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6)

지겨울 정도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옷을 풀고 우리 집을 어지럽혔다. 이불 한겹을 뒤엎은 채로 도망갈까 싶었지만, 차라리 연기에 뒤덮인 집안이 낫다는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가쁜 숨은 계속해서 어슴푸레한 밤공기를 덮어나갔다. 이윽고 그들은 바지를 걷었다. 맥을 추리지 못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담배 연기는 흐릿했고, 매캐했고, 나는 10명 정도의 남자들이 따로 따로 내 뒷구멍을 돌려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허나 눈을 떠본 순간, 나는 어지럽혀진 집에 홀로 남아 있었다. 소파에 다리를 올린 채 바닥에 머리를 놓고서 거꾸로 시선을 TV에 주었다. 비틀거려 가누기 영 버거운 몸으로 정액과 콘돔이 가득한 집안을 치우고서, 음식물 찌꺼기가 눌어붙은 냄비를 닦았다. 피멍이 덮인 상흔 주위는 붕대로 칭칭 감았다. 그럼에도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다리와 엉덩이가 아픈 것만 빼면 그것도 별다르게 상관할 바는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나지막이 들어가 목구멍에 손가락을 조금 집어넣었다. 목구멍에서 뭔가가 쉼없이 올라왔다. 손가락에 늘어져 있는 것은 정액이었다. 그것은 나의 목구멍에 들러붙어 산재해 있던 것이었다. 그대로 사레가 섞인 기침을 몇 번 하고, 그 후로는 너무 기운이 없어 선선한 바람을 즐기며 그저 늘어져 있었다. 나는 내일을 한 채 남겨졌다. 패거리는 혼자 갔다 혼자 오는 사람들처럼 떠나갔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던힐, 피아니시모, 블랙 멘솔, 그런데 그런 것은 차치하기로 했다. 우선은 바깥에 비가 왔다.

비가 오면 누가 오는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강간 왕국의 현실이었다. 쓰레기통에 남겨진 콘돔 껍데기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액의 감각도, 찝찝한 뒷맛도 놀랍도록 빠르게 산화되었다. 연기는 옷장 속의 탈취제로 없어졌고, 집안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배의 통증도 점차 산화되어 사라졌다. 나른한 기분에 사로잡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몽롱했다. 히트사이클도 끝이 나서 딱히 억제제 같은 것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밤공기 수북한 날이 노상 그렇듯 자연적인 잠에 빠져들 때 즈음, 나는 그제야 무언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매우 갑작스럽게 바닥을 굴러 탁자 아래 칸을 뒤졌다. 메세지를 보낼 참이었다.

유즈루

혹시 비가 온다고 또 다리 주변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그랬더니 금세 답이 떴다.

지랄하지마

"지랄..."

내가 점차로 고개를 까딱까딱 수그리다가 아예 노트북을 저편으로 치웠다. 오늘 운수가 안 좋은 것인지 유달리 내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본의 아니게 요오쇼오키한테 특히 많이 들었던 진득한 그것이었다. 강간, 강간. 바로 그 강간 때문에. 두 눈이 뜨이며 머리는 슬그머니 깨어났다. 요오쇼오키가 내 동영상을 올린다는 것은 어찌 됐을까. 비척거렸다. 그는 빠르게 나와 숨 쉬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대로 요오쇼오키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녹음본은?

무슨 녹음본?

섹스

녹음본은 차치하고 사진은 이미 퍼뜨렸는데. 그나저나 주인님이라고 안 부르네? 내 아내 되는 건 포기했어?

나는 잠깐 멈칫하다 그대로 타자를 두드렸다.

우선 나한테 녹음본을 줘

왜? 네꺼 보면서 자위하게?

어 그럴거야

자위는 왜 해? 우리랑 섹스하면 되는데

너나 너희 무리들 없을때도 해소할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것을 생각해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불안했지만 몇 분 후 대답은 전송되어 왔다.

hhkdzwwwuifjf.mp4 이상한 짓 하지마라

요오쇼오키도 내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넘겨준 것 같았다. 그의 눈에도 내가 좀 곤궁하게 보여 그런 것인지. 나는 그것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다. 무언가 선제공격을 하기까지 그렇게 기다리며...나는 한숨을 뱉은 후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나도 내가 놀랄 정도로 태연한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가만가만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으슥한 밤인지라 온 사방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멀리 흐릿한 차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비가 누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눈물 자국처럼 계속 창문 바깥에서 흘렀다. 어룽어룽한 시선이 창문과 닿아왔다. 나는 불도 켜놓지 않고 그것을 꿈뻑꿈뻑 지켜보고만 있었다. 속눈썹이 초연히 깜빡였다. 마리아와 엄마가 돌아온 것이었다.

