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 미로, 그리고 두 수인




제 2화
-
미로, 그리고 두 수인


“허억- 으아아..”

“히- 히익! 대체 왜 자꾸 쫓아오는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화양은 섣불리 발을 내딛은 과거의 선택을 죽도록 후회하며 달렸다. 미로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뿐더러 이곳이 아까 지나쳤던 곳인지, 옳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곳인지 헷갈렸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르르.. 끼엑!”

셀 수 없는 수의 개코 원숭이 떼가, 영토를 침입당해 몹시 화가 난 채 둘을 쫓았다.

몸을 에워싼 수북한 털, 코 주위로 진하게 새겨진 야만인 같은 붉고 푸른 무늬들. 게다가 입을 쩍 벌리고 이해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를 때마다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화양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켜주었다.

“화양아! 빨리!”

속도가 빠른 리안은 벌써 저만치 앞 미로 줄기를 타고 있었다. 화양도 온 힘을 짜내어 벽을 타고 올라갔다. 개코 원숭이들도 둘을 바짝 쫓으며 격렬히 팔을 휘저었다. 벽을 가볍게 뛰어넘고, 덩굴을 운송 수단 마냥 타고 움직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본능이었지만 경외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억- 허억- 이제 더는..”

“아직 지치긴 일러! 다시 뛰어!”

리안은 진작 지쳐 쓰러질 상태인 화양을 끌다시피 붙잡고 미로를 헤집어댔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치려 발버둥 쳐도 원숭이들은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뛰쳐나왔다. 화양은 찰나의 힘까지 짜내어서 미로의 벽을 타고 올라갔다.

“저기.. 저기로 가자…”

화양은 찰나의 눈썰미로 이끼가 가득한 바위 아래 작은 공간을 가리켰다. 둘은 엉금엉금 기어 공간으로 진흙투성이 몸을 숨겼다.

“왜 저렇게 화가 난거지?”

“쉿! 아직 있어..”

리안이 화양의 입을 막으며 근처 덩굴들로 입구를 막았다. 오감에 정신을 쏟아 부으니 개코 원숭이들의 숨소리가 근처에서 어렴풋이 들렸다. 한 마리가 네 발로 기어서 슬금슬금 둘 쪽으로 다가왔다. 화양은 고통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개코 원숭이가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나 저거 책에서 본 적 있어. 개코 원숭이지?”

“맞아. 근데 왜 저렇게 화가 난 거래?”

화양은 리안의 말을 듣고 가방부터 열어 혹시나 놓친 자료가 있는지 종이들을 뒤적거렸다. 마침내 궁금했던 자료가 보였다. 스테이플러로 한 묶음 엮인 종이 다발이었다. 화양은 끝 장을 펼쳤다.

“주로 영토를 침입해서 화가 났거나, 아님 먹이로 사냥할 생각이래. 근데 저것들만 살고 있는 게 아닌가봐. 온갖 종류의 원숭이들이 다 나온대.”

“별 도움 안 되는 정보였네. 나가볼까?”

근처에서 나는 소리가 심장이 콩닥대는 소리일 만큼 주변은 고요했다. 화양은 줄기 사이를 벌려 동태를 살폈다.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면 면상을 후려갈기자고.”

“그냥 안 들키고 조용히 가는 걸로 하자‥ 그게 더 안전하잖아.”

화양은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지만 리안의 표정은 내심 떨떠름했다. 결국 둘의 제안을 같이 이용해보자고 하며, 둘은 줄기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
*
*

그 이후로는 웅장하게 선언했던 것과는 달리 제대로 된 걸음을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다. 둘은 개코 원숭이들의 시야를 피하고, 주위에 난 덩굴들을 이용해 여러모로 성공적인 전진을 거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망상은 몇 분 전 둘이 숨었던 바위 틈새를 다시 발견했을 때 눈 녹듯 사라졌다.

“미로다 보니까 자꾸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나 봐. 아무래도 뭔가를 표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이 색연필로 칠하자.”

둘은 색연필로 군데군데 특정한 부위를 칠하며 발을 옮겼다. 때때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개코 원숭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몸을 숨겼다. 그러나 혼자 떨어져서 다니는 개코 원숭이 몇 마리는 책으로 기절시키거나 시원한 발차기를 날려주었다.

