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9)

모든 게 꼬인 느낌인데 그래도 오늘은 지나가고 잠은 또 자야하고 마리아 얼굴은 봐야하고 담배는 태워야 돼서, 다만 그래야 하는 것들을 이유 삼아 그것들으로만 숨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되돌아와 세수를 했다. 가장 먼저 진행하는 절차는 면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때가 다가오면 잘 했다. 여유를 부린 것은 잠시였다. 곧이어 날에 베였다. 마침 코도 밴드가 얹혔는데 이건 너무했다. 너덜해진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 어린 볼멘소리에 거기서 깨어났다. 마리아가 내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가 왔다며 쥐어올리고 있었다.

"고마워. 여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우에노였다.

"이번주 주말에 시간 있지?"

"무슨 일인데?"

"스이몬 애들이랑 유원지에서 놀 거야."

초등학교 애들 얘기였다. 얼굴이 다친 것이 걸렸으나 그렇게까지 신경 쓸 바는 아니라고 여겼다.

"니시미야 걔도 갈 거고."

"그 앤 왜 불러?"

"부르면 안돼? 걔도 허락했어. 심지어 동생하고도 같이 가는데."

"..."

"너도 올 거지?"

"싫어."

"왜? 와."

"싫다니까."

"아 좀 와라. 오라면. 언제까지 그렇게 병신처럼 살래?"

우에노는 다시 내게 그때처럼 대뜸 욕을 했다.

"걔한테 사과해가지고. 너도 나도 죄책감 풀어야지."

"무슨 소리야."

"시마다도 불렀어. 이참에 그냥 그때 묵힌 거 싹 다 풀 거야. 너도 이지메당한 건 잊고 가급적이면 걔 용서해."

"시마다는 상관없어."

난 우에노의 명령에 맞춰 그걸 다 잊은 척했다.

"넌 속이 없는 거야 아님 멍청한 거야? 아무튼 너 와. 요새 뭘하러 다니길래 계속 메세지도 안보고 연락도 없어? 너 원래 그렇게 바쁜 놈 아니잖아."

"미안해."

"나한테 사과하지 마. 어쨌든 어딘지 보내줄 테니까 꼭 와야 돼."

거기까지 되자니 귀찮더라도 가보긴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회부적응자 새끼야, 알겠어?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응. 알겠어. 좀 끊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던 전화가 끊겼다. 시마다 카즈키라는 이름은 이미 내 뇌리에 깊숙히 박혀있는 상태였다. 그 애도 우에노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으로, 오메가 발현 후 날 멀리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예 연락이 끊겼는데 우에노 연락을 듣자니 지금 뭘하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니시미야가 온다고 하니 심란해졌다. 우에노와는 병실에서도 같이 잘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만나는 게 힘들지 않을까. 어쩌면 우에노가 쇼코에게 강요한 만남이지 않을까. 그런 질문들에 따라붙는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선은 그녀와 함께 가보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재미봤어?"

다음날 하교 중에는 대뜸 카토가 섹스에 관한 것을 물었다. 내가 러브호텔에서 잔 것도 전부 알고 있어,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스미히토를 일찍 물렸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자칫 질문 공세가 벌어질 뻔했다. 나는 채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알았어?"

"난 다 알아 새끼야. 어제 러브호텔에서 아저씨랑 한판 떴지?"

"응."

카토는 엄청나게 웃었다. 고개를 쳐들고 만화에 나오는 쾌걸처럼 웃어대다가 긴 숨과 함께 말했다.

"너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 아저씨 우리가 소개시켜준 사람이잖아."

"그랬나. 근데 어차피 그런 용도로 소개시켜줬잖아."

"섹스하는 건 상관없는데 담배는 그만 펴. 냄새나서 싫잖아 괜히."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다가 이내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면 나는 꼭 그 애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교복이라도 벗고 하든지..."

"무슨 상관이야."

"그러게. 발정난 것만 아니면."

꼭 남들과 있을 때 심술을 부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심술의 대상은 주로 나라고 생각한다.

"너 정말..."

"야!"

카토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멀리서 유즈루가 우리에게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고개를 돌렸다. 알록달록한 바람막이를 가볍게 걸친 몸이 달려오고 있었다. 눈도 올 텐데 패기가 있는 건지 추위도 없어보였고, 머리카락은 여전히 짧았다. 가까이 다가오니 새삼 키가 작은 것이 실감이 났다.

"너..."

"누구야 쟨?"