"아니, 쇼야! 불도 안 켜놓고 뭐하고 있었니?"

"이야!"

마리아가 내게 다가왔다. 내 몸에는 아무 변동이 없었다. 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림자는 멎고 있었다. 그 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겁했다.

"피...피..."

어머니가 입가에 손을 올려놓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짐과 핸드백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 다급히 나의 안색을 살폈다. 아마 피는 아직 닦지 못했나 보았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어머! 붕대랑 피는 뭐니? 응, 쇼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담배 냄새는 또 뭐람?"

"..."

어머니가 걱정스런 손길로 내 뺨을 쓸었다. 침묵은 좋은 답이 되지 못했다. 뭐라도 끄집어내어야 하는 게 맞았다. 나는 허망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윽고 무언가를 드디어 알은 것처럼 주억주억 입을 떼낼 뿐이었다. 목구멍이 건조했다.

"보고 싶었어요."

-

학교는 조퇴를 하고 경찰서에 갔다. 그 전 어머니는 돈을 들여 억제제를 사들였다. 피곤했다. 어제도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어제는 밤에 급하게 병원에 가 치료를 받고 약간 파열된 항문을 치료했다. 정액도 아예 다 빼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그간 당해온 것에 의한 상흔들이 적잖이 충격적인 듯 보였다. 짧은 치료 동안 계속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케물었다. 치료 후에도 후유증이 조금 남아 걷는데는 어머니가 부축해 주어야 했다. 이윽고 우리는 그곳으로 훌쩍 떠나갔다. 나는 조사를 맡은 경찰관에겐 모든 이야기를 단숨에 설명했고, 그것을 이어나가며 몇번씩 내 얼굴은 불에 데인마냥 아프게 달아올랐다.

"폭력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절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하고, 뺨을 때리고, 하교 후 방 안에서 성행위와 결합된 폭행을, 그러니까 억지로..."

나는 거기서 조금 멈칫했으나 볼을 혀로 공굴려대며 그런 대로 이어나갔다.

"억지로 뭐요?"

"섹스하려고 했습니다."

"반항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나는 억지로 제압하려 하길래 가해자를 때렸고, 할퀴었고, 또, 그 무리들이 나를 화장실에 데려가 씻겼고, 씻기는 와중에 성기를 빨게 했고, 그리고 다 씻고 난 다음엔 그들끼리 모여 나를 윤간하고 자위기구로 괴롭혔단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자기 의사 있었어요?"

경찰관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되물었다. 그의, 어쩌면 어떠한 사람의 콧바람이 멍하니 귓전을 스며갔다.

"반항할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나는 겨운 음성으로 아니라고만 짤막히 답했다. 그가 킁킁대는 것을 보아하니 오메가 냄새를 맡은 듯 싶었다. 아직까지 오메가는 성욕에 발정났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발언들이 내게 불리하게 작용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첫눈에 날 판단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노트북을 가져다대었다. 시선이 아래쪽으로 쏠렸다. 그는 묵직해보이는 그것을 턱 내밀었다. 내 쪽이었다. 클릭하자 내 신음소리가 좁은 내실 안에 울려퍼졌다. 드높은 목소리였고, 목소리라기보단 소음 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것에는 흥분이 미약하게나마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게 불쾌했기에 빨리 그것을 꺼냈다. 그리곤 자위기구로 쾌락을 수반한 일종의 성고문 같은 고통을 주어 그렇게 말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

"앞뒤 상황 없이 그 특정한 부분만 녹음된 것이므로요."

그의 눈썹은 팔자 모양으로 찌푸려졌다.

"지금 가해자 쪽은 동의 하에 이뤄진 성관계고, 외려 당신 쪽이 성행위를 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이건 그 주장에 아주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어요. 이시다 군은 다른 증거물이 있나요?"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누가 때린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처 뿐이었다. 정액에선 검출이 불가하다고 할 정도로 정자 수가 전무했다. 윤간과 강간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없습니다."

"cctv를 보니 하교한 후에 서로 같이 집으로 갔더군요. 왜 반항하지 않은 건가요?"

"협박 때문에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도 그렇습니까?"

"그 이유도 같습니다."

3시쯤엔 가해자 부모들이 찾아와 내 주변에서 많은 발언을 남겼다. 조사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 그들은 무언지 모를 소리를 계속 이야기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귓전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눅눅하게 잠겨들었다. 변형된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이 내 어깨를 잡자 그제서야 멍한 정신을 깨워낼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부단히 말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친 후, 그녀는 완연한 모성으로 내 어깨를 꾹 쥐었다.

