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포함) 목소리의 형태 (8)

"씨발, 다리 벌려."

벌써부터 철이 안 들었다는 식으로 남학생을 유인하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그의 앞에서 벌려 보이며 몽롱한 정신을 붙들었다. 헤드라이트를 비춰보이는 상태에서 하는 섹스 같은 기분이었다. 두 병 비워진 사케가 눈앞에서 뒹굴었다.

저것들 중 절반이 내 뱃속에 들어갔다. 시야조차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우선 발가벗겨져 추웠다. 나는 약간 떨고싶은 바람을 입속말로 삼키고서 그가 내 몸을 갖고 놀도록 두었다. 저주같은 단어가 맴돌았다. 아모크, 억제제, 세븐스타, 떠오르는 것들을 주워담아 머무르게 만들었다. 침이 잘 삼켜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어느새 내 주위를 맴돌았다. 확실했다.

"너 아다야?"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조금 웃었다. 여럿이서 해봤어? 아니오. 그러더니 내 몸을 살근살근 어루만지고, 미약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듯 입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피했다.

"왜 그래. 이상한 데서 순진하네. 한번 먹혀봤으면 알 건 다 알 거 같은데."

더 진하게 나갔다. 그간 금문교 사진이라도 붙여놓고 딸쳤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 다리를 잡았다. 알파 페로몬이 진득하게 배어져나왔다. 좆을 내 안에다 힘을 주고서 집어넣었다. 야동에서 본 것만큼 빠르고 단순한 목표가 비춰졌다. 무의식적으로 내 육신을 힘겹게 가다듬을 수 없을만큼 떨었다. 마구 울리는 전자기기를 구멍에다 집어넣으면 그런 자극이 올까 싶었다.

"존나 떤다. 너. 엄청. 그리고 엄청 따듯해."

만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젠장이라고 중얼거리는 외마디와 함께 어디선가 신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방음이 안되는 탓일지 아니면 발가락이 곱아들어가며 내지르는 신음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이토록 섹스까지의 경주가 기다려지는 것은 나의 불완전한 호르몬의 영향일까. 성기가 빳빳해졌다. 불현듯 사라지고 싶어했던 것들이 징그럽게 살아 있었단 걸 자각했다. 내 혐오적인 마음과 함께 묻혔다. 그것은 힘겹게 꺼덕거리며 그의 육신 사이에서 부대꼈다. 바라건대 정액은 속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목욕할 때 빼야했다. 거기서 잔뜩 묻어져나오는 알파 향에 허덕거리며 그래야 했다. 아무래도 힘에 부쳤다. 나는 이미 안에 들어온 것을, 콘돔을 껴달라고 했다. 그가 그대로 박아넣었다.

하, 하으, 제발, 제발.

그렇게 간절한 것은 아니지만 되는 대로 읊조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들, 당장 꺼내어 매만질 수 있는 것들을 작은 단편으로 뱉어냈다. 언제나 처음하는 것처럼 생경하도록 불쾌했다.

너무, 하, 싫어, 흐으, 흑, 하아. 그것은 뱉어냈다. 뱉어낼 이유는 없었는데도 나의 것들은 어쩌다 보니 부대끼고 부서지고 있었다. 뱃속이 따듯하게 쳐올려졌다. 모든 감각을 체득했다. 예민하게 두드리고 날서있는 솜털들을 가다듬으려, 하아, 하아, 날것들의 사원에서 소리쳐보았다. 민감한 발 사이로 또다른 걸음이 섞여 지나갔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노릇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하필 욕실에서 날 강간했던 그들의 얼굴이 스쳤다. 다 되었다는 건 문득 깨닫게 되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때보다 더 확실하고 더 큰 마음으로 묻어내었다. 지금의 섹스는 더 커다랐다. 나는 확실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다리로 허리를 휘감아 꼭 안아버리는 짓 따윌 계속하고, 내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다른 이의 낯선 음경 속에서 모든 걸 감득했다. 나는 다시 새로이 질문을 던졌다. 아, 아아. 커진 게 느껴지지 않을까. 더 이상 확실해질 수 없었다. 나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다른 연인의 오메가 페로몬이 묻은 자지는 내 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훑고 빼내어 갔다. 더 깊고 길게 즐길 수 있도록 오랜 시간동안 거기 머물러 있었다. 오물거리며 씹고 맛보듯 아껴주었다. 쉽게 느껴지는 그의 털은 아주 빳빳했다. 행운이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듯 다가갔다. 아무래도 무력하게 박히는 것보다는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부가적인 성행위가 좋았다.

