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11)

다리가 좀 다쳤다고 했다. 다행히 크게 아프진 않았다. 기껏해봐야 10m 정도 되는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라 그런가 보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내가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비교적 솔직한 나카츠카의 말에 따르면, 니시미야는 병원에 찾아왔다가 우에노에게 대뜸 시비를 걸려 그녀와 싸웠다고 한다. 물론 우에노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으며 쏘아붙인 것에 가까웠다. 그러게 왜 투신을 했느냐고, 왜 그런 선택을 해서 애먼 애를 다치게 만들었느냔 질문이 비난의 주된 내용이었다. 쇼코는 거의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고. 그러나 그것이 점차 과격해지며 몸싸움으로 번졌고, 그 직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쇼코의 어머니가 등장해 우에노에게 손찌검을 했다. 한편 그녀가 이미 우리 어머니에게 사과를 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다소 극적이라 과장된 부분이 있을까 의심을 했지만, 나카츠카는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장담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냐?"

"아니다. 믿을게...믿는데..."

내가 얼버무리자 눈썹은 금세 팔자 모양을 그렸다.

"게다가 우에노 나오카가 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간 방문객도 못 오게 막아서 병실 독점하고, 그 사이 너한테 이상한 짓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나?"

"무슨...이상한 짓?"

"가령 키스를 당한다거나."

내가 피식 웃어버렸다.

"무슨 소리야. 우에노는 그런 거 역겨워할걸."

"네가 그런 감정인 건 아니고? 하여튼간에, 걔 조심해라. 옛날에 같이 몰려서 다닐 때 친했단 건 알겠는데 지금까지도 마냥 그때하고 같은 애겠어? 세월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그럼 그게..."

"그래! 스미히토가 밤에 널 찾아왔을 때 어쩌다 그걸 봤었다니까!"

나는 내 입술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고심에 잠겼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우에노는 그럴 애가 아니라고만 여겼었다. 막연했다. 어쩌면, 솔직히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내심 바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그 수많은 일들 사이에서, 쉽사리 판단을 내딛기가 버겁다고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나카츠카로부터 갑작스럽게 들은 우에노의 이야기도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묵직했다. 모든 것이 그리 느껴졌다. 그러게 먼저 좀 잘 잡을 걸 그랬다. 괜히 그곳에서 떨어져가지곤 가족부터 쇼코까지 전부 한데 모이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싫었던 그 주목을 다시 겪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이게 뭐람. 얼굴 창백해진 것 좀 봐라. 역시 얘기를 하지 말걸 그랬나. 놀랐지?"

"그래. 우선...우선 쇼코를 찾아가봐야겠어."

내가 침대를 거치고 일어서며 말했다. 수액호스를 비롯한 잡동사니들이 일순 우르르 엉겨지는 현상과 함께였다. 그러자 나카츠카는 기겁하며 나를 만류했다.

"왜 이래! 환자는 안정을 취하는 게 최우선인데. 나도 지금 겨우 너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야. 쇼코고 뭐고 일단 다 낫고 만나. 할 말 있으면 내가 대신 전해줄게."

"아니. 난 이미 괜찮은데."

"괜찮긴? 그렇게 믿고 있다가 갑자기 훅 가는 거야. 뭐. 내가 눕혀줘?"

"어. 어. 알겠어. 그래. 앉으면 되잖아."

나는 힘없이 침대에 다리를 묻었다. 좀 차분해지니, 그제서야 무릎엔 두터운 반깁스가 감겨져 있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쇼코에게 네 잘못 아니니 자책할 필요 없고, 앞으로도 그런 맘은 먹지 말라고 꼭 좀 전해줘라. 그리고 우에노한텐 제발 애먼 애 상대하지 말라고 하고. 그거면 될 것 같아."

"그래, 알겠으니까 제발 누워 이것아."

