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교주, 마피아4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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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도 없었는데 나에겐 갑자기 목적이 생겼다. 이상하게 이끌리는 이탈리아계 혼혈 마피아에게 도박 땜빵 빚 대신 갚아주기. 그게 버킷리스트에 새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누가봐도 나와 42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끼마귀가 유독 귀신들린 듯 구성지게 날았다. 그리고 그날따라 멋들어졌다. 나는 해와 달이 멋지게 그려진 검은 바탕의 셔츠를 차려입었다. 교회 일이며 마음 속에서 묻어두었던 트라우마며 전부 날아가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묘하게 이끌리는 42를 만나기 전 부리는 자신감일 지도 몰랐다.



"걔 만나지 마십쇼. 전화는 왜 하신 겁니까? 내가 미쳐..."



유다의 잔소리 따위는 여름공기에 가볍게 실려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전도, 교회, 광신도, 연설, 활약, 업무 등으로 어지러이 얽혀 헷갈리는 글자들도 무시하고서 달려갈 정도로 좋았다. 모든 일을 끝마친 11시 밤에 찾아갔다. 왜 좋은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 일에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목을 메고서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기세등등했다.



난 게이도 아닌데.



은행 주변에서 그는 자동차 주변에 몸을 기대서 있었다. 싸게 구입한 성능 안 좋은 중고차였다. 정작 차주의 옷은 아주 말끔한 것이었다. 아직 5월일 뿐인데도 더위는 부리나케 나를 쫓아 발끝까지 포옹하려 작열하는 습기를 보낸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어."



"여기다 대주실 겁니까?"



돈 얘기였다. 돈 얘기만 계속하는데도 밉지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통장을 열어 6000만원을 직구로 박아넣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 파친코에서 구해낸 현금가방을 내밀었다.



"뭡니까?"

"너 미운 거 맞고 뻔뻔할 정도로 돈 얘기만 하는 거 맞는데 그래도 줄게." 어쩐지 유치한 어조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불안한 게 있었다. 도박이었다. 그의 바지에서 도박에 이용한 물품으로 추정되는 칩 두어개가 삐죽 튀나와 있는 것이다. 42는 형식상 고마워하며 잔잔히 말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도박은 끊어."

"예?"

"내 동생 같아서 조언해주는 거야."

"..."

"듣자하니 고작 반오십 넘은 나이던데 벌써부터 도박 같은 거에 발 들이면 큰일나."

"그런 건 조언이 아닙니다."

"무슨."



그것 때문에 폭력까지 당해야 했는데 조언이 아니라니 뭔가 싶었다.



"그런 대형교 교주라 철저한 면도 적잖겠지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뒷조사를 철저하게 안 하셨잖아요."

"그럼 도박중독자가 된 거에 사연 있단 건가?"



그는 긍정하는 대답없이 무미건조한 높낮이로 늘어놓았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 고향에서 가족이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게 겜블이어서요."

"가족은 중요한 게 아녀."

"그럴 리가요."

"결혼이나 가족이나 같이 있는 게 편해야지 금슬 좋다 화목하다 하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가족한테 크게 데인 적 있으신가 봅니다."



뭐?



약간의 노기가 치밀었다. 허나 곧장 생각은 내게 불리한 쪽으로 회로를 틀었다. 어쩌면 노기가 치미는 것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 아닐까.



그 외에도 42의 성격이 싸가지를 아예 갖다버린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았다. 자기네 조직과 내 세력이 껄끄럽다는 점을 이용해먹기도 하고 가끔씩의 만남에서는 늘상 어딘지 삐딱하게 행동했다. 진지하게 울화가 마음을 비집고 나올 때도 많았다. 허나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즈음의 나는 42를 고작 조금 선호하는 이상한 사람1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끔 대화 나누고 재밌네 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통장에 돈을 꽂아주고 나니 예전처럼 미친듯이 생각난다거나 그런 열정적인 열망은 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장마가, 그리고 기나긴 우기가 찾아들었다.



피곤이 잦게 내 몸을 저버렸고 연락은 종일 되지 않아 가끔씩 마음 속에서 '얜 뭐하는 거야' 하고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42고 여름이었다.



그와 여름은 동시대에 훌쩍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비 오는데 문 좀 열어주십시다."

"부탁하는데 싸가지가 없네."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날은 교회에서 막 봉고를 타고 내려와 어깨가 뻐근한 날이었다. 42도 적잖이 힘들어 보였지만 내가 먼저 내뱉었다.



"온 김에 등 좀 두드려."

"뭡니까. 그건. 아저씨 같게."