"네가 우리 애 꼬셔서 그런 거잖아. 이거 완전 모함이에요 여러분들. 저 애들이 그냥 놀러간 것 가지고 합의금 뜯어내려고 제비짓 하는 거라는 생각 안 드세요?"

나는 그녀로 인해 흔들리는 내 머리칼 속에서 어렴풋이 요오쇼오키를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부모들의 드높은 음성들 속에서 여러 단어가 귀에 들리지 않은 채 그냥 섞여 지나갔다.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그들 주변을 밀고 나섰다.

"아니, 애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으면 이렇게 문란해? 됐고, 합의서에 지장 찍어요."

"가정교육은 그쪽이 더 미흡하신 것 같은데요. 억제제 뺏고, 망신주고, 지속적으로 강간하고, 폭행한다는 게 가정교육 제대로 받은 남학생의 머리에서 나올 행동입니까? 지장 안 찍습니다. 곧 죽어도 안 찍어요. 싹 다 잡아서 기소할 테니 보석 같은 것 쓸 생각 하지도 마세요."

어머니가 점차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경찰이 난처한 기색으로 나서, 한 치의 물러섦도 없는 여인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진정하세요들. 쇼야, 합의서는 네가 살펴보고 온전히 네 의사로 작성하는 거니까..."

"흥...오메가년 주제에 그 핏줄이 어디가겠어? 내가 우리 아이가 갖고있는 녹음본을 봤는데, 지가 먼저 좋아한 거여서 변태같은 성행위를 우리 아들한테 요구한 거구만. 그리고 진짜 어휴 변태 같아가지고는 원..."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목소리가 담긴 그걸 어머님 앞에서도 요오쇼오키는 보라며 종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쇼야, 저기로 가자."

어머니는 나를 이끌어 가해자 부모들이 없는 곳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약간의 말소리가 일렁거릴 뿐이었다. 무슨 영문으로 조용한 그곳에서 어머니는 날 몇 분간 마주보더니 중얼거렸다.

"쇼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작은 경찰서에 수많은 인파가 계속해 몰려들고 있었다. 구름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까, 말까 잠시간 고민했다. 면구스럽게도 그러했다. 이 상황에서 나보다 힘들어할 사람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흘끗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염색 덜 된 머리칼은 여전히 그 전과 똑같이 부드럽게 보였다. 엄청나게 부드러웠다. 만지면 훅 꺼져버리고야 마는 고운 머릿결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아냐. 아니에요."

"내가 면목이 없어. 더 많이 신경 써줬어야 했어. 더 많이...더 많이...저번에 집에 그 놈이 놀러왔을 때도, 정말 꿈에도 몰랐어."

"..."

"경찰에게는 언론노출하고 신분노출, 정신적 피해는 절대 행하면 안된다고 말해놨으니까 마음 놓고 증론해도 돼."

4시가 되자 패거리와 몰려다니던, 교제하던 여자친구로 보이는 애들이 여기로 왔다. 패거리들이 사귀는 아이들은 많았다.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보며 이따금씩 방귀가 새어나오듯 피식피식 웃다가 후에는 저 애가 좋아서 섹스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곳에게로 시선을 떼지 않고 진득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었다. 지금까지 날 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경찰서 주변에 온 후 무언가를 몇 시간이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여즉 증언 중인지라 불가능했다. 허나 나는 잠시간이나마 서 바깥 풍경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억제제 갈취, 성고문, 성폭행, 학교폭력을 저에게 자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알렸어?"

"성폭행 장면을 찍어서 인터넷에 유포한다고 해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녹음본 보니까 아니던데..."

뭐라는 것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웅얼거림은 사라졌다. 내가 짧게 되묻자 경찰관은 내 허벅지를 훑어보다가 피식 웃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증언을 끝냈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서 가고 싶었다. 해는 끝내 져버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진 것만 같았다. 눈을 조금 더 높여 보자, 서 밖은 사건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로 북새통이 되어 있었다.

"쟤 걔 아냐? 장애인 이지메 가해자."

"맞네. 그 애네."

"양아치같이 생긴 게."

"오메가라더니...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일순 내가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것이 몰려왔다. 그때도 꼭 그랬었다. 사람들이 쭉 모여서 내 기록 같은 것들을 말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듯 보여졌다.

"인과응보란 말이 실현되긴 하네."