나는 머뭇거리며 이미 앉힌 몸을 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다. 우에노가 그 말을 듣고 더 기분이 상하면 어쩔까 싶어서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전해버렸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애초에 관건은 니시미야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말을 들은 니시미야는 내게로 병문안을 오겠다고 통보한 후 꽃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오전엔 카토가 와서 드디어 깨어났느냔 말만 담담히 던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증세가 좋아지지 않아쉬이 나카츠카의 잔소리를 들었어야 했는데, 이번엔 병문안 오는 사람들도 많고 여러모로 내가 기절했을 동안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어서 기뻤다.

"전에도 왔었어?"

"감질나게 많이."

그 뜻을 곱씹고 있자니, 카토는 내게 대뜸 물어왔다.

"책 줬는데 봤나?"

선반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놓여 있었다. 있었단 사실도 모를만큼 자연스러운 배치였다.

"아직. 왜 준 거야?"

좁은 침묵이 흘렀다.

"좋아해서."

뭘 좋아한단 말인가. 당연히 책이려니 하고 물끄러미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곤 우리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동안 든 생각은 담배나 피우고 싶다는 거였다. 우리는 늘상 이런 식으로 비참했다. 그리고 정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엔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야해서겠지."

니시미야의 반응도 얼추 비슷했다. 수어도 안하고 묵묵히 나를 보다가 과일이며 도시락 같은 것만 슥 내밀었다. 좋은 오메가 냄새가 났다. 그 정성스레 꾸려진 선물 앞에서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어색하게라도 반응했을 것을, 내가 부러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내 뻣뻣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넌 어때?'

''나 완전 괜찮아.''

우에노와 싸웠느냔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은 모르는 왜 투신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그런 것은 아직 다소 민감할 것 같아 입에 담기 조심스러웠던 까닭이었다.

"이거 싸느라 고생했을텐데. 고맙다 진짜. 딴 애들 다 와도 네가 최고네."

'하여간 먹을 거라면 다 좋지? 딴 애들한테도 그 말 한번씩 한 거 아냐?'

"아니야. 살면서 깨달은 건데 결국 먹을 거 잘 해주는 사람이 최고더라."

내가 쇼코의 양눈을 응시하며 웃었다.

'이렇게 반응 좋을 줄 몰랐는데. 너한테도 잘 싸줘야겠다 앞으로.'

니시미야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 그 말 들었어. 네가 나한테 해준 말.'

"응."

'나 자책 안하는데. 나 걱정했구나?'

"그때 집에서 그랬는데. 당연하지. 당연히. 처음 그거 보고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궁금해?'

"응?"

'솔직히 난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데...그렇게 자살 시도다 뭐다 하니까. 그것 때문에 너 이렇게 병원 신세 지게 만들고. 그래서 그래. 왠지 궁금해할 것 같아서. 그날 거기서 떨어지려고 한 이유.'

"그런 건...쇼코."

맑은 눈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매일 강가를 지나쳐가며 간절하게 죽기를 바랐던 한때가 떠올랐다.

"그런 건 타인이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거야. 겉으로 밝아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그리고 자책할 필요 없어. 너도 알잖아 거기 그렇게 안 높은 거. 다리만 살짝 다쳤다 뿐이지 예전에 자전거 타다 다친 것보다 더 안 아파."

'그래?'

"물론. 이유야 너가 괜찮다면 듣고 싶어."

'이유...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이러는 게 이해가 안가. 어쩔 줄 모르겠어. 무슨 생각으로든 내일은 당장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때도 거기 올라섰던 건데, 막상 엄마가 여기로 온 걸 보니까 도무지, 그와 관련된 얘기조차 입에 담을 수 없어.'

"쉬운 거가 아니잖아. 그치?"

그 애가 차분하게 한숨을 뱉었다.

'정말 정말 어렵지.'

"..."

'나 정말 솔직하게 말할까?'

"원하는 만큼."

'너무 그런데...그때 고백했던 게 좌절되서...그리고 나도 내가 싫어서. 또 나랑 있으면 너랑 네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끊어지듯 뱉어내는 말에는 곤란함이 실려 있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가건만 이게 무슨 소리일까.