머리는 어때요?

흐으.

나는 엉기적거리며 기어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품었다. 어머니가 보면 천박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만 박아 입맞췄다. 손이 내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그는 슬슬 어루만지다 불현듯 꽂아내렸다. 프리아포스 향에 허우적거려 잠겨 있다시피 한 육신은 이제 조금 풀려 있었다. 땀은 다행히 나지 않았다. 나는 입맞춤은 그만두고서 잠시간 눈만을 맞춘 뒤 귀두를 훑었다. 연한 붉은빛으로 귀엽게 생겼다. 입 안에 머금고 목을 열었다. 목구멍이 거친 말에 기대어 오르내렸다. 땀은 없지만 그러도록 수증기가 가득했다. 머지않아 충만하게 차올랐다. 차 있는 그것을 느끼며 빨았다. 언제나 그때 같았다. 처음 내가 요오쇼오키에게 범해졌던 때처럼 기억나는 테크닉은 없고 서투르기만 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게 맞았다. 목구멍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할 때, 나는 불시로 찾아오는 오그라든 훈연을 체득했다. 신체기관은 연신 떨었다. 그것들이 어찌나 흐물거리는지 내게조차 연민이 밀려올 정도였다. 그것들이 혐오스러워지며 내 육신을 죽이고 싶었다. 나는 입술 안에 남아있는 부속품들을 되새김질하듯 끊임없이 잘근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동물적이었다. 머리로는 수없이 거쳐온 굴욕감의 재현을 목격하면서도 몸으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꺼이 음탕해졌다. 그렇기 마련이었다. 속내를 숨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꺼내어 묻었다. 부비적거리는 느낌이 불쾌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배가 근지러워짐이 느껴졌다. 들어내고 있었다. 내 몸은 저절로 알파를 반겼다. 구멍 모양이 이상해보이겠다는 어쩌면 익살스러워 보이겠다는 생각이 자연적으로 들었다. 기대감에 벌름거릴 매춘부의 표정이니 자연스런 발상이었다. 그것은 동물적이고 기이한 행위이며 한편으로는 아주 빠르고 간편한 시간이었다. 엇박으로 쑤셔졌다. 내치고 쳐내고 지지듯 그을리는 성기 안에서 마음은 점차로 비대해져가곤 하는 것이다. 동공은 조그맣게 열려 파들거리며 떨렸다.

"안돼, 요, 그만..."

그리고선 좀 더 거세게 박아넣는 순간 혀 밑에 붉게 고였던 위액과 정액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나는 켁켁이며 타액 몇 방울을 추가로 뱉어냈다. 정액은 지나친 발정으로 오줌을 흘리듯 쉼없이 질질 누출되었다. 입가가 더러워진 탓에 손으로 조금씩만 훔쳤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길을 거절하고 있었다. 야금야금 벗어나려 시도하자 대뜸 뒷머리가 붙들렸다. 엉망인 머리를 부여잡는 다부진 손등 새에서 나의 머리칼은 얼굴도 그러지 않는데 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내가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쉭쉭거리는 쉰 소리를 내뱉었다.

"허리 위로는 아예 병신인 년이네."

병신이란 단어가 한 음절씩 나누어져 입가에 맴돌았다.

''솔직히,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나는 섹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밥도 거를 수 있고 잠도 거를 수 있어. 뭐? 비밀도 아니라니. 다 알고 있었다고?''

