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새로운 만남




제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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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


뚜, 뚜- 고동소리가 크게 울리는 항구. 화물선 하나가 항구에 묶여 있고, 그 아래로 똑같은 백색 연구복을 입은 연구진들이 바삐 짐을 옮기고 있다. 화물선 위에는 가지각색의 컨테이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두 눈을 의심했겠으나, 확실했다. 비좁은 컨테이너들 사이 잔머리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과연 이 방법이 맞을까.’

몇 시간 전, 화양은 생명의 숲 연구 자료들을 싹쓸이 가방에 담고는 항구에 도착했다. 지금 이 배는 한 달에 한 번 연구소 베이스캠프에 자원을 보태러 가는 화물선이었다.

평소 숲에 관심이 많던 화양은 화물선과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에 제법 박식했다. 연구소장이 멍청하게 헛수고를 들일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고통은 하루하루가 흘러갈수록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비는 것은 화양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신은 세상에 없다. 공평과 불공평을 따질 만큼의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가야 해. 안 되는 건 되게 해야 해.’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연구원들이 모두 배 내부로 사라졌다. 화양은 그제야 컨테이너들 사이에서 몸을 꺼내 일어났다. 바로 앞 난간에 몸을 기대니 답답함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어깨까지 간당간당 덮이는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산들거리며 흩날렸다. 바로 밑에서 햇빛에 일렁이는 거친 바다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화양은 금세 눈을 거두었다.

“멋지네.”

그녀가 타고 있는 배는 생명의 숲이 자리 잡고 있는 섬을 목적지로 한창 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섬의 모습은 높게 솟아오른 산이 중심이 되어 넓게 퍼져 있는 모습이었다. 가장자리 부분은 푸르른 숲과 토끼가 뛰어놀 법한 드넓은 초원이, 그 옆으로는 둥근 원을 그리며 훨씬 더 어두운 색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는 모습. 중심부의 산으로부터 밀집된 거칠게 깎인 암벽들이 한 층 분위기를 북돋았다. 광활한 바다와 구름이 넘실넘실 흐르는 탁 트인 하늘도 조화를 이루었다.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빌어먹을 하늘은 맑았다. 평소라면 넋을 놓고 볼 모든 풍경이 모험의 시작이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섬을 보며, 화양은 메고 있던 가방의 가방끈을 꽉 쥐었다.


*
*
*


화양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생명의 숲 땅을 밟고 있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옅은 파도가 신발의 발목 부분까지 닿았다. 가까이서 보니 압도당한다는 말이 확실히 이해가 갔다. 높게 뻗어 올라 안쪽을 가늠도 못할 수십 개의 나무들은 여태껏 봐온 나무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길쭉했다. 왱왱거리며 주위를 맴도는 곤충들은 마냥 신기했으며, 바스락거리는 모래의 감촉은 이게 새삼 현실이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화양은 숨을 한 번 들이키더니 곧장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바스락- 바스락-

쨍쨍한 햇빛이 사방으로 흘러 들어왔다. 낙엽은 밟는 족족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는 매캐한 도심 공기와 차원이 다르게 신선했다. 걸어 다닐 때마다 느껴지는 땅의 감촉마저 색다른 숲에, 화양은 걱정 따위는 훌훌 털어버리며 나침반을 꺼냈다.

“동쪽으로 가면 되겠지?”

아까 전 내린 곳이 섬의 서쪽이라는 걸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놨던 탓일까, 화양은 자신만만하게 걸음 보폭을 넓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중천에 뜬 해는 사라졌으며 밤을 상징하는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떴다.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밝히는 것을 보며, 화양은 보이는 별에 비해 셀 수 없이 많은 이파리들을 불평했다.

숲은 어두웠다. 평소 병을 달고 사는 약한 체력에 무리를 한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상가상으로 머리까지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웠다. 중간 중간마다 숨이 차올라 무릎을 잡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화양은 팔꿈치로 내려온 가방을 원위치로 메며 정신을 다잡았다.