가해자 부모는 그 얘기를 듣고 길길이 날뛰며 날 쏘아보았다. 수군거림이 서 전체에 거세게 엄습했다. 부모들의 눈이 다시 소스라친 듯 확장되었다.

"어머, 맞네! 이시다 쇼야, 그 남학생이잖아! 그간 얼굴이 더 자라서 못 알아봤네. 아니, 그런 전과기록이 있는 사람을 함부로 신뢰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녜요?"

"이거 완전 상습범이었네."

"쟤가 그럼 한 5년전쯤에 청각장애인 여자애 억제제하고 보청기 뺏고 폭행하던 그 애에요?"

"예에, 아주 나쁜 자식입죠."

"뭐 그럼 누가 진짜로 잘못한지는 그간 행적에 따라 판단도 가능할 것 같은데...우리 아이들은 그동안 물의 일으킨 적도 없었는데, 저 애는 폭행하고 갈취도 하고 뭐 그랬다잖수?"

그것은 일련의 사건이었다. 이가나현 대부분의 이들이 알고 있고, 결국 이지메의 피해자인 니시미야를 전학에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에 입에 언급되고 있는 사건이었다. 서밖의 시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주차장이 만원이 되도록 몰려들었다. 바깥 쪽의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리곤 푹 고개를 묻었다. 무언가를 계속 진행 중인, 그것도 정당한 발언을 행사 중인 가해자들 무리를 상대하기가 내가 보기에도 힘겨울 듯 보였다. 증언하면 증언할수록 누군가의 마음은 곪았고, 누군가의 마음은 드높은 자만심으로 성성해져 갔다.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찰서 바깥을 나섰다. 분명 그날 어머니는 그녀의 둔중한 고개를 서서히 묻었을 터였다. 아마 그때부터 고소 기간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학교보다 정신과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경찰서에 계속 드나들었고, 집에선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굳이 이뤄야 할 것이 아닌 나의 개인적인 요청이었다. 다행히 성관계 사진은 빠르게 지워졌다. 혹여 사람들이 보았을까 걱정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쓸 만큼 사건의 정도가 여의치 않았다. 그들이 강간을 저질렀다는 것을, 내가 녹음본 속의 그런 말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을 밝혀야 했다. 파일을 정리하고 내 손으로 직접 희롱 내용과 그들이 저지른 행태를 고스란히 써 고소장을 정리하기도 했다. 가해자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 스무 명 정도 되었다. 다 덮어두고 도피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이 사건에 눈을 놓을 수 없었다. 배는 거의 매일 아팠고, 다리에는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잠깐이나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하는 정성 끝에 파열된 항문은 거의 다 치료되었다. 그즈음 나는 완전히 치료가 끝나 병원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정신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어머니와 누나가 강권했기에, 나는 그곳을 거의 집처럼 살림을 차려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은 병실 안에 가해자 부모들이 찾아와 합의서를 들이미는 일이 있었다. 합의금이었는지 무엇인지 모를 문서를 내 앞에 밀어넣으며 지장을 찍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목각인형 같은 내 어깨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모두 가만히 서로에게 진득하도록 무언가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멍하니 있었다. 나도 내가 바보 같았다. 또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란 것이 나를 더 바보같이 만들었다.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다. 내가 경찰서에서도, 학교에서도, 또한 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뺨에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후 병원 안은 난동이 벌어졌다. 따귀를 또 때렸기 때문에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또 경찰서에 갔다. 난동 때문이었나 보았다. 그렇게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일이 아니더라도 가야 되는 일이긴 하였다. 우리는 또 지난날의 조사처럼 한데 모여 앉았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나는 그곳에서 지루히 기다리다, 때마침 조치를 미뤄두고 있는 패거리를 직면했다. 나를 윤간한 그 애들이었다. 그 중 7명 정도는 훈계방면 조치가 되었다고 들었다. 남은 13명에겐 구속 수사를 실행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를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어머니는 변호사를 꾸려 재판을 준비했고, 요오쇼오키와 가해자 쪽에서는 연합 같은 개념의 고소 팀을 이뤄 4대 로펌의 변호인단을 준비했다. 그 애 아버지가 지역 유지기도 하고 유명한 검사라 그 쪽 업계에선 꽤 이름이 나 있었다. 내 생각에, 누나가 오면 괜찮아질 거라던 재정 상태가 참으로 꽤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내 쪽엔 별다른 증거물이 없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은 후에도 종일 병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며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된 것인지 반추를 했다. 허나 대질조사 중에는 꼭 나와서 진술해야만 했기 때문에 꾸물꾸물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누나가 나의 보행을 도왔다. 그때쯤 나는 가해자들이 내민 그것에 대한 적잖은 궁금증이 있었다.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기회가 될 때쯤 서둘러 물어보아야겠단 생각이었다.