참 숱하게도 보았던 웃음이었다. 나는 비가 싫은데. 그럼에도 녀석은 비 오는 날 저 혼자 아늑한 집안에 틀어박히거나, 아니면 아예 맞아버리는 게 좋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래도 난 비가 싫었다. 내가 개를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귀찮아서.



"교주님을 만난 이후로 하루가 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 왜 그랬는지 생각해봤는데 너무 재밌어서 아무래도 너무 재밌어서 그런거야."



나는 어색함을 풀려는 목적으로 없던 이유까지 지어내며 답했다.



비가 계속 오면 또 잠시간 물에 푹푹 잠겨버린다. 찌는 더위에 습기부터 비까지 여름은 42가 왔다는 점 빼고 좋은 게 하나도 없어. 나는 혹시 심심하거나 더워할까봐 굳이 그를 신경쓰며 주스를 건넸다. 냉동한 얼음을 세 조각 넣으면 적당히 시원했다.



"교주님은 어떻게 살았어요?"

"너는?"

"교주님 먼저 말하십시오."



할 얘기가 없어서 그러는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이었다. 곤혹스러웠지만 괜시리 감출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 내 교회와 비슷한 곳에서 자랐다. 사이비 교주들 교회. 어쩌면 이 직업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직업이야...이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속절없이 폭력도 당하고 우리 부모님은 돈도 뺏겼으니까.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후에 돈 뽑아낼 곳이 없어서 그런지 난 교회에서 쫓겨났어. 길거리 구르면서 살다가 뒤늦게 고아원 가고 나오자마자 성공한 동급생한테 빌붙었지. 어쩌다 빽 좀 잘타서 교주까지 되고 너까지 만나고 그런 거야."

"정말 행운입니다."

"뭐가?"

"제가 생각해봐도 교주님이 제 마이너스 통장에 돈을 꽂아주신 건 행운입니다."



그가 또 갑작스레 동문서답했다.



"야, 평소처럼 행동해. 갑자기 왜 인사야. 그때는 안 하더니만."

"저기..."

"어?"

"고민이 되는 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가 있다면....정말 극단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둘 다 할 수 없고, 둘 다 안하고 마냥 회피해버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네 얘기냐 라고 단박에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예의가 아니고, 이렇게까지 에둘러 말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보아 최대한 모르는 척 답했다.



"이성적으로 선택해."



"...."



"감정이 주는 건 잘못밖에 없어."

"그럼 사랑도 안 믿습니까?"

"내 과거사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아? 사랑이니 뭐니 하는 노름은 별로야. 그걸 갖고 티격태격 싸우는 건 무엇보다 별로고. 예전에도 말했듯 가족은 중요한 게 아냐. 내 신념과 일맥상통하지."



42의 표정이 굳건이도 굳었다. 녀석은 그런 순간에 적합하지 않았다. 뭐 하여튼 사랑이니 가족이니 인류애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자면 또 자신만의 싸가지를 발산했다.



"즉흥적이신 분이 그런 조언을 하니 썩 잘 어울리십니다."

"왜 이래? 조언해달라며."

"아뇨. 그냥 웃깁니다. 웃겨서 그런 겁니다."



비 오면 이 녀석 성격이 이상해지기라도 하나. 아니면 애들처럼 날씨에 따라 기분이 꿀꿀해지다가 좋아졌다가 하는 녀석인가. 그런 생각이 물밀듯 치고 들어왔다. 42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당황의 연속이었다. 아니면 42 본인이 제일 당황했거나. 그의 얼굴에 짜증이 인 것이 눈에 들었다.



"도대체 왜 그래? 왜 화가 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화내지 마."

"화내지 않았습니다."

"애처럼 왜 그래. 네가 원하는 답이 뭔데? 같이 떠나자고? 아니면 조직을 나가 함께 살자고? 그런 거야?"

"그게 또 뭔 소립니까?"

"자. 진정해봐. 얘기를 돌이켜 볼게. 내 생각에 예전 대화에는 네가 성낼만한 포인트가 전혀 없어."

"...."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 그런 말밖에 없다고."



내가 장난스럽게 짚었다. 42의 얼굴에 순간의 부끄러움을 감지한 사람처럼 붉게 홍조가 일어났다.



"..."

"..."



싸우고 나자니 분위기가 어색했다. 추적추적 파고드는 빗소리와 난자에게로 향하는 정자마냥 창문을 꼬물꼬물 타고 흘러가는 광경만을 감상할 뿐이었다. 사이가 어색하니 굵직한 빗소리가 더욱이 세게 느껴졌다. 침묵을 먼저 깬 이는 42였다.



"제 가정사 얘기를 해드린다면 제가 왜 가족을 중요시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얘기해봐."