“끼에엑!”

퍼억! 발차기로 명치 한 대를 먹인 리안이 마지막으로 화양이 머리를 내려치길 기다렸다. 화양도 군말 없이 책으로 머리를 내리치려다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언뜻 보았다. 약 먹을 시간이 두 시간도 더 지나 있었다.

“맞다, 약… 으윽!”

순간 머리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화양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곤 풀썩 주저앉았다. 옆에서 리안이 걱정에 차 뭐라 중얼거렸지만, 다리의 일정한 부분에서 징징 아려오는 고통에 묻혔다. 뇌 세포가 모조리 파괴되는 것 같았고, 다리의 근육이란 근육엔 전부 근육통이 오는 듯했다. 끝없는 고통에 화양은 눈을 꼭 감고 고통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화양아! 정신 차려!”

이번에는 흐릿한 시야가 전환되었다. 미로의 우둘투둘한 벽면은 드높은 하늘과 거친 회색빛 암벽으로, 흙먼지가 뽀얗게 올라오는 미로 바닥은 파릇파릇하고 까칠한 잔디로, 눈앞에서 그녀를 걱정하며 급히 구급약품을 뒤적거리는 리안은 머리에 검은 뿔 두 개가 돋아난 여성으로 변했다.

“잠깐만‥ 잠깐만 버텨! 얼른 구급약품을…”

“아아… 아악- 으으...”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에 화양은 편히 눈을 감았다. 환각인 줄로만 알았던 흐릿한 잔상이 더 선명해졌다. 문득 여성의 입이 벌어져 뭔가를 말했다.

“예쁜 내―‥”


잠인지 기절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졸음이 고통과 함께 몰려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성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화양은 시야도 생각도 접으며 정신을 놓으려 했다.

콰아아앙!

“아악- 안‥‥ 내-”

무언가가 충돌해 터지는 커다란 충돌음. 여러 명의 비명 소리와 화양을 끌어안으려다 축 늘어지는 손아귀가 화양의 기절을 막았다. 화양은 시야에 펼쳐지는 포연 연기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눈을 한 번 더 깜빡이니 그녀는 덜컹거리는 자동차 위에 누워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정신이 뚝 끊겼다.

*
*
*

“괜찮겠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대체 얼마 동안 쓰러져 있었던 거지? 게다가 그 흐릿한 잔상은‥‥ 아, 머리 아파...’

딱딱하게 굳은 몸이 뻐근했다. 화양은 가만히 리안과 누군가의 대화를 들으며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안의 얇은 목소리와 변성기 오기 전으로 추정되는 장난스러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상황을 판단하고 벌떡 일어났다.

“어? 화양아, 일어났어?”

“너‥ 너 뭐야?”

목소리의 주인공인 남자아이는 누가 봐도 원숭이 수인이라는 걸 드러내는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눈길이 가는 유독 큰 귀와 흉터투성이 손, 어지러운 갈색 머리칼과 자그마한 진녹색 눈동자가 옆의 리안과 대조되었다.

“여기 사는 주민이다. 이 인간 조무래기야.”

“여‥ 여긴...”

“조용히 해! 올지도 몰라.”

화양은 잠시 띵한 머리를 붙잡고 목까지 흘러내린 땀들을 닦았다. 머리에서 이상한 압박감이 느껴져 머리를 만지자 그건 응급 약품 사용의 올바른 예를 모르는 리안이 급하게 묶은 붕대였다. 상황이 대강 정리되자, 원숭이 수인은 당당한 풍채로 입을 열었다.

“난 이류현. 여기서 살고 있는 원숭이 수인이야. 넌 이화양이지?”

“어…? 어……. 근데 어떻게?”

“아까 전에 네가 쓰러진 뒤 얘가 와서 도와줬어. 이 복잡한 미로가 자기 집이래.”

화양은 잠시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재가동하려 애쓰다 류현이 건넨 손을 맞잡았다. 손에서 흉터들과 굳은살이 느껴졌다. 침을 꼴깍 삼키며 류현이 건넨 질문에 대답했다.