"불행해진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너랑 있을 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는데."

'나 때문에 네가 형질도 변했고 초등학교 졸업한 이후로도 계속 힘들어했고 또 우에노랑도 싸웠으니까. 날 만난 후로 웬 알파한테 강간까지 당했으니까. 차라리 날 안 만나면 네가 괜찮아져. 이것 봐. 또 네가 이렇게 입원해버렸잖아. 결국 나 때문이야. 그날 날 잡으려다가 그 반동으로 떨어져버려서 그래. 관람차에서 그 애가 한 말이 맞아. 나 때문이라는 게.'

자책 안한다는 건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스이몬에 있으면서 벌어졌던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그때 난 쓰레기였어. 넌 그때 아무 잘못도 없어, 정말. 그리고 다 네 잘못이 아니야. 강간은 그 새끼가 잘못한 거고. 넌 아무 관련도 없어. 널 잡은 건 내 선택이었고. 그런 걸 갖고 네 탓이라고 뭐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내 생각엔 우에노가 아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애한텐 나카츠카에게 부탁해서 말해뒀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한동안은 그래도 너한테 뭐라고 하진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잘 해볼게. 혹여 그 생각이 머릿속에 쭉 머물러 있는다면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 그때 네게 못할 짓을 해서 내가 지금 널 구하는 걸로 갚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 때문인 거야. 그걸로 순전히 그때의 일들을 만회할 순 없지만. 아 이건 좀 그렇지? 근데 너무 힘들 때 그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이..."

'쇼야!'

"어?"

쇼코는 고개를 저으며 손짓했다.

'갚는다니. 그런 건 정말 싫어.'

"아 미안해. 역시 이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너도 자책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 말은. 나도 안할 테니까, 너도 그만해. 그만. 우리 둘 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 문득 가만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알았어."

'나 이미 할거면. 용서는 진작에 했으니까.'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 널 바라보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지도 못했을 거야. 나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티 많이 내거든. 아마 너도 알겠지.'

"응."

'아무튼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너 덕분에...'

그리고서 쇼코는 목울대를 오르내리며 침을 삼킬 뿐이었다.

"천만에. 나도 와줘서 고마워."

'어머니는 좀 괜찮으셔?'

"어릴 때 하도 험하게 놀아서 이 정도는 사고라고도 생각 안할걸."

'그때 대체 얼마나 야생적이었던 거야?'

"그때 알파였어서 그런가. 오해는 하지 마. 편견은 없어."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어. 알다시피 저번에 오셨을 때, 그때 내가 우에노랑 싸웠거든. 거기 우리 엄마도 합세하셨고...근데 너희 어머님이 그거 다 보고 계셨던 것 같아 아마. 혹시 네가 대신 말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나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고 다만 너무 억울해서. 응어리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또 너한테, 그분한테도 너무 미안하다고. 그렇게 전해드리면 좋을 것 같아.'

"알았어. 싸운 거 많이 신경 쓰였구나."

'응 정말.'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나는 니시미야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았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그 애의 죄책감, 관람차 얘기, 뛰어내렸던 여러가지 이유들. 그 애도 그랬다. 우에노와 내가 싸웠던 것부터 내 마음의 궁극적인 상태까지 깨닫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미약한 통증을 느끼며 입원 기간 동안 카토가 선물해준 조이스의 책을 읽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친구들이 한번씩 들렀다 갔다. 우에노에겐 그때 니시미야와 싸운 얘기를 좀 정확히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곧내 기분이 상한 그 애에게 무시를 당하고 좌절되었다. 시마다는 오지 않았다. 그 애가 그리웠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섹스가 몹시 그리웠는데, 입원 중인 환자한테 좆을 박을만한 애는 하필 그 애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너가 뭔가 자꾸 피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는데."

"뭐를?"

"계속 뭘 감추는 표정으로 끙끙거리잖아. 뭐가 문제야?"

"아니 그런 건 없어."

시선을 피하는 걸 빤히 지켜보던 카토가 내뱉었다.