카토는 그녀를 심드렁한 시선으로 내리보았다. 무릎을 구부려 잡은 몸이 불안정하게 떨고 있었다.

"옆에 있는 분은 잠시 비켜주실래요?" 유즈루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이시다. 얘 누구야?"

"아는 동생이야. 얘기 좀 하게 잠깐 비켜줄래?"

"나도 들을 건데."

"왜 이래."

내가 딱딱하게 웃었다.

"맘대로 하세요 그럼. 야, 딴 데 보지 말고. 할 말 있으니까."

"뭔데."

"언니가 너한테 고백했었어?"

내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스러운 질문이 들어왔다. 카토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니, 약간 놀란 표정이 눈에 띄어 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응. 그렇긴 한데 그건 왜."

"세상에. 그게 진짜였어...그렇담 네가 진짜로 언니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마음 조금이라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몸이 들이대었다.

"아니. 아냐.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야. 친구로서 좋은 거지, 물론."

나는 이런 대화를 카토가 고스란히 듣는 게 매우 불편하다고 여기며 답했다.

"다행이네. 받아줬으면 진짜 짜증날 뻔했어. 안 그래도 러브호텔에서 주말동안 막 자러다니는 놈인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어?"

"다 들리던데. 참나, 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네. 그런 사적인 걸 얘기할 때 남들 다 들리게 밖에서 얘기하면 부끄럽지도 않아?"

"딱히..."

"난 진짜 네가 그러고 다닐 줄 몰랐어."

유즈루가 멍하니 내 머리 끝을 바라보다 말했다. 하기사 그녀 입장에서라면 강간을 당하고 나서도 성 탐닉증에 걸린 사람처럼 섹스를 찾아 헤매는 내가 이해되지 않을 터였다. 당장 나만 해도 이해가 안되니까. 말없이 내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자, 카토는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반대쪽으로 내 몸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유즈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얘기 끝났으면 갈게."

"뭐야. 아무튼 거절은 잘했어. 언니하고는 내가 얘기 한번 해볼게."

내가 고개를 돌렸다. 카토가 어깨동무를 하며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줄곧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쩐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말 좀 잘해주고. 다음에 밥이라도 사줄게."

"아니. 평소에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되게 징그러운 거 아냐?"

"평소에 안 그랬다니."

"됐거든 진짜."

유즈루는 중지손가락을 피며 반대쪽으로 떠났다. 이윽고 나는 목에 무겁게 걸린 팔을 풀어냈다. 알파 페로몬이 미약하게 배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토는 계속해 감겨들어왔다. 마지못해 내가 좀 떨어지라며 떼어내는 시늉을 해보여야 했다.

"뭐하는 거야."

"일로 와. 가까이 붙어. 너 고백받았어? 받았으면 누구한테?"

"신경 쓸 필요없어."

"신경쓰는 거 아닌데."

내가 눈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럼 왜 이래."

"궁금하잖아.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냐. 네가 아무리 별 말도 안하고 그냥 넘어가는 타입이라 해도."

"원래 그런 사람한테 이러시네."

"다른 사람한테 이런 얘기하는 게 불편해 너는?"

"응?"

"불편하냐고."

카토가 정확히 짚었다.

"그래."

불편해서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감추고 싶은 사실, 굳이 알려도 되지 않을 것들이 공개되는 데에는 미묘한 거북함이 감돌았다. 특히 카토처럼 무슨 영문인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는 더 거북했다. 이상하게 최근에 들어 그것이 전보다는 민감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그냥 그와는 아예 점접이 없는 만남어플을 깔아야하나 싶었다. 과히 싫어하는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 정도로 카토에겐 내 사적인 정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가족을 제외한 남에겐 어떻게 비춰지든 무슨 소문이 돌든 신경 안 쓰기로 했고, 최근에도 그랬으면서 자꾸 그런 반응이었다.

주말엔 유원지로 갔다. 우에노랑 했던 그 약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니시미야는 유즈루와 함께 왔고, 원래 6학년 때 같은 반이던 애들 밖에도 스이몬에서 봤던 웬만한 친구들은 다 모여있어서 아주 시끄러웠다. 우리 미용실 단골부터 유치원 때부터 강가 다리에서 담력시험하던 애들까지 분포도가 다양했다. 그런데 우에노가 나를 부른 목적인 시마다만 없었다. 이사를 가서 많이 바쁜가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안 간 것도 같았다. 언제 고등학교 하교할 때 그 애를 근처에서 본 것도 같았으니까.

"걘 안 온대?"