"누나."

"어?"

"그런데 우리가 합의금을 받으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물었다. 누나는 말이 없다가 이윽고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왜."

"그럴 순 없어. 합의서에 절대 그렇게 못해. 만약 갖고 싶은 게 있음 다 사줄게. 우리집은 널 돈에 져버릴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아. 그니까 그런 소린 다시 하지 마."

"응."

"엄마 앞에선 더더욱."

가해자 부모들은 또다시 가산을 정리한 1천만엔 가량의 합의금을 건넸다. 누나는 좀 전의 다짐처럼 굳건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 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고,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하는 행태를 당신네 아드님이 저지른 거라고 말했다. 대질조사에서도 역시 다를 바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 측의 의견이 극명히 갈렸다. 그 후로도 시간이 좀 많이 흘러가야 했다.

유즈루와 니시미야는 그 사건 이후로부터 내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스미히토와 아마이가 찾아와 정신과에 입원 중인 나를 만났다. 그들은 내게 심히 미안해했다. 두 입에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결국 아무 대화 없이 헤어졌다. 나는 마리아만을 가끔 만났다.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우에노와는 계속 정신과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성실히 병문안을 와 주었다. 나로선 예상 밖 일이었다. 그녀는 줄곧 아무 말도 없이 날 바라만보다 가는 일이 잦았다. 나도 우에노가 별 말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몇 십일 후엔 니시미야가 병원 문턱에 찾아와 울며 날 껴안았다. 유즈루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그들이 내 어머니에 의해 사건 전말에 대해 알게 됐는데, 그 후로 며칠간 그들은 적잖은 패닉 상태에 빠져, 몇번씩이고 그 사건에 대해 케묻고 조사했다고 전했다. 니시미야 자매의 어머니가 그녀들의 병문안을 부단히 막았지만 그래도 와주었다고 했다. 우에노와 니시미야는 서로 어색해했다. 내가 우려했던 문제였다. 어차피 할 말도 없는지라 나는 별 상관을 두지 않았다. 그녀들은 내게 가끔씩 세간의 근황을 전했다. 나에게는 유즈루가 뉴스이자 라디오였다.

"학교에서 너 대해서 수근거리는 건 여전하더라. 이시다가 인과응보를 제대로 당했다고도 그러고, 지역 인식 나빠졌다고, 나쁜 애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고 그런다나."

유즈루가 콧방귀를 뀌었다.

"웃겨. 지들도 마냥 방관했으면서 몰랐긴 뭘 몰라. 그 애, 요오쇼오키라고 했지? 적어도 십년형은 받아야 돼."

잘근거리며 입술 짓씹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강간 주도, 이지메 주도, 뭐든지 다 걔가 주도한 거라고 그랬어. 사진 유출도 걔가 주도시킨 거잖아."

"어우 속터져. 폭행한 사실만은 확실하다던데 이대로면 그냥 폭행죄로만 기소될 수 있겠어. 아니, 그렇다 쳐도, 폭행한 바로 다음에 동의 하에 서로 섹스하는 학생들이 도대체 일본 전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뭐 그런 이상한 애들이 어딨어. 이시다가 마조 성향을 가지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

나는 문득 내가 그들과의 정사에서 충분히 마조히스트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조금 뗐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세간은 말이 많다고들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아무 반응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나는 이후 몇번 더 경찰서에 불려갔고,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잦게 변호사의 얼굴을 마주보며 더 숨겨진 것을 털어놓길 종용받았다.

"제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것은 변호사님께서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나는 그 말을 내뱉은 뒤 더 이상의 사실은 털어놓지 않았다. 나의 부끄러운 사실들은 이미 전부 얘기했다. 내 신음이 담긴 녹음본부터 그 mp4까지 작은 화면 아래에 전부 털어놓았다.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지겨움의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판이 끝나는 것으로 말이다.