“…!”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지고 열심히 숲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나무 한그루에서 무언가가 재빨리 숨어드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그냥 나뭇가지끼리 부딪혀서 내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별 거 아닌 그 소리에도 화양의 가슴엔 무거운 돌이 얹었다.

배에서 봤던 푸르고 밝은 숲이 점점 무섭고 깜깜히 어두워져갔다. 압도는 압박이 되었고, 압박은 공포로 변했다. 모든 게 다 악령으로 변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나무의 뾰족한 가시가 대왕 거미의 큼지막한 다리 같았다. 작은 발소리에도 어떤 괴생물체가 다가오는 소리인가 깜짝 놀랐다. 심지어 떨어지는 작은 이파리 하나에도 몸을 파득 떨며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눈에 보이는 사물 모든 게 전부 거대한 크기로 변해 그녀를 압도시켰다. 몸통만한 나무들이 양 옆으로 모여들어 없던 폐쇄공포증까지 느꼈다. 사이사이로 지나가고, 몸을 비집어 넣을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감에 띵한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촘촘한 나무들이 미로를 연상시켰다.

‘왜 이러지‥? 혹시 몰라서 오기 전에 약을 두 봉지나 챙겨먹었는데..’

가방을 꼭 움켜쥐며 발을 내딛는 속도를 더 늦췄다. 화양은 산길은커녕 작은 오솔길도 없는 숲에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휴우‥‥”

그렇게 더디게 걷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느덧 사이로 들어가기에도 좁게 자라나 있던 나무들이 듬성듬성 띄워져 있었다. 화양은 압박감에 느꼈던 어지럼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앞으로, 딱 화양의 키까지 솟아올라 있는 나무 수풀이 앞을 가렸다. 화양은 아무 생각 없이 우거진 수풀들을 하나하나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수풀을 옮겨 수풀 뒤 풍경을 보았으나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단지 나무껍질이 정교하게 조각된 굵은 참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는 점과,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 이게 무슨-”
화양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생뚱맞은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져왔고, 화양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화양은 본능적으로 위협감을 느껴 참나무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화양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짜낸 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져갔다. 귓가에 북처럼 울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이성은 뚝 끊겨 한줌에 날아갔다. 화양은 눈을 꼭 감고 피하지 못한다면 한 번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릭- 스슥- 저 멀리에서부터 하얀색 형체가 희미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무언가는, 화양의 코끝까지 다가왔다가 뒤로 몇 발짝 걸음을 옮겨 섰다.

“여긴 우리 사냥터인데, 너 뭐야?”

말발굽 소리의 주인공은 화양의 또래 남짓한 여자아이였다. 외적으로만 보자면, 여자아이는 짐짓 봐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강렬한 신비로움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말 아름다웠다.

‘우- 우와.’

피부는 맑고 깨끗한 건 물론이며 하얗고 점 하나 없었다. 적군을 파악하는 매서운 눈초리는 주눅이 들 만큼 날카로웠으나 색만큼은 한 다발의 수국처럼 하얬으며 보석 같은 광채들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불규칙적으로 낱낱이 퍼져 있었다. 입술은 피처럼 붉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꼬불꼬불한 은빛 머리카락은 새어 들어온 달빛과 함께 은은하게 빛났다. 선선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묻는 말에 대답‥ 잠깐만... 너?”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에, 달려오는 속도까지. 언뜻 봐도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숲에는 인간이 살고 있지 않다. 설령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일지언정 그들이 내는 초인적인 힘은 인간이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

“반인반수 수인이 아닌 거야? 그런데.. 대체 왜…?”

생태계를 깨트리는 강력하고 특이한 종류의 생명체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인간들에게 알려진 생명체이자 연구소의 실험체 대상인, 동물의 특징적인 부분이나 능력이 본래 인간의 모습에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저 생명체들은 바로 반인반수 수인이었다. 수인이라는 걸 확신시키는 여자아이의 목과 팔의 하얀 갈기와 옷 뒤편 풍성한 꼬리가 눈에 띄었다. 아까 전의 말발굽 소리와 달려오는 속도… 아무래도 백마 수인임에 틀림없었다.