"좀 기다려봐. 그나저나 마음은 생겼고?"

"무슨 마음?"
"사과..."

나로 말하자면 시마다와 화해할 생각이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우에노가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아서였다.

"어."

내가 대답했다.

"역시 내 말 잘들어."

그러면서 머리에 손을 댔다. 나보다 키도 작은데 손을 쭉 뻗었다.

"뭐하는 거야."

다른 애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서 원하는 데로 가기로 했다. 우에노는 같이 타코야끼 가게를 가자고 졸랐다. 여기서 비교적 멀지 않은 위치였으므로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지폐를 끄집어내려다가, 점원의 얼굴을 힐끔거리고는 적잖게 놀랐다. 그는 시마다였다. 도통 시선을 주지 않아서 여즉 몰라봤던 것이었다.

"카즈키?"

그는 말없이 햇빛을 받으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타코야끼를 담은 포장지만 내밀 뿐이었다. 담배 냄새가 나서 먼저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별다른 손짓 없이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한번 더 내밀었다. 내가 받았다. 우에노는 절충한 침묵만이 흐르는 나와 시마다 사이에 끼어 말했다.

"말이라도 좀 해라. 어떻게 예전에도 별말없이 싸했더니만 달라진 게 없어."

그나마 예전엔 우리 사이에 다른 친구도 있었고, 그때의 나는 별거 없어도 끊임없이 걔한테 말을 걸었으니까. 그게 당연했던 사실이 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시마다는 멍하니 조잘거리는 우에노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흔들었다. 시선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따끈하게 식어내리는 타코야끼를 손에 쥔 내게로였다.

"냄새 나잖아..."

"..."

주르륵 흘리는 감각이 불쾌했다.

"이것 봐라."

"뭐가."

"알파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베타인 애가 냄새 갖고 면박을 주네."

"나보고 어쩌라고? 함부로 찾아와서 뭐하는 거야."

"얘 너랑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화해하러 왔어."

"관심없어."

"나 너 때문에 얘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고."

아무래도 더 이상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시마다는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너 손님이랑 싸우냐? 아니에요. 그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은 타코야끼를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보았자 시마다가 별달리 할 일도 없었다. 한산한 구역인지라 사가는 손님이 없던 까닭이었다.

"언제 꺼져?"

시마다가 불쑥 물었다. 우에노가 부단히 질문을 퍼붓는 것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나도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햇볕에 목덜미가 쬐여 따가웠다.

"네가..."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그가 내 쪽을 턱짓했다. 그러자 나는 가볍게 먼저 사과하기를 종용했다.

"지랄."

"주소나 알려줘." 우에노가 말했다. "그간 어딨었던 거야? 여기서 일한단 것도 간신히 알았잖아. 연락은 좀 하고 살자."

"알파새끼한테 내가 왜."

"죽여버려, 진짜." 그녀가 낄낄 웃으며 휘갈긴 쪽지를 채갔다.

"서운하게 나같은 사이에서까지 그런 소릴 하냐. 자, 이거 받아. 그리고 더 이상 이시다의 페로몬에 관해선 얘기하지 말자고. 솔직히 나도 참는데 너라고 못 참겠어."

"참긴?"

내가 이해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상한 맥락은 아냐. 변태새끼."

"그럼 어느 쪽이 더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거야? 너, 아니면 너?"

시마다가 손가락으로 우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잠시 무슨 답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옆편에 서 있던 우에노는 문득 내게 조그만 향수를 건네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글른 것 같으니까 이거 뿌리고 그냥 가자. 너 억제제는 먹은 거 맞아?"

"응. 왜?"

"아냐."

그는 내일 놀러가겠다고 우에노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것을 이유로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를 끌어 사라졌다. 나는 향수를 조금씩 목에 뿌렸다. 기분 좋은 꽃향이 났다. 우에노의 향과 비슷한 듯 보였다. 그녀는 관람차나 탈 차례라고 평소와 달리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에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작 너희들이 좋게 풀 의지가 별로 없어보이는 것 같다며 중얼거렸다. 몰라. 그냥 놀아야지.

"난 그냥 우리가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버렸음 좋겠어. 난 이상하게 현재를 잘 못 받아들이겠거든. 옛날에 좋았잖아. 그리고 그때 넌 이러지도 않았잖아."

그리고는 할인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햝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답했다.

"그래."

"뭐 그렇다고 지금이 싫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그런데 너는 좀 맘에 안 들어하는 것 같아, 쇼야. 너도 그때가 아무래도 더 좋지 않았어? 네가 알파였을 시절이니까."