우선 우리 쪽의 의견은, 이지메, 성희롱, 금품 갈취, 성폭력, 자위기구를 사용한 성고문, 강간, 윤간, 성관계 중 찍은 사진으로 인한 협박을 저 패거리끼리 소년 한 명에게 무자비하게 행사해왔다는 것이고, 저 쪽의 의견은 약간의 학교폭력을 자행한 것은 맞으나 한창 때 소년들의 가벼운 장난이었고, 모두 봉사와 훈방조치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외 모든 성적으로 관련된 범죄는 범죄가 아니라 동의 하에 이뤄진 좀 독특한 성향의 성관계라는 것이고, 외려 내 쪽이 그들에게 변태스러운 성행위를 요구했고, cctv 영상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하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아 굳이 반항하지 않고 외려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오메가로서의 내 행실도, 오메가로서 지켜야 할 사회의 기본적인 수칙도 지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도 규정했다. 그들은 나의 이전 이지메 전과기록 또한 그런 대로 빼곡히 잘 정리해놓았다. 과연 팀 단위라 불릴 만했다. 때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법정 밖의 변호사가 물으니,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들끼리 놀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가지고 따져묻는 게 예민한 것이라고 한창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줄곧 피곤하고 몽롱했다. 졸린 상태였고, 눈은 무겁게 내리감겼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법정에서 벌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 꾸는 꿈이 비록 악몽일지언정 얼른 약을 먹고 잠들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내놓은 결과는 대강 이러했다. 요오쇼오키를 포함한 7명은 소년부에 송치되었고, 6명은 봉사활동과 교화, 성교육 영상을 감상하는 처분을 받았다. 요오쇼오키는 예상 밖으로 조울증 약을 섭취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유로 들어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보호관찰과 50시간의 폭력치료 프로그램 이수, 소년원 2년형을 받았다. 소년부에 송치된 다른 아이들 중 몇은 보석을 신청하기도 했다. 요오쇼오키와 다른 아이들 두어 명은 저번 달까지 계속 나를 집단으로 성폭행하고 억제제를 빼앗은 혐의로 구속 혹은 불구속 기소됐다. 처음 입건되었던 가해자 무리 중 7명이 소년부에 송치되었고 남은 사람들 대개는 공소권이 없다며 끝났다. 증거 불충분과 녹음본, 동영상, 충분히 저항하지 않은 점, 오메가로서의 행실우려, 장애인을 이지메하는 심각한 수준의 왕따를 저질렀던 점 등 우리 쪽엔 많은 이유가 따라붙었다. 초범, 미성년자, 충분히 반성하고 있음, 범죄를 부인하지 않음, 심신미약, 피해자를 위해 법원에 거액을 공탁함 등 여러가지 이유가 붙어 참작되었다. 감형된 이유가 많았다. 인터넷에 퍼뜨린 사진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만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사는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어지럽힌 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내곤 나왔다. 법정 밖을 나서는 사람들의 걸음이 한데없이 전부 무거웠다. 나도 눈을 비비며 무겁게 변호사의 뒷모습을 따랐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받은 것들에 대해 일말의 불만족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좀 속이 시원하디?"

"..."

"남의 귀한 아들 소년원까지 보내니까, 어미랑 자식 사이를 2년이나 떨어뜨려 놓으니까 속이 좀 시원해?"

"왜 이러세요! 남의 귀한 아들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저희 기필코 다시 수사할 겁니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은 결코 순순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폭력, 윤간, 강간을 행사한 점도 전부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웬걸, 그런 걸 받아들인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가해자에게 너무도 관대한, 명백히 잘못된 판결이에요!"

어머니가 소리쳤다.

"뭘 받아들이긴 그래? 네 아들이 먼저 내 아들을 꾄 게 맞잖아! 검찰 쪽에서 그렇게 판명났잖아!"

또 비가 왔다. 나는 가해자 부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재촉할 때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추적추적 소리를 듣자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차 진동도 더불어, 오래간만의 침묵도 편안했다. 에어컨이 터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내부의 긴 적막을 채웠다. 아까의 언쟁과는 몹시 대조적인 침묵이었다. 나는 냉기가 감도는 어머니의 차 안에서 나지막히 입을 떼었다.

"그 사람들이 합의금이랑, 탄원서 써주는 대신 낼 돈을 줄 것 아니에요."

"...어?"

어머니는 오랜만에 내가 입을 연 것이 몹시 신기한 듯 보였다. 나조차 너무 오랫동안 입을 안 떼 입안이 버석버석 건조했다.

"합의금 받아요."

어머니는 냉정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아니, 절대 안돼. 합의금은 이젠 못받을 뿐더러, 우리집은 정의를 거부하면서까지 그런 더러운 돈 받을만큼 가난하지 않아. 제대로 된 결과로 바로잡을 거야. 우리 사건, 특별수사팀이 집결해서 다시 엄정수사 해줄거야. 수사 한 다음에 검사님께 부탁해서 항소장 제출하자. 윤간, 강간은 분명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는 중범죄인데, 소년부로만 넘긴 그런 처벌이 도대체 이해가 안가. 참 어이없게도, 가해자들한테만 관대해지는 사람들이라니까. 폭행을 수반한 강간, 윤간을 저지른 중범죄자한테 소년원 2년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쇼야? 솜방망이 처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벌을 안 내린 것에 가까워."