“말 못하는 거 보니까 인간 맞네. 우리 종족들을 멋대로 잡아가 온갖 비윤리적인 짓을 해대는! 그런 비열한 인간들 말이야!”

너무 외모에만 홀려들어 있던 탓일까, 화양은 여자아이의 매서운 눈초리가 화양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화양은 이미 엎지른 물을 도로 담는 심정으로 말했다.

“어… 우선 그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미안해. 하지만…”

소녀는 말을 하다가 멈추는 화양을 보며 변명거리를 꾸며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화양은 병실에 누워 있던 엄마를 생각하다 거두절미하고 말을 이어갔다.

“내 엄마가… 많이 아프셔.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선 중심부로 가야 하는데… 훌쩍- 다들 안 믿어 줘서 혼자 구하러 온 거야.”

최근 들어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싶었다. 이미 몇 년 치 울 눈물은 다 흘려보냈다 싶으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화양이 눈시울을 붉힐 때 살짝 머쓱해하더니, 딸꾹질하며 훌쩍이기 시작하자 알겠다며 화양을 토닥여주었다.

“알겠어. 울지 마.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치료약을 구하려면 중심부에 가야 된다고 했지?”

“아.. 어.”

화양은 눈물을 뚝 그치곤 안심하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여자아이는 가녀린 화양의 손을 꽉 잡더니 화양과 눈을 맞췄다. 은색 보석안이 결심한 듯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내가 그곳으로 가도록 도와줄게.”

“정말? 진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의 경계심은 어디 갔냐고 물어보고 싶은 순수함이었다. 화양은 믿음직한 수인 친구가 생겨 전보다 더 안심하며 가방을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정말 고마워! 일단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니까… 아, 우선 통성명부터 해야지. 난 이화양, 너는?”

“백리안.”

화양은 가방 안 찌그러진 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종이가 아닌 생명의 숲 지도였다. 꾸깃꾸깃 구겨지긴 했으나 어디가 어딘지 못 알아챌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내가 나침반이랑 지도를 구해왔거든?”

“와- 인간 세상.. 신세계구나?”

리안은 나침반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모든 물건들을 꺼내 만지고 관찰했다.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 도로 집어넣고선 지도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은 여기인 것 같아. 좀 작긴 해도 말들의 영토야. 그리고 이리로 쭉 직진하면… 보이지?”

리안이 가리킨 곳에는 훨씬 어두운 계열의 색들로 칠해진 제1 위험지역과 밝은 안전지역이었다. 리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 사이 탁한 붉은색 선을 가리켰다. 화양이 갸우뚱하자 리안은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건 붉은 안개야. 이 안에는 산소는커녕 공기 자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돼.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이 빠른 말 수인이 아니면 안쪽으로 진입하기가 어렵지. 너 같은 인간 말고도 이 숲에 사는 수인들의 대다수가 중심부에 가고 싶어 했어. 그러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여럿이 이 붉은 안개 속으로 진입했고, 열에 여덟이 실종되었지.”

화양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달리기가 무지막지하게 빠른 리안이면 몰라도, 화양은 달리는 것에 매우 약했다. 특히 폐활량 검사에 눈에 띄게 낮은 결과를 받았기에 천식 호흡기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리안은 그런 화양을 아기 재우듯 달랬다.

“그렇다고 그리 겁내지 않아도 돼.”

“난 달리기도 못할 뿐만 아니라 천식까지 있는데.. 어떻게 겁을 안 먹겠어‥‥”

“가보면 알아. 나 믿지?”

너무나도 확신하는 표정의 리안에, 화양은 살짝 당황하며 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응. 믿어.”

* * *

둘은 계속해서 평화로운 숲을 거닐었다. 이따금 참새나 토끼 몇 마리가 보였으나, 숲의 모든 생명체가 공격적이지 않았기에 그저 귀엽다는 주접을 떨며 속도를 높였다.

어느덧 발목 밑까지 자욱한 안개가 차올랐다. 지도의 색깔과 안개의 색깔은 놀랍도록 같았다. 붉은 계열의 안개가 탁하고 덩어리진 하얀 안개들과 섞여 색이 더욱 탁해졌다. 존재감이 강하던 검은색 부츠는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발목까지 닿던 안개는 갈수록 차올라 하늘이 보이지 않게 끝없이 늘어졌다. 들어간다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저쪽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응. 숨 많이 참아두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음‥ 놀라지 마.”