병신.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을 거다. 짐작은 되지 않았다. 잘하다가 왜 그랬어. 나는 흐득이는 입구멍을 들썩이며 신음했다. 아니, 아니야. 그랬다. 아닐 거였다. 고개를 묻고 싶었다. 팬티만 입고 자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몽정에 시달리며 엉엉 울고 싶었다. 대신 조용히 두 눈을 깔아, 문득 고답적인 정사의 껍데기를 떠올렸다. 불임 오메가의 토기운이 맴돌았다. 없는 정자래도 잉태의 기미를 품을 수 있고 반병신의 조루같은 상체로도 그 남자가 만족할만한 오랄섹스를 해줄 수 있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뒹굴고 뒹굴어서 폭풍을 하나 맞은 양 너무도 치열했었다. 물에 푹 절여진 것이 무슨 캇파가 된 기분이었고, 축축한 곳곳을 여기저기 두드리고 깨무는 더운 손가락들을 부대껴 안을 순간, 그냥 아무때나 라고 말해도 좋을 그런 순간엔 뜬금없이 몸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약간 들었다. 그렇게 뒹굴어놓고선 그랬다. 그런데 금방 잊었다. 체득되는 것들은 적었다. 황홀경이라고 일컫기엔 대단찮아서 절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시도때도 없이 몸에 나타났다. 그 행위들은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정력이 절륜한 알파들이 으레 그렇듯 아주 손쉬운 방식으로 말이다. 잘 느끼는 게 나쁜 건 아니고 밝힌다는 말을 들으면 금새 넘어가버릴 수난으로밖에 치부되지 않아 그냥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정신없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제 끝이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제대로 대답해줄 생각은 갖추지 않았다. 그걸 간과했었다. 그는 흐득이는 몸을 가볍게 때렸다. 그래서 몸이 깨어나면, 내일 니 새끼나 나나 기진맥진하겠다는 말만 하고서 머리를 쥐어 입을 맞췄다. 양다리가 수그러들어 자연스럽게 감겼다. 그러면 좋을 것 같았다. 머리가 여전히 현저하게 낮아진 정신능력을 필두로 움직이고 있었다.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불편했다.

"허윽..."

혀가 들어와 건드리면 불편한 부분까지 헤집었다. 침이 너무 많이 나왔다. 페로몬이 쉼없이 자극해 괴롭게 만들었다. 후에 가서는 호흡을 하기가 버거워졌다. 나는 곧장 세면대로 달려가 다 뱉어냈다. 그는 기분이 더럽다며 투덜거릴 뿐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더러웠다. 억지로 토하는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그 남자가 있는 침대에 되돌아가자, 곧내 몽롱한 졸음기가 밀려들었다. 나는 번듯한 남자의 몸에 살갗을 떨으며 물었다.

"목욕은 안해요?"

향수 있잖아. 그가 귀찮다는 듯 팔을 휘저어 기어드는 나를 밀어냈다. 그래서 나도 2차전을 벌일 생각은 없이 잠자코 수면을 취했다. 이건 비밀인데, 잠이 안 와 야밤에 어슬렁거리며 그의 향수를 몇 방울 뿌렸다. 코트 주머니의 실크컷도 꺼내 피웠다. 흡연룸이라 화장실에 예쁘게 마련된 재떨이도 있었다. 그러고서 나는 말없이 쭈그려 도로를 구경했다. 밤이 보였다. 후회되진 않으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섹스를 마치면 항상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따름이었다. 과거에 부끄러웠던 기억이 많으면 잠을 잘 때 피곤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혀를 잘근잘근 씹어 상념을 잊으려 하나 그것은 늘 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어쩌면 밤에 몰려오는 그 지긋지긋함을 강박적으로 싫어해 여기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하고 난 후의 만족도는 현저히 적은데도 습관적으로 이것을 찾게 되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나치게 탐닉한다는 말꼬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내게 한낱 아메바로 변해가는 느낌을 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뇌를 일일이 들어내는 자극으로 서서히 해체되어갔다.

아침이 되자 남자는 묻지 않았던 자신의 대한 정보들을 스스로 말해주었다.

"다시 만나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

진득한 남성 향수 냄새를 킁킁거리며 좁은 눈을 가로새겼다. 아니오. 나는 고개를 젓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뒤편에선 피식대는 콧방귀가 자주 새나왔다. 자연스러운 페로몬 향이 분출되고 있었다.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일까. 과거에 있던 일이 문득 생각이 나서 목이 어느새 덜덜 떨렸다. 새삼스럽게 웃기고 모호했다. 감사하단 말을 할까 싶었지만 끝내 그저 말없이 무거운 머리와 함께 미끄러져나왔다. 소용이 없었다. 발정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제와 꼭 같은 피로함을 느끼며 정류장 간판에 기대 졸았다. 자야 할 시간에 계속 떡만 쳐서 졸렸다.