"거짓말."

그럼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할까. 없다는 말은 보나마나 거짓이었다. 그에게 말하기는 두려웠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쉽사리 자각할 수 없었다. 시마다는 이전 중학교에서의 불편한 기억이 쌓여 외려 편하게 느껴졌으나, 아직 그에게는 내 욕구를 털어놓을 만큼의 거리감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때문에 사실 카토와 섹스하고 싶다는 말을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주지 못한 것이다. 그 억눌림으로 내 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대개 내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라면, 거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동요 없이 묵묵히, 그리고 꾸준한 주기로 병문안을 하러 와줄 뿐이었다. 마치 내가 먼저 말하기를 종용하듯이 말이다. 지금도 그러했다. 떠보듯 물으며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선 좀처럼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지나친 착각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내 감정은 무의식적인 변화에 따라 예민해졌다. 입 밖에 내기를 고심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우에노와는 만나도 딱히 그때 키스당한 것의 사실여부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사실이어도 무안해지고 사실이 아니라면 더 무안해지기 때문이었다.

"요즘 걔랑 만나?"

깎아둔 사과를 서로 나눠 집어먹으며 우에노가 물었다. 의외로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으니 어색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걔라니 누구를. 시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노는 거지."

"그니까 뭐하며 놀길래?"

"글쎄 AV 품평?"

"나 원 참...내가 주선해주긴 했어도 신기하네. 솔직히 가망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너 그런 태도였잖아. 옛날에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친하게 지낼 수가 있나, 하고."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마음 속에 묻어놨을 뿐이었다. 그것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서 얼추 얼버무렸다.

"괜찮은데."

"뭐 하긴 너도 쇼코랑 노니까. 근데 난 좀..."

"응?"

"걔 좀 조심해야 될 것 같아. 시마다 말야. 거기서 만나게 한 거 후회돼."

"왜."

"걔 사람 조종질 존나 잘하잖아. 나 그거 다 들어서 알아. 중학교 때 그런 방면으론 유명했어 걔. 특히 여자애들 주변에서. 연애든 친구든 시마다는 다 그런 식이야. 자기가 무조건 우위를 차지하려 든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우선 너랑 껄끄럽기도 하고."

밝은 햇빛이 병실 너머로 살근살근 숨어 들어왔다. 우에노는 정면으로 내리쬐게끔 트인 창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턱을 괴었다. 나로서는 내심 밟히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그 애의 눈에는 그리 비춰졌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러려니 넘겼던 것이었다.

"평소에 안하던 걱정을 다하고 있어. 괜찮다니까."

그렇게 여러 사람들과 병실에서 대면하는 동안, 나는 수술을 받고 퇴원 절차를 밟아 곧내 병원을 빠져나왔다. 섹스를 이제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그 직후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다리는 여전히 조금 절뚝거리지만 정사를 나눌 때 그렇게 많이 불편할 것 같지도 않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때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가령 카토의 소개를 거치지 않고 짝을 매칭해주는 어플에서 잘 상대나 아무나 골라잡았던 것이라든지. 최소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나섰던 길이었다.

"네. 드디어 나왔어요. 사와카 거리 모텔이요. 네, 아주 가까운 데에요. 미리 술하고 담배 좀 준비해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흥주점이 몰려있는 한산한 거리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보란 듯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기며 나를 마주했다. 사진으로 볼 땐 시마다랑 조금이나마 닮아 있었다. 지금 보니까 전혀 아니었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이며 차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은 분명 가벼웠는데 이제사 조금씩 긴장이 되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놀랐어."

그럼 어떤 이미지로 상상했길래 그런 것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진짜요."

"그럼. 근데 다른 걸로도 놀랐어. 왜 부탁한 거야 이런 건."

"그냥."

내가 얼버무렸다. 오늘따라 상대의 말에 맞춰주며 웃어줄 기력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랬던 건지 반추해보자니,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쁜이 담배도 펴?"

그러자 그가 팔을 허리에 얹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부르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다.