화양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리안은 양 손을 머리에 짚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스무 번 즈음 들이키고 내쉬기를 반복한 리안의 손끝이,

“리안아? 허- 허억!”

비정상적으로 모여들어 앞발이 되었다. 머리는 길게 늘어졌고, 머리카락은 풍성한 갈기로 변했다. 머리를 짚었던 두 팔은 땅을 짚었으며 몸은 앞으로 쏠려 가로가 되었다. 순식간에 리안은 보통 말들보다 몇 배나 몸집이 거대한 백마로 변했다.

“이런 변신이 가능했어? 완전 멋지다…!”

푸르릉- 아무래도 말로 변하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리안은 아무 말 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푸르릉대더니 고개를 돌려 등을 가리켰다.

“설마 타라는 거야?”

푸르릉! 리안은 콧소리를 높이며 등을 화양에게 가까이 대었다. 말을 타보는 건 또 처음인데… 화양은 잠시 동안 가방을 안장으로 쓸까 생각하다가 머뭇거리는 행동에 화가 난 리안을 보고 급히 등에 올랐다.

“생각보다 균형 잡기가 어려운... 꺄악!”

리안은 어디를 잡을지 고민하는 화양을 기다려주지 않고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화양은 당황하며 점점 차오르는 안개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눈을 꼭 감았다.

“...!”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완전히 붉은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는 걸 느꼈다. 공기와는 질이 전혀 다른 안개가 온 주위를 에워쌌다. 숨을 꾹 참았을 뿐인데 답답함이 치솟았다.

화양은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는 리안의 등에 고개를 푹 숙여 숨을 참아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며 눈을 떴다.

화양은 탄식조차 하지 못했다. 압박감을 고조되게 만드는 안개들이 눈앞까지 차올라 있었다. 고작 몇 센티미터 떨어진 리안의 등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뿌연 붉은색 주위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는 나무들이 빠르게 달리는 리안 덕에 흐릿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머리가 점점 띵해지기 시작했다.

“으읍...”

숨이 턱턱 막혔으며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시야는 답답했다. 정신이 혼미해졌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아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처럼 정신없어졌다.

“으으..”

시야가 흐릿해지는 게 갈수록 짙어지는 안개 때문인지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방금까지 쌩쌩 달리던 리안도 숨을 참는 게 힘든지 느려졌다. 빨리 가라며 등을 힘차게 두들겼지만 속도는 빨라지기는커녕 더욱 느려졌다.

‘어떡하지?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아아… 이제 더는… 난 폐활량이 안 좋아서 천식 호흡기까지 쓰고 있단… 어?’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는 거의 터덜터덜 걷고 있는 리안의 등에 중심을 제대로 잡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혹시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분명히 천식 호흡기를 가지고 온 기억이 있었다.

‘미치겠네… 대체 어디…’

머리가 토할 정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손가락을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조금씩 밖에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게 정녕 끝인가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엄지손가락을 움직였을 때, 익숙한 둥근 원형 통이 느껴졌다.

“....!”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원형 통을 비집어 꺼내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희미하게 꾹 누름과 동시에 반가운 산소가 폐에 한가득 들어왔다.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누를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천식 호흡기를 연달아 눌렀다. 탁하기는 해도 공기라고 말할 수 있는 산소가 폐를 가득 채웠다.

“리안아! 이거 빨리!”

뒤늦게 쓰러지려는 리안의 입에다가 천식 호흡기를 물려주고는 빠르게 버튼을 눌러주었다. 순간 리안의 등이 꾸불꾸불 움직이더니 우뚝 솟아 일어났다.

“으아!”

화양의 몸이 꼬리 끝까지 쏠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리안은 쓰러진 몸을 부여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식 호흡기로 겨우겨우 숨을 채운 둘은 점점 줄어드는 안개에 안심했다. 안개가 허리 밑으로 줄어들자, 리안은 다시 본래 수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양은 빠르게 내려오다 철퍽 넘어졌다.