나는 집으로 가서 좀 자고 난 뒤 한가한 니시미야와 파르페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저번에 했던 말이 아주 궁금했던 까닭이었다. 나는 딸기 파르페를 시키고 멍하니 빨대를 문 패인 볼우물을 응시했다. 그것들은 모두 그녀의 붉은 양 볼이었다. 겨울이라 부쩍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배란기의 오메가들에게 으레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특히 여자들이 많이 그랬다. 햇살에 그슬린 눈을 맹렬히 깜빡이며, 불현듯 그녀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걸 애꿎은 이유 삼아 괴롭혔던 거니까. 피로함에 몽롱하게 탁자만 노려보다가 이내에는 그 시선을 쇼코에게로 다시 돌렸다. 나는 다시 그곳에 빠졌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회피는 잘했다. 생각하고 깨닫는 능력은, 제대로 마주하는 능력은 여전히 현저하게 낮았다. 더럽게도 그랬다.

"그 때 뭔 말 하려고 한 거야?"

지그시 내려보는 눈길이 위로 갑자기 쏠렸다. 수화로, 어느 때냐고 묻고 있었다.

"마지막에 너희 집에 갔을 때."

얘기를 자각한 눈이 동그라지더니 데굴데굴 구르고 후에는 탁자 끄트머리를 조용히 향했다. 니시미야는 순간적으로 수화를 하려는 목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눈을 굴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왜?

내가 소리없이 물었다. 꼼질대는 손가락 사이, 카페 직원의 손이 디밀고 들어왔다. 파르페를 받은 서로의 발밑 아래로는 가벼운 간지러움이 흘렀다. 한참의 침묵 후에 니시미야가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 말이었다. 나는 잠깐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내 그 말이 지닌 뜻을 조금씩 알아차렸다. 엉긴 밀가루 반죽같이 뜨겁게 들어와선 축축하게 내 귀를 스미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예쁜 초콜릿 시럽 아래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무슨 대답을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경직된 얼굴로 밑에 깔아둔 혀만 부풀렸다.

못, 들, 었, 어?

열렸다가 폈다가. 손을 계속 보다가 눈을 들어올려 얼굴을 마주쳤다. 붉게 달아 있었다. 이런 순간이면 보통 나도, 라는 동의를 하거나 거기다 더 적극적으로 가 사귀자는 말까지 던졌을 것이다. 아니면 확실히 거절을 하는 쪽을 택해야 했는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가만히만 있었다. 이윽고 무언가가 떠올랐을 때, 그때가 되서야 내가 뱉은 말은 짧았다.

나를 왜?

좋으니까 좋지.

그 때 던졌던 말은 달이 아닌 좋아한단 짧고 큰 고백이었다. 두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란 작자가 이런 사람에게 고백을 받을 껀덕지가 없을 뿐더러, 어제까지 맘껏 정사를 나누다 기진맥진하고는, 또 히트사이클에 때를 가리지 않고 비대해져오는 성기며 부푼 눈동자가 불편했다. 또 니시미야의 옆에 붙어 그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후에는 그렇게 될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사, 귀, 자, 는, 말, 을, 하고, 싶었어. 투둑투둑 끊겼다. 아무래도 굳이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짜여진 말인 듯 보였다. 나는 두 눈을 조용히 깜빡거렸다. 시선 끝이 닿는 곳은 불분명했다.

"미안해."

니시미야의 입술 끝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내가 그것을 보았다. 깊고 공허했다.

젖은 셔츠와 젖은 머리카락이 축축한 몸 위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땠었지? 그때는 가방도 잃어버렸었다. 잃어버렸던지 아니면 시마다가 잠깐 뺏어갔던 건지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다. 시선을 위에다 주었다. 칠판은 지저분했다. 쇼코가 앉은 책상은 물기로 흥건했다. 검은 스타킹과 깔끔한 캔버스까지 전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약간 떨듯이 보였다. 아마 떨고 있을 것이다. 아까 같이 그 호수에 들어간 내가 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랬다. 익숙한 목소리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나는 늘 그가 싫었다. 단순히 수학이 싫어서였다. 그리고 모르는 문제를 풀기가 두려워서였다. 그가 고르고 있다. 카와이를 불렀다. 내심 안도하며 두 눈을 치떴다. 그 애는 나름 잘 푸는 편이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골적인 분필 소리가 가신 다음 담임이 두 번째로 호명한 학생은 우에노였다. 일어서 다가가니 칠판 가까이 앉은 쇼코가 조금 더 떨었다. 반 내의 유일한 알파인 애가 지나가려니 불편했나 보았다. 서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우에노는 콧방귀를 끼고 거기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휘갈겼다. 세상에. 우리집에 있는 정체모를 낙서의 범인이 우에노였군.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여기에 정착해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되어지는 순간이다. 숙제하러 왔을 때 아마도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삼아 썼던 것이었다. 미끄러져 내리는 손가락과 조그맣게 토막난 손허리뼈, 예전에는 그 얼굴과 작은 몸짓을 기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형상은 점차 흐릿해졌다. 그렇다고 까마득히 잊을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때는 내가 오메가로 형질이 변하기 전 얘기였다. 길게 재어봐야 한 6년전 쯤이다. 우에노나 나나 우리 모두 같은 알파였을 때는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열병을 2주 내리로 크게 한번 앓더니 후에는 오메가로 형질이 변했다. 아주 간단하게 변했다. 이상한 냄새가 잦게 몸에서 풍겼고, 나는 애액이 진득하게 엉겨붙은 팬티를 들고 뛰쳐나와 어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괴롭게 했다.