“야, 아까부터 자꾸 내 말 피하는데… 니들 이 미로엔 왜 왔냐?”

눈치 빠른 리안은 화양의 표정을 보고 귓속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화양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구경했다. 탄력 있어 보이는 덩굴들이 작은 원형 형태로 비밀 공간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간을 들키지 않으려고 제법 끼워 맞춘 바위도 보였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류현이 화양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야.”

“왜?”

“너 지금 저 괴물들한테 쫓기고 있다고 했지?”

바위 틈새 너머로 개코 원숭이 대여섯 마리가 보였다. 류현의 노려보는 눈초리가 모든 감정을 표현해주었다. 아무래도 감정과 이성이 있는 원숭이 수‘인’과 그저 본능뿐인 원숭이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리 친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응… 왜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쫓기고 있는 건 맞아.”

“내가 나가는 것까지는 도와줄 수 있는데. 뭐,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해도 되고‥‥.”

연이은 도움에 화양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까지 닿는 걸 느꼈다. 류현은 삐죽 입술을 내밀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쪽 아냐!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른쪽 방향으로!”

양 옆으로 나 있는 샛길, 어디가 옳은 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통로, 심지어 담쟁이덩굴을 들춰야지만 보이는 비밀 통로까지… 그런 통로들을 원숭이들에게 쫓기며 속속 기억해내는 류현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안으로 들어가!”

이번까지만 해도 대체 몇 번째 비밀 통로인지 모르겠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들어가자마자 개코 원숭이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빨리, 어서!”

“허억- 잠깐만...”

화양을 제외한 둘은 그새 엉금엉금 기어서 미로 윗부분으로 향하는 덩굴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는 화양에 아이들이 어서 오라며 재촉했다.

“크윽-”

또다시 머리가 찌릿 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머리와 같이 뼈가 자라나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덜한 고통에 화양은 식은땀을 흘리며 사다리를 올랐다. 머릿속은 대체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채워졌다.

“허억‥ 얘들아, 조금만 쉬면 안..”

“야, 저거 뭐냐?”

흐릿한 초점을 원상태로 돌리려 갖은 고생을 하는 화양과는 달리, 리안과 류현은 눈만 내민 채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양도 고개를 돌려 풍경을 보았다가 깜짝 놀라 잘못 미끄러질 뻔 했다.

“저거 수인 아냐?”

광장처럼 둥근 공터에 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새끼 호랑이 수인 남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먹잇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개코 원숭이들이 괴성을 남발하며 다가가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건 확실했다. 마음속에서 샘솟는 두려움과는 반대로, 화양의 몸은 저절로 벽 윗면을 뛰어 넘어갔다.

“이화양! 너 뭐하는 짓이야…?”

몸을 웅크리고 있던 리안과 류현이 당황하며 얼른 오라 속삭였다. 하지만 화양의 이성은 아려오는 이상한 감각에 지배당한지 오래였다. 평소와는 다른 흐릿한 눈이 리안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분명히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움츠려들고 다시 넓게 퍼지는 감각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몽롱하면서도 마치 약에 취한 것 같은 감각이 뇌 깊숙이 파고들었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뇌리에 쿵쿵 박혔으며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화양은 힘이 끓어오르는 뜨거운 다리로 시험 삼아 옅게 점프했다.

“구해야 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가벼운 몸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자신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인이 있는 정중앙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야!!!”

리안은 금방이라도 실신할 표정으로 이마를 탁 쳤고, 류현은 쓸데없는 영웅놀이 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래, 이건 쓸데없는 영웅놀이이지. 하지만…

“아파 미치겠는데도 가슴이 뛰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그와 동시에 원숭이 떼가 화양을 향해 덤벼들었다. 화양도 펑 터질 것 같은 다리를 높게 치켜세웠다. 다리는 정확히 머리 정중앙으로 향했다. 모든 게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퍼억!

“끼에엑!”