비가 울렸다.

여름과 그가 동시대에 온다는 것은 힘겹게 느껴지면서도 아무래도 서로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줄만한 최후의 보루였다.



























-



"왜 그렇게 삽니까?"

"왜 그렇게 살아?"

서로의 가정사며 인생사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막장스럽고 가관이라 절로 터져나온 질문이었다. 일단 42는 진짜배기 마피아답게 불법조직과 연루된 가족 사이에서 난 출신이었다. 엄마가 한국인 쪽이라고 했는데 녀석이 16살일 때 부모는 전부 죽었다고 했다. 누구의 손에? 그를 길러준 조직 프레스까의 손에. 그리고 아주 충격적이게도 지금도 42는 프레스까의 수하에 있었다.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 조직 수하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럼 거기 머물러있냐고 물으면 42는 알 수 없는 미소만 내비치며 웃음지었다. 그래. 내가 영입 제의 받은 이상한 업체였다. 실력이 썩 좋았음에도 여직 말단에 위치한 까닭도 아마 그 사건 때문일 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사연을 듣자니 싸가지 없는 녀석이 왜 가족만 얘기하자면 감성적으로 변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이 그립나?"

"아닙니다. 그런 건."

"뭐야, 그러면."

"어쩌면 교주님 말대로 진짜로 같이 있는 게 편안해서 가족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42는 은근히 철학적인 생각을 자주 했다. 그게 나한테는 도리어 편안했다.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난 날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면 그런 생각을 하면 가까워질 수는 있었다. 가까워지며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사이가 깊숙해져 가는 것도 느껴졌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갔다. 교회 내부의 사정이라든지 하는 것에 관심 놓을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고민하게 되는 일도 수없었다. 하지만 42는 이미 그런 좋은사람이라는 조건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무미건조하게 내뱉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을 때 그의 낯빛은 또다시 새빨갛도록 달아올랐다.



하아. 한숨을 뒤엎으며 나는 정말 게이가 아니라고 마음 속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게이가 맞다. 분명한데. 나도 부정하려 했다.



하아.



하아.



하아.



두 손을 맞잡으면 향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비오는 소리와 잘 어우러져서 좋기도 했다.



우리의 사이는 그 이후 어떠한 정서적 관계를 지나온 것처럼 이상야릇한 기류를 탔다.





"아 그래. 그런 걸 유사섹스라고도 한다지. 그래.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너와 일천번 마음을 나누고 잠자리를 가졌어."





그 말을 내뱉을 뻔해서 나를 미친 듯이 자책했던 적도 있었다.





"도박 그만하라면 그만할 거야?"

"그건 조금..."



내가 말렸음에도 그는 열심히 도박도 했다. 나는 가끔 용돈으로 생각하라며 현금을 쑤셔넣었고 그럴 때마다 42는 삼촌 용돈 받은 조카마냥 좋아했다. 포상으로 내 목을 깨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더 세게 깨물어왔다. 그러면 그가 먼저 항복 선언을 내놓는 게 좋았다. 불법적인 일만 빼면 나름 순수하게 놀아났다. 여자들과 노는 버릇도 고쳤다. 하지만 술과 담배는 여전히 끊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도 42는 둘 다 담배 피우는 거 뭐 어떻겠냐고 웃지도 않으며 우스워했다. 닮은 점이 많다. 담배와 술을 못말리도록 좋아하고 흉하고 구질구질한 것도 못말리도록 좋아한다는 점도...



그사이 5월이 지나고 6월이 지났다. 날씨는 조금 더 무더워졌다. 우리의 사이도 조금 무더워진 느낌이었다. 전화는 전보다 많이 나눴고, 친하게 지낸 기간에 비해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나름 만나기도 적잖이 만났다.



그동안 나는 여실히 일을 하면서 지냈고 내가 생각하기에 42와 나는 아주 바람직한 관계였다. 나도 내 공적인 업무를 처리했고 그도 공적인 일을 했다. 유다의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 범위가 광대해지고 심각해졌지만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유다의 걱정과 달리, 42가 속한 조직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들은 매번 껄끄럽다고만 했지 선공은 안 놓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어쨌든간.



진전리교는 살짝 불안했다. 지금 당장 기로에 놓여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함을 놓았다. 유다가 줄곧 경고했던, 금방 포기하고 마는 즉흥적인 성격이 슬슬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나는 그만큼 무언가에 흠뻑 매료된 상태였다. 나는 내 전부였던 교회를 가뿐히 버리고 버킷리스트 채우는 일에 매달렸다. 가끔 노트를 찢고는 진로를 고민하는 어린이처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적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로맨스 영화는 잘 봤다.



