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13)

"좆같은 애들하고만 엮이는 것도 능력이란 생각."

갑자기 뚱해졌던 스미히토에게 무슨 생각 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원래는 공부를 하려고 갔던 카페인데 어쩌다 보니 그 애를 발견해서 책만 펴놓고 대화만 하고 있었다.

"걔네 좆같지만 괜찮아."

"좆같지만 괜찮다는 게 무슨 밥 없는 덮밥같은 소리냐. 정신차려. 너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좆질 좀 그만하고 다녀. 그 열정으로 공부했으면 지금 이렇게 끙끙 앓을 일도 없었잖아."

"야, 그건..."

"물론 그런 거 고치기 힘들지, 나도 알아 새끼야. 근데 솔직히 너 힘들다고 생각할 때까지 모텔 안가려는 노력이란 걸 해봤냐고."

"..."

"없지?"

그리고 다시 자기가 보던 문자창으로 시선을 박은 스미히토는 불현듯 아차하는 표정으로 곁눈질을 했다. 아마도 가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던 모양이었다.

"노력...근데 그렇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적당히 고쳐나가자. 앞으로 시간은 뭐 많으니까."

불현듯 차분하고 느릿해진 음성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랑 그리 문자해."

"얘 톳코타이야."

"아직도 사귀나 보네. 네가 그렇게 길게 사귀는 거 처음 본다."

"너도 간만에, 아니 간만에도 아니지. 처음 베타랑 사귀는 거잖아. 그리고 뭔가 좀 복잡하게 됐다며. 삼각관계라나. 그래, 진짜 걔넨 어떻게 된 거야? 싸웠다며."

"카토랑 시마다?"

"응."

"만나려고 했는데 연락도 문자도 안 받고 다들 날 무시하는 것 같아."

"너없이 만나면 존나 무서울 것 같다. 왜 그런 거래. 쓰리썸 쿨하게 허락해준 건 지면서. 오히려 네가 맘에 더 걸렸다면서?"

"내가 원래 겉으론 안 그런 척하고 뒤에선 좋다 그러는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시마다가 이상했던 거지."

이상하다라고 말한 그것만 곱씹었다. 다 얘기했지만 그 얘기만은 하지 않았다. 카토와 시마다가 행한 폭력이 그것이었다. 그 애가 잘못을 행했다는 사실은 분명 알고 있었지만 다만, 다만 나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 그러는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 걔네랑 놀면서 더 활발해진 것 같아서 좋아. 작년엔 되게 조용했잖아."

"그땐 별로 생각도 깊게 안 했고. 차라리 그게 더 낫지. 괜히 옛날 친구들 보니까 잠시 이전처럼 행동하게 된 거야. 그냥 걜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아. 왜 날 갖고 그렇게 지랄들인지 모르겠어."

"넌 정말 모르겠어?"

"응, 모르겠어. 이유가 뭐냐?"

내가 턱을 괴고 뚜렷이 스미히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양 눈을 피해들었다. 서운할 따름이었다.

"이러고도 모르겠다고?"

"응? 뭐가?"

"씨발,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나지막한 욕설을 뱉으며 웃었을 때 주머니 속 전화는 울렸다.

"넌 네가 진짜 재수없는 거 아냐?"

내가 손을 들어보였다. 이내 그의 입이 조그맣게 다물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야, 잠깐만. 전화왔어. 여보세요?"

약간의 침묵을 둔 다음 약간 음질이 안 좋은 그것은 들려왔다.

"나야."

시마다였다. 그 특유의 낮고 둔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의 모든 신경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가 먼저 용건을 꺼내들었다.

"너희 학교 앞으로 올 수 있어?"

"너 왜 그간 전화 안 받았어?"

"..."

"그것부터 대답해."

"계속 생각했어.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카토랑은 어떻게 됐는데?"

"걔가 먼저 문제 일으키기 싫다고 주변엔 아무 말도 안했대. 누가 물어봐도 그냥 무시하더라고."

말문이 막혔다. 그 쪽 부모님이 사고 휘말리는 걸 워낙 싫어하시고 카토도 부모님을 두려워하는 건 알았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뭐 그런...그래도 만나기 싫다고 계속 피하면 어떡해. 일단 봐야지 내가 너희 둘 어떻게 됐는지라도 알 거 아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카토나...너나."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 아냐."

"뭐?"

"아무튼 거기로 와."

"이렇게 갑자기?"

한숨이 들리더니 그가 끊어지는 목소리로 명령하듯 애원했다.

"제발...오라면 와..."

약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래."

"응. 끊는다."

끊어진 전화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오라는데? 학교로."

"자기가 다니는 곳도 아니면서. 그냥 여기 오라고 하지."

"뭐 어때."