''''이 이상한 건 뭔데?''''

''''앞으로 이거 계속 물하고 같이 삼켜. 그냥 감기약 같은 거야.''''

약국에서 조그만 크기에 가격은 거기에 비해 비싼 알약을 사와 먹었다. 쇼코가 늘 먹던 그 알약이었다. 분홍색으로 삼키기가 어려운. 그리고 내가 호수에 던져 버렸던 것의 정체였다. 처음엔 거부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놀리고 난 후에는,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그래도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우에노와의 사이도 멀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억제제가 아닌 탈취제로 덮어냈어야 했다. 알파인 아이에게도 오메가 페로몬은 불편했을 것이다. 비단 우에노뿐만이 아니더라도 나의 형질이 변한 후로부터 반 아이들은 나를 부단히 피했다. 그때쯤 쇼코를 괴롭힌 것으로 선생님께 꾸짖음을 받은 이유도 있었다. 아무래도 오메가에 대한 불쾌한 낙서나 희롱 뿐이 아니라 가해자니 외려 잘된 셈이라는 말도 들려왔던 까닭이었다. 내가 들은 말들은 어느 정도 반영되어, 돌아왔을 땐 고스란히 책상에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해선 정성들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들을 지워주는 사람은 항상 쇼코였다. 물을 묻혀 소리가 나게끔 닦았다. 칠판에도 마찬가지로 빼곡히 적힌 그것까지 닦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쇼코와 같은 신세, 즉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을 차츰차츰 자각해갔다. 성교육 시간에는 만날 졸았고 이성에 딱히 관심도 없어 오메가라는 것의 정의는 하나도 몰랐지만, 뭐든 쇼코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계기라는 점에서 내게는 아주 지독한 인상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도 내 자리에 적힌 낙서는 쇼코가 대신 지워주었다. 호수에 버려진 가방을 되찾아 교실에 왔는데, 누군가 내 책상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는 것을 유리창 너머로 보았다. 어김없었다. 니시미야였다. 나는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면 반응이 달랐을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고, 뭣보다 그 애가 내 허락없이 책상을 닦아준다는 게 불편했다.

아니다. 아예 쇼코가 내 존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황망히 보다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쇼코는 창 너머의 나를 보았고, 가벼운 손인사를 했다. 나는 그러자 얼굴이 터질 듯 뜨거워져서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기꺼이 교실에 들어섰다. 누가 그런 거 부탁했느냐며 빠르게 걸레를 뺏어 때렸다. 그러자 쇼코도 나를 때렸다. 평소 그런 반응을 해오지 않아서 의외였다. 우리는 둘 다 싸움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그래서 어린 남매가 투닥거리듯 별거없는 미미한 폭력으로만 서로의 대한 감정을 주고받았다. 강도는 점차로 더 거세어져갔다. 쇼코는 중간중간 내가 흉내내며 놀렸던 그 독특한 목소리를 파편처럼 내뱉었고, 나는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그 애와의 주먹질에 열중했다. 강렬한 햇빛이 빈 공간을 차갑게 물들였다. 어느새 니시미야는 나의 배 위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눕혀진 내 몸에 정신없이 주먹을 퍼부으며 울었다.

"바보야, 터무니없이 안 맞잖아."

내가 주위의 책상을 붙잡고 일어서며 소리질렀다. 사실 그런 것은 땀이 나 절여지다시피 된 시점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맹렬히 집중하고 부단히 깜빡대고 있었다. 쇼코의 눈을 마주보며 그랬다. 분홍빛 섬광이 그 얼굴에 주저앉았다. 식은땀과 가쁜 숨이 이끌어낸 쌉쌀한 냄새가 났다. 우리 둘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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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16 | 조회 : 90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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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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