"아니. 알파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닌데. 뭐가 더 낫다는 거냐? 내가 그때 좀 더 철없이 뻔뻔하게 살았다는 거?"

"말을 왜 그렇게 하니?"

순간 알파 페로몬이 뿜어져나와 다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 애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자각하지 못한 분출일까.

"..."

"그 착한 척하는 애 이지메시킨 게 걸려서 그래?"

"아니, 난..."

"됐다. 관둬, 정말 재미없다."

그러자 순식간에 페로몬이 가셔들었다. 정신을 차린 내가 그 질문에서 무슨 답을 원하느냐고 묻자, 우에노는 말없이 관람차 쪽만 가리켰다. 빨리 가기나 하자는 뜻이었다. 이윽고 나는 빠르게 우에노를 이끌어 관람차 줄에 다다렀다. 거기 마침 니시미야와 유즈루도 있어서 우리 쪽으로 왔다. 그러자 우에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상태로, 자신은 니시미야와 함께 탑승하겠다고 알렸다. 그리하여 나도 그냥 유즈루와 탔다. 유즈루는 관람차에 올라선 순간부터 줄곧 미묘하게 불안한 낯이었다.

"뭔 일 날 것 같아. 차라리 뒤에서 탈걸. 그럼 언니가 저기서 뭐하는지 볼 수 있을텐데."

나는 관람차를 다 탄 후 유즈루에게 솜사탕을 사 쥐어주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담배를 피우러 좀 먼 곳으로 나만 떨어져 향했다. 익숙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시마다가 쓰레기통 주변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캄캄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머잖아 드러나는 얇은 콧날 덕에 그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시마다의 눈썹은 이내 한데 모이는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뭔데."

그리고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말없이 그와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잡아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니가 담배를 피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언제부터."

"여름."

손이 좀 떨렸다. 그때가 맞을 것이다. 아마 가을으로부터 한 달 정도 남겨둔 개월이었으니까.

"머리 아픈데 왜 이렇게 존나 향수를 뿌리는 거야."

"억제제를 먹어도 계속 냄새 나더라고."

냄새에 관한 트집은 그에게서 굉장히 많이 들어봤던 종류의 것이므로 어느 정도 면역이 있었다.

"하여간 또 걔 짓이지, 이렇게 만나게 한 것도."

"우에노?"

"응. 왜 여기까지 하필. 지겹게시리."

"..."

"보면서 궁금한 거 있었는데. 너희 사겨?"

"아니."

연기는 조그만 사다리 위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시마다는 아무래도 담배 냄새 때문에 내가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이제 막 자각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가 알파에서 오메가로 형질이 변한 초등학교 때의 일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그랬다. 오히려 그것을 제일 잘 알고 그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쪽은 그였다. 시마다는 내가 니시미야에게 행사했던 일들을 내게 다시 행하며, 첫 히트사이클이 찾아올 때 억제제와 가방을 강가로 던지고 놀았다. 그건 내게 처음으로 그들이 달라졌다는 인식을 주었다. 둔했던 나는 그제서야 그것을 깨닫고 오메가로서 챙겨야 할 것들을 그에게 빼앗기지 않게 더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그만 억제제 봉지나 그 밖에도 효과가 있는 호르몬 억제제, 이브A. 별 소용은 없었다. 중학교 때 그가 더 나은 방식으로 나와 놀았던 까닭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내 가방을 던지고 놀으며 웃던 시마다에게 제안했다. 담력시험을 하자는 거였다. 우리가 학교가 끝날 때마다 질리도록 함께하던 그것을 다시하자는 거였다. 시마다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날 하교 중에 다시 그 다리로 나를 데려갔다. 겨울의 날씨였고, 눈이 왔지만 강가는 여전히 푸른 정취를 유지한 채 얼기 직전이었다. 주변엔 어리둥절하는 기색의 여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뛰어내려봐.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멈추는 기색 없이 달려나가 뛰어내렸다. 담력을 시험했던 것이 후에는 그렇게 변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치 못했다. 한창 덩어리진 눈이 내려 자꾸만 콧잔등에 닿아왔다. 마침내 커다란 소리가 물 속을 타고 퍼졌다. 아주 차가웠다. 예전보다 키가 커졌기에 크게 헤매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무겁게 차오른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얼굴 하나를 내밀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서야 고개를 디밀었다. 물 속에만 있다 빼낸 고개가 여간 냉랭하게 느껴젔다. 다리 위의 사람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일들의 영향으로, 내 중학교 시절은 거의 항상 시마다와 같이 그런 류의 짓을 벌였던 기억밖에 없다.