내가 별 신경 안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가방을 쌌다. 스미히토와는 카페 앞에서 헤어진 후로 학교까지 길게 걸었다. 자전거가 없었으므로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소비되었다. 그리고 교문 앞으로 도달했을 때, 벌써 해는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재빠르게 져가고 있었다. 시마다는 조용히 거기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 내 쪽을 물끄러미 뒤돌아보았다. 서늘한 눈이었다. 이상하게 카토를 때린 후로는 그가 더 무서워보이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를 때릴 때에도 그렇게 무서워보이진 않았던 사람이 그의 뺨을 때리니 더 두려워졌다.

"왜 이제야 왔어."

"자전거를 안 갖고 와서."

가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느릿하게 일어서 내가 그 쪽으로 다가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반가워서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좀 뛰었더니 숨이 가빴다.

"뭔 말 하게."

"아니. 할 얘긴 다 해준 것 같고 그냥 불렀어."

"새끼. 나 공부하고 있었는데."

공부는 안 했지만 골려먹고 싶어 그렇게 말하니 그의 눈은 더 힘이 없어졌다. 더 졸려 보인다고 해야 맞는 말일 듯 보였다.

"넌 괜찮아?"

"내가 해입을 일이 뭐 있겠어."

"궁금한 거 있는데 그날 왜 그랬던 거야?"

"그날?"

"그래."

"그냥."

그냥이라는 말은 담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담았다. 저 애가 중학생 때도 저런 말을 많이 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 걔 얘긴 하지 말자."

내가 먼저 제안했다. 걔가 누구를 뜻하는지는 시마다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뜻밖의 생기가 감돌았다.

"정말?"

어딘지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그럴 수 있겠어?"

"응. 그럴 수 있지 그럼."

"너 걔 좋아하잖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그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지독하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내가 좋아하긴 왜 좋아해."

내가 똑같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내 딴에야 그렇겠지만 그의 눈에는 당황한 것으로만 비춰질 따름이었다.

"아니야? 이상하다...그 걸레짓은 뭐였어 그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더니, 불현듯 식은땀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걸레짓이라니."

"오메가라지만 심했어 너. 히트사이클도 아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주먹 속 손톱이 깊숙히 파고들게끔 그것을 쥐었다. 부러 힘을 주었다.

"네가 먼저 쓰리썸하자 해서 재밌게 한 거였어."

"..."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오해야. 아니 오해라 한들 네가 시킨 거니까 상관도 없지."

입이 방정이었다. 평소엔 그러지도 않았던 게 카토와 연관되니 오늘만큼은 이상한 방향으로 날뛰었다. 실제로 내가 발정나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 맞아서 솔직히 조금 찔렸다.

"왜 이래?"

"뭘. 네가 나 걸레라 부르면 걸레 할게. 카토도 그렇게 부르는 마당에."

내가 담담한 척 굴자 시마다는 새어나오는 웃음으로 가볍게 웃어버렸다.

"걔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어."

"뭐라는 거야."

"뭐긴."

하여간 다 지랄이라는 말이 맞았다. 작년 가을의 그 애부터 시작해서 이젠 사귀겠다고 지랄을 같이 떨었던 사람이 이랬다. 결국 내가 이상하니까 이런 사람들이 꼬이는 거였다. 내가 이상하기에...그것이 아니라면 별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너 진짜 골때려."

그가 길게 늘어뜨렸던 소매를 걷었다. 어떻게 피하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그대로 그가 갈겨내는 주먹을 받아내었다. 멍청한 건, 내가 그것에 똑같이 대응했다는 것이다. 무식하게 우선 그를 깔아 후려갈기려 시도했다.

"씨발년."

어느새 그의 품에 깔려 뺨에 휘갈기는 주먹을 받아내고 있었다. 양팔이 완력 좋은 손아귀에 붙들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힘이 좋아 금세 피가 났다. 아픈 윗니를 아드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 대를 더 얻어맞게 되었다. 그러다 시마다는 별안간 폭행을 멈추고 내 턱을 쥐어잡았다. 그리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짧은 시간 동안 제가 낸 상처를 살피는 것이었다. 볼까지 불룩하게 잡혔다.

"좆같이 못생겼네. 내가 왜, 왜 이런 새끼랑 씹을 떴을까."

그 모습이 카토가 내 배에 담뱃재를 지지던 모습과 겹쳐지며, 나는 내심 그가 이렇게 천박해진 적이 있었는지를 반추해보았다. 단지 시마다는 몹시 냉소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계획한 일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차이점은 그것 뿐이었다. 그것이 웃겼다. 이런 못생긴 사람과 씹을 뜬 것도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고 자세히 살피기라도 하듯 양눈을 가늘게 해두었다. 피가 묻은 낯으로 웃었다.

"나는 맞을 때가 더 잘생겼는데."