눈물이 는 느낌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의 사이가 조금 더 깊어졌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이라서. 그냥 편안해서. 무언가 닮은 듯 다른 게 좋아서 그랬다. 나는 불안하고 언제 린치를 받을지 모르는 조직보다는 아예 그를 내 자택으로 들여오고 싶어했다. 이 감정이 가족에게서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순간의 감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줄 때 너무도 행복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주어서라도 그를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했다. 그게 어느 정도 통해서 그걸 더 자주 이용했고 나도 그가 날 이용하는 게 좋았다. 떠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바다 보러 갈래?"

"바다는 어떱니까?"



나는 그의 가죽 신발을 벗겼다. 희고 깨끗한 발은 조금 후들거리다가, 푹신하도록 옅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영화에서처럼 넘실넘실 뛰는 것이 아니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야! 육상선수냐? 그만 뛰어가..."

"상쾌합니다."

"..."

"이러면 최소한은."

"뭐라고?"



내가 자꾸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그가 빵 터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상쾌하다고요!"



42는 내가 그동안 본 적 없는 웃음소리로 쾌활하게 웃었다.



나는 열이 나게 쫓아다녔다. 그날이 펜션을 숙박한 날이었고, 그 옅은 모래사장에 불꽃놀이가 펑펑 터진 날이었다. 기분 좋지 않으냐. 물어본 다음 괜스레 심장이 공허해진 것 같았다. 나는 열이 나게 쫓아다닌 다음 열이 나게 씻었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갯내를 맡았다. 5월 여름날에 어울리는 옅은 이불이 어찌 그리 좋았는지. 사람하고 같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 애도 느낄까?



바닷가에서 받은 냉기를 식히려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꼬치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마시멜로를 건네며 나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정말 큰 목표가 생겼다."

"..."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탈리아 여행 가고 싶어."

"예쁩니까?"

"예뻐? 예쁘지. 바다가 보이는 시골에 가서 흰 집에 살고 싶어."

드디어 목표가 생겼다. 목표없이 흘러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살던 내게도 이룰만한 그런 목표가 말이다. 물론 여행을 가려면 내 소중한 교회는 정리하고 떠나야겠지만...



42는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다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교주로 나올 때는 완전 영악해 보였는데 은근히 순진무구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주님이요."

"그래서 같이 갈 거냐?"

"좋아하는 사람이랑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치없긴."

"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가도 만족은 하지."

"..."

"목표를 세운 계기는 영화 때문이야. 그래. 그러면 오늘 그거 보자. 해바라기."



녀석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더니 물었다.



"혹시 게이에요?"

"맘대로 생각해라."



"참..."



집에 돌아가면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다. 같이 볼 영화는 벌써 수십편이나 남아 있었다. 가령 그날로 치면 이탈리아 로맨스 영화 해바라기. 같이 해먹을 요리나. 가령 그날로 치면 자이툰 파스타. 물론 나는 요리를 끔찍하게 못하는 편이어서 잡일 경험이 많은 42가 대신 도와주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그날도 42가 소스를 직접 조리하고 나는 가끔 간만 봐주며 멋들어진 식사를 만들어냈다. 42는 물었다. "그럼 그동안 뭐 드셨습니까?" "라면, 삼각김밥, 배달음식,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햄버거, 즉석 스프나 즉석 카레, 짜장밥. 굳이 반찬이나 밥을 안먹은 이유는 그냥 집밥이 먹고 싶지 않아서야." "왜 먹고 싶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집밥이 싫어졌어." 달그락 소리와 함께 포크가 접시 위 단정히 놓였다. 포크로 돌돌 감았다. 차라리 털실처럼 느끼고 먹으면 나았을 것 같은데.



요리를 먹으며 같이 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눈물이 터져나왔다. 손수건을 필수로 지참해야 됐다. 홍수가 나버릴 정도로 울기 일쑤였다. 특히 연인이 헤어지는 과정에서는 정말 홍수가 나버릴 정도로 울어댔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42와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많은 게 변한 모양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감졍 기복이 잦았고 금새 붕 떠 행복해했다. 그건 특히나 녀석도 심했다.



"난 게이가 아니지만 솔직히 교주님이랑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모순적인 소리를 하는 건 조금 그렇다."

"왜요? 솔직히 말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날 사랑한다는 건 알아. 사귀고 싶다는 것도 알아. 그만해, 그니까."



"그런데..."

"뭐."

"장난 하는 거 아닙니다. 지금."







그렇다고 사람이 그렇게 금방 사랑에 빠질 리는 없었다.







"그럼 같이 살기라도 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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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4-04-02 23:59 | 조회 : 12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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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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