

"뭐?...."

이브엔이 힘겹게 물었고, 빈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있어. 한가지 방법이...."

빈은 이브엔의 기침으로 역류한 피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고, 재빨리 검을 들어 자신의 팔로 가져갔다. 하지만, 이내 다른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문득 팔로 가져가던 검을 멈추었다.

"그런데.... 만약 잘못된다면 네가 죽어. 뭐, 네가 죽는다면 나도 결국 죽게 되겠지만...."

빈은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로 이브엔을 바라보았고, 이브엔 역시 그런 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상관 없어....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브엔은 다시 한차례 피를 토한 후,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는 이상은.... 성공해.... 거짓말은.... 취미가 아니니까...."

빈은 이브엔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내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방금 전 팔로 가져갔던 검을 그대로 움직여 깊게 베어내고는 한움큼 쏟아지는 피를 주위로 흩뿌렸다.

동시에, 검을 내려놓은 빈이 두 눈을 감은채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리베르타의 새로운 언어인지, 어떠한 주문 비슷한 것인지 이브엔으로써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빈은 그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순간, 빈은 돌연 눈을 떴다.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역류한 이브엔의 피와, 칼로 베어내 쏟아진 빈의 피가 조금씩이지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피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빨라졌고, 빈이 다시 무언가를 중얼거릴 무렵, 그것은 이내 커다란 원의 모형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원, 알 수 없는 문양, 다시 원, 알 수 없는 문자, 다시 원을 반복하며 끝없는 진을 만들어갔다. 이윽고 완성된 진은 마치 표기 마법의 일종인 마법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성된 진은 피의 무늬를 따라 전체적으로 투명하지만, 어딘가 짙기도 한 붉은빛을 찬란하게 뽐고 있었다.

빈은 그제서야 중얼거림을 멈추며 이브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는 더이상 망설임 없는 곧은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빈의 입이 움직였다.

죽음의 인도를 갈망하는 어리석은 자여....

어둠의 권위를 갈구하는 미욱한 혼이여....

나 위대한 시니스테르의 자손,

이브의 숨결을 그대와 공유할 지어니....

그대의 육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루스페리아와 함께 하리라....

"조금 아프겠지만.... 그 정도는 참아봐."

작게 중얼거린 빈은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고, 이내 칼로 베었던 오른팔을 움직여 이브엔의 가슴을 찔렀다. 가운데 부근의 약간 왼쪽 아래, 정확히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였다.

이브엔은 심장을 찔림과 동시에, 순간 몸이 크게 한번 진동하는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듯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고, 단지 한차례의 고동만이 이브엔의 몸 안을 요동치듯 맴돌았다.

눈 앞은 보이지 않고, 숨은 쉬어지지 않으며,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브엔의 정신은, 그렇게 서서히 어둠에 잠겨갔다.

몇차례의 알림을 마지막으로......

[종족 - < 마족 > 이 오픈 되었습니다.]

[종족이 < 인간 > 에서 < 마족 > 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칭호 - < 마족의 선구자 > 를 얻었습니다.]

[신규 퀘스트가 생성 되었습니다.]

[신규 스킬이 생성 되었습니다.]

[모든 스킬이 초기화 되었습니다.]

[모든 스텟이 초기화 되었습니다.]

[직업이 < 은(隱)검사 > 에서 < 마(魔)검사 > 로 변경 되었습니다.]

[< SP - 마력 > 이 생성 되었습니다.]

[1 레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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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1-18 11:19 | 조회 : 1,816 목록
작가의 말
nic9080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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