좆같은 소리를 뱉었다. 누가 그랬어?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시마다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울컥 하는 것 같더니 별안간 내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예쁘다는 구닥다리 같은 말과 함께 진득하게 턱을 잡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입을 맞추었다. 이 사람은 제멋대로였다. 혀 또한 제멋대로 입안을 파고들어왔다. 그것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내 생각에 그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하지만 그게 마음에 드니 별다른 불만을 표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싫다고 떼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팔은 내 몸을 틀어막았다. 혓바닥이 숨결을 억제했다. 시마다가 멋대로 움직이는 동안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흘렀다. 적어놓기라도 해야겠다고 잠시간 생각했다. 이런 사람하고 키스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라고 말이다. 숨결이 가쁘게 서로를 찔러두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다고 여겼다. 그의 눈에는 기실 그리 보이겠지만, 내가 늘 그렇듯이 그와의 입맞춤이 좋지 않게 여겨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부어터진 입술과 부어터진 얼굴을 훔치며 집으로 향했을 때 챙겨갔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서 고개를 최대한 숙였다. 그리고선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흙이 묻은 발을 굴려 집 앞으로 당도했을 때, 가방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하루를 가늠해보았다. 다행히도 방학이 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누가 이랬던 거야?"

얼굴에 큼지막한 드레싱밴드와 코붕대까지 붙이고 학교에 왔기에 카토는 그렇게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원래 내가 자주 그랬으므로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가 그 애와 싸워 둘 전부가 나가떨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별 거 아니고 시마다랑 어제 좀 그런 일이 있었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카토의 표정은 금세 싸늘하게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애 잘못은 없어."

"사람을 때렸는데 잘못이 없어?"

"..."

"답답한 새끼 진짜."

"걔 찾아가지 마."

"무슨 상관이야."

"부탁이다. 응?"

"네가 부탁해서 뭐 어쩔 건데."

"..."

입술을 옅게 깨물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든 달라지길 원했던 것 같았다. 나쁜 쪽이 아닌 좋은 쪽을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도 큰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한바탕 그것을 마치고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머리에 들어오는 것은 전무했다. 학교가 파하고 나는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직면해서 말할 생각도 않고 오로지 피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리 마음을 먹자마자 그 애만큼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금세 붙잡혔을 때, 카토는 강압적인 태도로 내게 물었다.

"네가 왜 그때 전화했었던 거야? 그걸 받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걸 받았어야 했어."

중얼거리는 것이 듣기 불편하게 여겨졌다. 이에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래. 그걸 받았어야지. 너 그때 나 받아서 나랑 섹스했어야지."

"너 솔직히 말해."

"뭘."

"내가 시마다 좆되게 만들었으면 좋겠잖아."

"웃기지 마."

"어떻게 너한테 그런 짓 한 놈을 감싸줄 수가 있지?"

뻔뻔했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생각 안하고?"

"웃길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라 시마다가 널 때리는 건 정말 불편하다니까."

"차라리 우발적인 실수였거나 뭐냐, 그 사과라도 해주던가. 그렇게 하고 넘어가."

내가 고개를 들어올려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내리보는 눈이었다. 올려보는 눈이었다. 몇 초간 짤막한 시선이 오갔다.

"솔직히."

"도대체 어느 누가 그런 걸 바라겠어."

"..."

아무래도 마음을 먹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눈이 지나치게 맑아져 있었다. 그리곤, 끝내 그 눈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사 기억이 날 것 같았다. 네가 그런다는 것이 정말 완강한 찬성의 의사로 받아들여진다는 그런 실없는 말을 내 손까지 아프게 쥐고선 얘기했었다.

그날 밤 즈음이었다.

내가

했어

했어

경찰들 와있고 너무춥다 네가 거기 있는ㅈ지궁금하고너무 땀이많이나

거의 다 끝나가

11시 25분이라 찍힌 선명한 글자였다. 나는 어딘가에 이끌린 듯 다급히 옷을 걸쳐입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말 더웠다. 내 신체는 창백하게 달아 있었다. 가쁠 때까지 혹은 폐가 아파올 때까지 뛰어달렸다. 그의 집이 어딘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버스로야 쉽게 갈 수 있었지만 이런 발끝으로 달린다 한들 금세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내달리니 빠르게 카토의 집 앞에 도달했다. 높다란 담장이 쳐져 어떠한 상황도 유추할 수 없는 주변을 서성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이 켜지고 그림자들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움직일 즈음이 되자, 편의점에 들러 세븐스타를 샀다. 불을 붙이자 아주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짝 하고 울렸다. 담배를 물고 두 눈을 아주 크게 떴다. 어린아이처럼 괜히 점프도 해보았다. 결국은 전화기를 꺼내야 했다.