"그럼 왜 널 끌고 와. 진짜 화해하려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시마다는 잠시 침묵한 후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필요없는데."

필터를 가볍게 털었다.

"너도 그렇지?"

"응."

"난 솔직히 그때 무슨 일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나는데."

그러면서 내 눈은 힐끔거리는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담력시험인가 뭔가를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네가 계절에 상관없이 거기 무심코 들어가는 거 보고 있었지 아마."

"네가 이사가기 전에 늘 하교했던 그 다리에서."

"맞아. 언제 그렇게 더러워질지도 모르고 냅다 뛰어들어서 흙탕물 되버린 거 존나 웃겼는데."

시마다가 그렇게 웃다가 불현듯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웃음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다음엔 우에노 말고 네가 직접 여기로 와."

"내가?"

"점심이라도 같이 해. 주말엔 근처에 있을 거니까."

고개가 끄덕여졌다. 멀지 않긴 하니 버스만 타도 오기에는 좋았다. 그럼 다음에 오는 걸로 하고. 카페에선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 의문스러울 만한 변화였다. 이후 그는 커다란 보폭으로 걸으며, 내 쪽으로 다가가 아직 안 태운 것을 빼앗아갔다.

"이건 끊자."

그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때와 같은 웃음기가 나지막하게 얼굴에 묻어 있었다. 나는 달리 되찾을 생각을 안하고 중학교 때처럼 다른 것 하나를 또 꺼냈다. 그러더니 시마다는 그때랑 변한 게 없다는 말을 건네며 다시 웃었다. 그것들이 다 태워진 후에도 나는 한참을 그와 함께 노닥거리다가 우에노가 갈 시간이란 문자를 보내고서야 떠났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는 참이었다. 마침 버스를 타고 떠나려 하는데 문득 니시미야가 보이지 않았다.

"관람차 탄 후에 어디로 갔어?"

"내가 알겠냐? 몰라. 그냥 우리끼리 가자. 문자도 보내놨는데, 나중에 버스 알아서 타고 오겠지."

유즈루는 벌써 니시미야를 찾으러 가고 없었다. 그러자 나도 그 애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우에노의 말과 달리 현저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 했어야 했는데."

"됐어. 지금 말해봤자 뭔 쓸모가 있어. 그리고 애당초 내가 좀 붙어있어야 했어. 어차피 언니나 너나 놀러 온 거잖아. 나는 언니 보살피겠다고 꼽사리 낀 거고."

그러나 니시미야는 생각했던 것보다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관람차 주변 가까운 곳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던 것이었다. 몇 번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자, 가까이 다가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동그라진 눈으로 고개를 돌아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얼른 가자. 자전거 타고 갈까?"

''괜찮아.''

"재밌게 놀았어?"

''아아니. 생각보다 뭐가 없어.''

니시미야가 밝게 미소 지었다. 뺨 언저리에 어딘가 맞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내가 그 상처에 대해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듯 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다니까.''

그것이 미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그 애들의 집에서 유즈루의 숙제를 도와주려는데, 그 애는 공부를 하다 말고 대뜸 책상 밑의 조그만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처음엔 당연히 제지하려고 했다.

"뭐야 이게?"

"보면 몰라?"

"모르는 게 아니지. 다시 집어넣어."

"잠깐만. 그 손 그만 떼고. 이것 좀 봐봐, 멍청아."

"뭔데..."

내가 말을 멈추었다. 관람차 내부의 풍경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곳에 여자애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추어졌다. 누가 누군지는 사실 잘 알 수 없었다.

"녹음 기능 있는 카메라 붙였는데. 뭔 일 있을지 몰라서."

"내가 봐도 돼?"

"괜찮아. 이미 큰 맘 먹은 거야. 자. 됐다."

우리는 이내 긴장된 표정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지지직거리는 음질이 들려오더니 우에노의 커다란 음성이 울려퍼지고는 카메라가 푹 떨어졌다. 우에노의 팔이 마지막으로 후려치듯 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에 끝이 났다. 우리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즈루가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곤 무릎을 구부리고 거기다 얼굴을 묻어 중얼거렸다.