"..."

"저 사람들이 아무 의도 없이 순수하게 주는 돈도 절대 받아들이지 마. 선처문이나 탄원서에도 손조차 대지 말고.그간 행한 범죄에 비하면 15년형도 적은 정도야."

특별수사팀이 어머니의 말대로 엄정수사를 진행하는 중, 학교에는 나와 관련해 어떠한 조치를 내렸다. 잔뜩 화난 채로 날 찾아온 스미히토가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전했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교내에서 자치위원회가 열렸는데 훈방조치된 애들, 그러니까 그간 내게 폭력을 행사한 학생들이 단체로 집합됐다고 했다.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학교도 그것으로 나름의 조치를 내린 셈이었다. 내 입장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조치이기도 해서, 나는 그 애들이 받게 될 접촉-보복 금지 처분을 기다리며 그저 기다리려 했다. 아직까지도 학교엔 가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먹을 휘두르면 코피가 나고 동시에 목이 막혔던 것이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생각나서였다. 생리적인 사레가 나고 정액 맛이 났고, 기억이 그렇게 연결되면 내가 주인님이라고 요오쇼오키에게 빌었던 것 등이 생각났다. 행실이 단정치 못하고, 더럽고, 그런 남자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기억하고 되새겼다. 요오쇼오키는 내가 그런 말을 듣도록 바랐고 또 종용했는데, 이제사 그의 바람은 오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것에, 걷잡을 수 없이 목이 탔다. 최근 나는 요오쇼오키가 항소를 제기했다고 들었다. 야구란 간절한 꿈을 포기할 지경이라고 호소했다고 그랬다. 호소보다는 항소를 제기했다는 사실이 뇌리를 내디뎠다. 법정싸움이 하도 계속되어 더디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럴 정도로 이것은 도무지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요오쇼오키에 관한 상념, 아주 잦게 골몰하게 되는 그것에 불현듯 푹 젖어 있을 때, 문득 내가 왜 평소답지 않은 정신상태에 얽매여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숨결은 멈춰 섰다. 충동적인 게 너무 심하다고, 그런 걸 이유로 대 심신미약이란 단어를 붙이는 게 나았을 터라고 여겼다.

요오쇼오키의 항소 소식이 들려올 즈음, 학교에 되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임박해왔다. 그러므로 학교에 가기 전 성폭력 상담센터의 상담선생님과 잠깐 심신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야 했다.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상담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입을 열기 불편했다. 낯선 남자가 불편했고 낯설게 건네는 모든 물질들이 두려웠다. 그런 사실이 내게는 조금 우스웠지만, 곧내 출몰해온 웃음은 거두었다. 처음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트라우마가 온 것은 아니었기에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에서야 비로소 내가 평소와는 현저하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생활로 복귀하기는 아마도 조금 더 소요될 것이었다. 더불어 낯선 사람을 가리는 성향이 더 짙어져 앞으로의 소통도 힘들 터였다.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나였다. 나는 끝이 났다. 그는 나의 얼굴을 창백히 바라보다 로봇같은 표피로 느릿느릿 웃어보였다. 그도, 나도 창백해져 있었다. 트라우마에 대한 우려만을 나누는 상담은 끝이 났다. 나는 그에게 예의없게 굴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서다시피 했고 여지껏 내 대답을 대기해온 남자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갈 곳이 있어 걸음 속력을 높이며 느지막히 고개 한 번을 돌아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예의라기보단 귀염성이란 말이 더 맞았다. 내 숨결은 지그시 멈추어 섰다. 나는 들이마셨다. 그것이 끝이었다.

학교의 인파들이 완전히 흩어진 후 교내 야구부 연습장을 찾아갔다. 코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담배값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는 그 높다란 의자에 붙박이듯 앉아 있었다. 평소의 평온한 낯과는 달리 심란해 보였다. 닫힌 두 눈꺼풀은 고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햇빛과 더불어 내 시선에 맞닿아 있는 그의 발목을 톡 건드렸다. 그가 조용히 깼다. 마치 내가 오기 전부터 계속 자는 척을 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의자 다리에 몸을 걸치다시피 기대어 서고서 잘 사용하지 않아 건조해진 입으로 말을 걸었다.