제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려줘

자정으로부터 3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것이 내 유일한 소지품인 것처럼 양손에 깊이 쥐고 이리저리 눌러보았다.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향해 있었다. 3층이었다. 얼마간을 그곳만 바라보았을까. 발코니에서 문득 카토가 그 날렵한 몸체를 드러냈다. 비틀거리는 걸음에는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엉망인 차림새가 어딘지 다쳐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을 길게 쭉 뻗은 나를 발견하고는 웃었다. 냉소적인 웃음이었기에 어떤 의미를 그곳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오늘 7시야 시마다를 때렸어

우리 집엔 야구 방망이 좋은게 많은데 그걸로

다시 돌아갈게

메세지에는 그렇게 씌여져 있었다. 내가 흘끗 발코니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방금 그 소린 뭐야?

아버지가 날 때린 소리야

괜찮아?

왜 걜 때린 거야 왜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바란 일이었다. 내가 뇌까리고 뇌까리며 힘이 풀린 다리를 버티어 섰다. 그러나 점차로 기력이 죽 빠져 끝내는 오므려 벽에 앉아 전화기를 붙듵고 있었다.

말했잖아

시마다는 어떻게 됐어?

그때 너 입원했던 병원에

얼마나 심하게 때린 건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병문안을 가야겠지. 아마도 그래야 할 것이다. 괜스레 치사하게 그는 내게 오지 않았다거나 하는 얘기로 따지게 되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한 모금을 더 빨고 재를 툭툭 털어내었다.

어쩔 거야 이제

걱정하지 마 잘 해결될 거래 합의도. 그 애 부모님도 그렇고 다들 협조적이야 난 때린 거 후회 안해

그래 네맘이지

하긴 그 애 집은 퍽이나 부자였다. 저렇게 폭행하기야 마련이지만, 변호해줄 사람이나 합의할 돈은 금세 금세 생겨나가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나는, 그 새끼 아들같이 말이다. 내가 꽁초를 버리고 마구 비볐다. 상념은 억누를수록 더욱 잘 재발했다. 더 할 말이 없어지고, 카토도 오늘은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으니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단 생각을 굳혔다. 어떤 쪽으로든 나는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불현듯 떠오른 문구 때문이었다. 침을 삼켰다. 목이 몹시 타는 듯 했다. 지금 달리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끝내 손끝에 맺힌 것은 별볼일없는 밤 인사 뿐이었다.

잘 자

내가 무슨 마음인지 나도 모르게 이어붙인 텍스트에는 너도, 라는 답장이 따라붙었다.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서 발을 굴렀다. 그리고 무작정 뛰어보려고 했으나 힘이 나지 않았다. 조금만 여기 있다, 조금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널브러진 꽁초가 보였다. 침 자국이 조금 배여 있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땅에 박았다. 떠오르는 말들은 나의 의사라고는 없이 일관적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결국은 둘 다 이렇게 좆되는 상황을 바란 거였으니까. 차라리 둘 다 그러는 편이 한쪽만 온전한 것보다야 나았다. 그러니 정말 잘됐다.

정말이었다.

허나 어쩌면 그것이 그를 볼 수 있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액의 합의금을 받고 합의를 진행한 후로 카토가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걱정부터 되었다. 그러다 별안간 담임선생이 그 애의 근황을 알렸다. 전학을 갔다고 그랬다. 알리지도 않고 홀연히.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통 없었다. 당연했다. 카토에겐 니시미야나 나 빼고선 달리 이 주변에서 연락하고 다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나는 몇번이나 그 애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노상 받지 않았다.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었다.

"걔네 아빠가 걔 유학 보냈대."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치부하면서도, 뒷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 쫑긋이 귀를 기울였다.

"어디로."

"미국. 정신 좀 차리라고 군사학교 보낸 모양이던데."

"이제 곧 센터시험인데 참 걔도 걔네."

"생긴 건 멀끔하게 생긴 게...사고쳤대잖아."

어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토의 근황에 관해 들려오는 소리는 그것 하나 뿐이었다. 일순, 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언젠가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건데 말이다. 군인이 되는 걸 생각 중이야.''

내가 웃어넘기듯 하자 그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꾸했었다.

''아빠가 그랬어. 군인이 되라는 거야. 내 성격상 그래야 한댔어.''

언젠가 사고를 치겠다고 예언이라도 하듯 얘기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불현듯 그의 모든 말들은 어떠한 선지자의 예언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 귀담아 들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무작정 보내줬을지. 왜 당연히 그 애가 사고를 치고 나면 끝이고, 또 그 애가 나와 멀어지면 상황이 좀 나아지라고 여겼던 것일지. 모든 것이 의문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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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6-06 22:23 | 조회 : 693 목록
작가의 말
구운밤

목소리의 형태 학생편은 여기까지입니다. 성인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 쓰게 된다면 몰아서 올리도록 할게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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