"보지 말걸 그랬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단 조건으로 우에노를 불렀다. 그 촬영된 영상과 관련해 할 말이 있어서였다. 우에노는 겨울인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며 투덜거리다가도, 막상 나오니 내 쪽보다는 그 애가 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저번에 유원지에 갔을 때 니시미야와 화해했느냐고 물었다. 불현듯 얇은 입술이 미세하게 굳는 것을 쉽사리 포착할 수 있었다.

"아니? 싫어하는 것 같길래. 대답만 잘 해줬어. 그래도 착했어."

의문감이 들었다.

"혹여나 해서 말하는 건데."

"뭐."

"그 애 뺨을 때렸어?"

"뭔 소리야?"

"저번에 관람차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

우에노의 표정은 신경 조직이 경련하듯 삽시간에 굳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혹여라고 치부하기에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어 빠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씨발.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처음 들어설 때는 몰랐는데."

나는 알면서도 되물었다.

"뭐가?"

"얼버무리긴. 그거 카메라였구나. 진짜 소름끼쳐. 내가 화해하자고 주선도 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날 못 믿어, 못 믿는다는 걸 보여줄 줄은 몰랐어. 그거 걔가 했냐? 그 뭐냐, 카메라 잘 만진다는 걔 동생?"

나 또한 잠시간 그 말을 정리하느라 굳어 있었다.

"또 이렇게 말도 안하면서. 너희를 다시 거기다 불러모아놓은 내가 바보지. 혹여나라니, 뭐 씨발..."

우에노가 머리를 긁으며 흐뜨러뜨렸다. 그리고 손을 펼쳐가며 열변을 토할 즈음이었다.

"내가 뭐 뺨 때린 거 그건 맞아. 맞는데 처음엔 나도 나름 마음 가라앉히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 씨발년 내가 죽여버릴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거기 앉은 거 아냐. 사과하겠다는 거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다듬은 후에 걔 얼굴을 보고 말 거는데, 존나 싫었어. 앞자리에 네가 있는데. 그래서 넌 안 보였겠지만 네 뒷모습이 보였는데. 너랑 걔가 있는 게 갑자기 생각이 났어. 그때 처음 마주쳤었잖아. 내가 일하는 가게에서. 티는 안 냈지만 너 만난 후로부터 점차 그게 생각이 나고, 씨발, 너무 싫어지는 거야. 그래서 걔가 뭐라고 계속 그 필담으로 얘기하는데 도무지 눈에 안 들어와. 왜? 얼굴 보는 것도 싫었고 담배는 피고 싶은데, 아직 관람차는 반도 안 올라갔고. 그래서 뺨을 때렸어. 뭔 말 했는지 기억 안나는데 소리도 질러가면서. 이상한 생각할까 그러는데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그래서 그런 거야. 뭐가 꾸역꾸역 올라가서."

울더라 걔. 관람차 다 타고 나서도. 알아들을 수 없고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아, 우에노에게는 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간다고 대꾸했다. 실제로 잘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병실에 있을 적 한데 옹기종기 모였던 그 애들의 사이는 돈독할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아 보였고, 큰 문제도 없어보였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서먹해진 건지. 이에 그녀는 급격히 어두워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해 안 가겠지. 나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알아. 아니까. 그래. 나 뭐, 사과라도 할까?"

"그래. 쇼코한테."

"맨날 쇼코 타령이야...하긴 성격이 그렇게 얼빠졌으니까. 지금 네 스타일은 그런 애란 거겠지."

"그런 게 아니야. 지금은 우선 돌아가자. 많이 힘든 것 같아. 가서 쉬어. 아니면 데려다줄까?"

"아니. 지랄이야. 아무한테나 데려다준다고 하지 마."

아무나는 아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우에노는 울면서 먹던 아이스크림을 내 옷 정중앙에 던지고는, 그대로 허리를 감고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탔다. 알파 페로몬이 불현듯 숨막히게 뿜어져나와 호흡하기가 좀 힘들었지만, 나름대로는 참을만 했다. 등 뒤에선 조용하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도착해도 계속 좌석에 버티고 있기에 그냥 한번 더 마을 전체를 돌았다. 그렇게 총 세번을 돌고 해가 질 때 즈음이었다.

"진짜 짜증나, 너."

그 애를 데려다주고 집에 도착해 옷을 벗으니, 어느덧 털외투 등은 축축하게 물들어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숨막히도록 배출하던 냄새도 배였고.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콧물도 묻은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귀찮은 일이 더 많아졌다. 아이스크림에 눈물 자국까지 묻어난 그 단정한 셔츠는 특히나 꼼꼼히 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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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18 | 조회 : 717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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