"코치님. 그때 사주신 건 언제 갚으면 될까요."

그는 평온하게 당황스러워 보였다.

"이시다, 너는...아, 정말 너구나."

"네."

그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 곳을 따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 너 그날..."

"예?"

코치님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운동장에 두었다. 평소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어색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코치님께서 담배를 주신 날 사건이 일어난 것이니 그랬다. 그날, 그래서 얼버무리듯 그날이라고만 칭한 것이었다. 이유랄 것은 없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코치님의 기분은 괜찮으실지 약간 염려가 되었다. 죄책감이라도 품는다면 그러지 마시라고 한번 가볍게 웃어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목구멍에 잠겼다.

"갚지 않아도 돼. 아니 갚지 마라.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토달지 말어."

"네."

그는 달리 할 말을 살피다가 내 헐거운 옷차림을 보곤 말했다.

"너 환자복은 뭐야. 맨날 나 볼때마다 색다른 옷을 입고 있네."

걸칠거리만 대충 걸친 채 나는 쭉 환자복 차림이었단 걸 그제사 자각했다.

"정신과에 입원했어요."

"그래? 어쩌다...그렇게 됐군..."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나는 뒷발을 서로 부딪혀 모래먼지를 만들다, 약간 웃고는 그 모래들의 공터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신발이 몹시 더러워져 있었다.

"그런데 코치님,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기침이 조금씩 맴돌았다.

"저 다시 학교 나와도 될까요."

"그건 네 마음이지. 뭐." 얼핏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코치님은 저가 다시 학교에 나오는 게 어떠신가요?"

"솔직히 걱정된다." 약간의 한숨이 틈과 템포를 만들었다. "이유는 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네가 전학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음 좋겠다고 바랄 정도였으니까."

전학이란 말이 나오자 나는 코치님을 이전의 시선과는 한층 더 다르게 보게 되었다. 코치님께서는 강간 사건에 대해 이미 심층적으로 알고 계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에게서 알게 모르게 옅은 친밀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그래서 그토록 날 조심스럽게 대했는지도 몰랐다. 평소의 그 사람다운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태도를 뒤바꾸고선 말이었다.

"아, 전학이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럼 지금 생각해봐."

"생각해볼 필요도 없어요. 아무래도 저는 못 떠나요."

"왜?"

"훈방조치된 애들, 그리고 송치된 애들이 무섭긴 해도 좋은 사람들도 많으니까. 코치님 같이. 이번에 위원회도 열렸잖아요. 무엇보다 이런 가격에 이런 집 못 구한다고, 이사도 쉽사리 못해서 말이에요. 어머니가 걱정되어서라도 여기 계속 머무를 거에요. 이가나현에 유년기 때 쌓은 추억도 있고요. 아무튼 헤아려보니까 이유가 많네요."

중학생 때 한창 학교폭력을 당해 전학을 갈 수 있음에도 굳이 가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오뚝이같이 한 자리에서만 꼿꼿이 버틴 집을 떠날 수 없고, 불안정한다 한들 여기가 그나마 제일 안정적일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이가나현을 떠나버리면 아예 잊혀져버릴까봐 혹은 예전의 초등학교 때 친구들처럼 전부 잊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했다. 기억은 한편으론 전부 녹슬기 마련이지만 기왕이면 거기다 기름을 발라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사족을 대신했다. 바람이 얼굴을 맞았다. 저물어가는 중에도 후광을 발산하는 놀이 띄었다.

"다행이네."

그도 신경 안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그런 척 연기하듯,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놀에게 시선을 던져두었다. 그의 얼굴은 차츰 찌푸려지고 있었다. 아마 햇살 때문이었다. 부신 후광에 철로 뒤덮인 사방이 번쩍거렸다. 눈물이 쏟아져나오듯 보이기도 하는 것에 차라리 웃음을 던졌다.

"예쁘네요."

그러자 그는 당황했다. 놀란 듯 하면서도 평온한 자세는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상태였다. 놀랐다기보단 그것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코치님이 되물었다.

"어, 어어? 뭐가? 뭘?"

나는 그를 빤히 마주보다가 놀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노란빛에서 붉은빛으로 서서히 빛나는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의 시선은 그에게로 꽂혀 있었다. 아메바 머리처럼 꼬물거리는 햇빛이 칼인 양 그 안으로 깊숙히 꽂혔다. 햇빛은 너무 따사로웠다. 내가 실패한 강의 다리에서처럼 끈질기게 따사로운 광채였다.

"놀이요."

0
이번 화 신고 2022-06-06 22:09 | 조회 : 961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