“허억- 허억- 콜록!”

분명 안심할 상황임에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곁에서 리안이 숨을 색색거렸다. 화양은 그만 눈을 뜨는 걸 포기하며 기절한다고 말할 수 있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흐릿한 시야가 원상태로 말똥히 돌아왔다. 리안은 옆에서 드르렁거리며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안개를 참기만 해도 버거웠는데, 무려 사람을 등에 지고 달리기까지 하다니. 화양은 리안의 막강한 힘에 감탄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아아- 드디어 제 1 위험지역에..”

위험지역은 그야말로 어둠의 소굴이었다. 어두운 색을 띄는 소나무들이 무성히 자리 잡혀 있었으며 나무들은 약간의 빛이나마 있는 하늘을 가렸다. 밤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숲 깊은 쪽에서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마치 죽음을 알린다는 듯 까악 우는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화양은 기분 탓이겠지만 느껴지는 눈초리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겁을 먹어. 이화양. 네가 선택한 길이야.’

화양은 느낌도 한낱 감정이고 분위기라며 애써 합리화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곁에서 시끄러운 코골이를 하던 리안이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암- 에… 에취! 으으.. 추워.”

칠월임에도 닭살이 오소소 오르는 낮은 기온은 몇 번이고 재채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회복력을 뿜어대는 중심부와 한층 더 가까워진 탓인지 지친 몸이 금방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둘은 두말 않고 위험지역을 걷기 시작했다.

“지형이 휙휙 바뀌네.”

“그러게, 너무 힘들다.”

둘은 어두운 숲을 걷다가 오르막길을 걷고, 다시 평평한 지형을 걷다가 이제는 내리막길을 밟았다. 이상하게 점점 내리막길 경사가 위험할 정도로 가팔라졌다. 하나하나 발걸음 보폭을 줄이며 미끄러운 길을 걷고 있던 와중, 리안이 순간 푹 꺼진 낙엽 구덩이를 밟았다.

“꺄아악!”

“왜 그래 리안… 꺄악!”

화양도 미끄러진 리안에 떠밀려 같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가팔랐던 길은 이제 미끄럼틀이나 다름없었다. 진흙이 온몸에 튀었고, 마찰력에 등이 뜨거워졌다. 화양과 리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이 부웅 떠올라 어딘가로 푹 떨어지는 걸 느꼈다.

“아야‥ 아파라…”

“괜찮아, 화양아? 미안해!”

“괜찮아. 근데 여기… 어디지?”

화양은 자신이 방금 떨어진 구멍을 보려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구멍은 새가 아니면 닿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쪽으로는 그녀도 리안도 무리였다.

“저기로는 못 가겠다. 주위를 좀 둘러보자.”

둘이 위치한 곳은 대충 봐도 확실히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돔 형태의 초록색 미로였다. 이끼와 바위가 주위에 듬성듬성 나 있었고, 진녹색 이파리들과 덩굴들이 위에서부터 길게 이어져 주위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미로 벽들도 죄다 이파리들과 나무줄기였다. 화양은 곧장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리안을 불렀다.

“리안아, 이거 봐봐.”

화양이 손가락으로 초록빛 나무덩굴이 가득 그려진 곳을 가리켰다. 확실히 둘이 위치한 돔 형태의 미로와 비슷했다. 작은 크기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덩굴 미로라는데?”

“더 세부적인 설명은 없어?”

“없어. 그냥 가자. 주저해봤자 시간만 가잖아.”

둘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미로 벽으로 몸을 움직였다. 화양은 예전부터 감 하나는 좋았기에 이번 미로는 쉽게 통과할 거라 생각했다. 여차하면 덩굴들을 타고 올라가 미로의 구조를 보거나, 지나간 길에 표시하며 미로를 걸으면 되니까. 그러나 화양은 정확히 십 분 뒤에,

“꺄아악!”

“뛰어!”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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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11-29 21:05 | 조회 : 330 목록
작가의 말
SoEy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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