"네."

"어휴...외외네. 수더분하게 생긴 게..."

내가 제일 잘하는 짓은 그런 것밖에 없다는 오싹한 느낌이 등 뒤를 파고들었다. 어쩌면 아픈 다리가 치료되자마자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 하룻밤을 같이 날릴 상대를 찾을 수 있을지, 나로서는 아직도 나 자신의 그 에너지가 부러우면서도 조금 신기했다. 이내 심장 부근이 오소소 아팠다. 섬찟한 감각을 지우고 붐비는 거리 중 난잡하게 세워진 모텔으로 향했다. 이런 만남 뒤에 으레 들기 마련이었던 감정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날이 아니었다. 나는 우뚝 멈춰섰다. 평소 내가 내 기분을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닌데, 지금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섹스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에도 몇번씩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길래 그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사람의 말투보다 더 이상한 사람도 관조적으로 바라보았고, 결국 몸을 합쳤는데, 하필이면 그렇게 미련이 남는 사람도 아니고 고작 하룻밤 섹스만 할 사람을 가리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그래?"

눈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럼 그간의 나는 뭐였을까 하는 질문이 맴돌았다. 걸레짝처럼 내줬던 몸이 이제사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분명 성욕은 솟구치는데 그냥 저 새끼랑 하기 싫은 것에 불과했다. 성욕은 엉뚱한 상대에게로 향하겠다는 확신, 어찌되었든 오늘 나는 저 아저씨에게 박히진 않겠구나 하는 확신, 담배 좀 빼어먹고 아예 모텔 문밖을 빼어나가버리겠다는 확신으로 나는 애써 힘없이 웃어보였다.

"뭐해요?"

"응?"

"가자고요."

방문을 열고 먼저 몸을 씻는 동안, 뻔한 루트였다. 나는 빠르게 로비를 빠져나왔다. 숨이 가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뒤편이 자꾸만 불안해 돌아보지 못하고 걸어나갔다. 미안하다는 감정이나 가령 진짜 싫다는 감상 없이 멍했다. 이윽고 외부의 상쾌한 공기를 거치기가 무섭게 나는 근처 흡연부스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식혀가며 당장 어떤 사람에게 연락을 할지 골라보았다. 손이 조금씩 떨렸다. 내가 지금 당장 보고싶은 사람은 타이시 카토였다. 확신을 굳히자 곧내 전화기를 꺼내들어 발을 굴렸다. 받았다. 일단 무어라고 물을지 미리 정해뒀다.

"뭐해?"

"..."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미세해서 알아채기 어려웠다. 내 숨소리인지 아니면 상대의 숨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 바빠."

잠시간의 침묵 후 그 말이 흐르고선 끊어졌다. 나는 가만히 끊어진 전화기를 붙들다 내뱉었다.

"그래."

아마도 카토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을 것이다. 숨을 다시 길게 쉬었다. 아기를 낳고 싶었다. 아기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이토록 간절하게 맴돌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끙끙거리다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시마다에게 한번 걸었다. 밝은 머리색과 뻗은 다리가 번갈아 겹쳤다. 그의 집은 아무래도, 매일 비어있을 것이다. 바쁜 부모님과 바쁜 이복형 때문일 것이다. 남몰래 수를 세었다. 가벼운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진지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을지 쭉 할 말을 쥐어짜냈다.

"뭐하고 있어?"

"뭐냐? 갑자기 이렇게."

"..."

"말을 해봐."

"너네 집 가도 돼?"

"..."

침묵이 흘렀다.

"더러운데."

녹슨 감정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괜찮아."

"웬일이지? 이상한데."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여유롭게 사근거렸다. 웬일로 친절했다. 이따금씩 시마다가 이럴 기회를 잡아 나는 중학교 때 그와의 사이를 개선하려 부단히 노력했었다. 결국은 그때와 변함이 없는 권위적인 태도가 맘에 들었던 것이지만.

"올거면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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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20 | 조회 : 733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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