난생 처음 화양의 몸이 그녀 의지대로 움직였다. 뒤에서 거친 손으로 그녀를 붙잡으려는 원숭이들은 똑같이 할퀴었다. 그녀 앞으로 다가오는 원숭이들한테는 발차기를 날렸고, 옆으로 달려오는 것들에게는 팔꿈치로 명치를 갈겨주었다.

“아앗- 쓰읍..”

머리가 후끈거렸고 눈이 풀렸으나 몸은 저절로 움직여졌다. 초보가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는 느낌으로, 화양은 고개를 내리깔고 몸을 돌리기도 하며 공격들을 피해냈다.

“키에엑…”

“왜? 쫄려?”

“크르르!”

조롱에 화가 난 개코 원숭이들이 동시에 그녀한테 달려들었다. 머리로 몸을 감싸며 모든 공격을 피하려던 그 때, 둔탁한 소리를 내며 류현과 리안이 화양에게 달려왔다. 둘은 날카로운 손톱들을 멀리 튕기더니 뒤를 돌아 화양에게 씩씩대었다.

“너 제정신이야? 어? 드디어 미친 거냐고!”

찰싹! 찰싹! 리안이 화양의 등을 속사포 때리며 달려드는 개코 원숭이들을 뒤차기로 쓰러뜨렸다. 류현은 공터 위 덩굴들을 타고 원숭이 떼를 무더기로 밟았다. 화양은 뒤에서 달려오는 개코 원숭이 한 마리를 책으로 강타하며 쓰러져 있던 호랑이 수인을 업었다.

“계속 몰려들고 있어. 쪽수로는 불가능해. 이류현! 출구 어디야!”

“따라와!”

연신 원숭이들을 몰아넣던 류현이 덩굴에서 풀쩍 뛰어내리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화양은 자신보다 달리기를 훨씬 잘하는 리안에게 새끼 수인을 넘기며 류현을 따라 달렸다. 뒤에서 개코 원숭이들이 분노에 가득 차 질주하는 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피하고, 넘고, 뛰었으나 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양은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 질주했다.

“크르르!”

개코 원숭이들이 팔을 마구 휘저으며 화양을 잡으려 애썼다.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양쪽에서 여러 종류의 원숭이들이 그녀에게로 질주했다. 화양은 지치지 않고 쫓아오는 원숭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해야 해… 원숭이들을 막을 게 뭐가 있을까? 이 나뭇잎들이 가득한 미로, 원숭이들을 막으려면... 아!’

화양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 급히 지퍼를 열어 앞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식물들에게는 미안한 짓이지만, 자칫하다가는 화양이 죽는 수가 있었다. 게다가 미로는 충분히 넓었기에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화양은 라이터의 차가운 줄날 바퀴를 단단히 잡았다.

화르륵- 줄날 바퀴를 거칠게 돌리자 불이 일어났다. 화양은 달리면서 좁은 통로의 엉켜 있는 덩굴에 라이터를 가져다 대었다. 불은 덩굴과 덩굴을 타고 순식간에 위로 퍼졌고, 천장까지 닿아 불씨를 떨어뜨렸다. 화양은 불씨를 땅에다 붙여 원숭이들을 못 오게 만들려다 실수로 가방을 놓쳤다. 어쨌거나 가방은 문제가 아니었다.

“크륵.. 크르르…”

벽을 비롯한 모든 통로에 옮겨 붙은 수없이 많은 불에 원숭이들이 쉽사리, 아니, 전혀 다가오지 못했다. 화양은 안심하며 류현, 리안과 함께 마저 달렸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나마 출구가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돼!”

“아악! 내 집! 이화양 너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달리면 달릴수록 출구의 몸집이 커져갔다. 번져가는 불을 보고 화양에게 소리 지르는 류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화양은 이제 자신만 한 출구를 향해 날다시피 뛰어올랐다.

“커헉- 으악!”

“끄아악!”

촤아악- 쿠웅! 뒤로 바짝 붙어 따라온 리안은 호랑이 수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류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져 진흙 범벅이 되었다. 화양은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허억…”

붉고 생동감 있는 불길이 돔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덩굴들이 차츰차츰 타올랐고 그 위로 매캐한 연기가 폴폴 솟아올랐다. 화양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저렇게 활활 타오를 줄은 예상도 못 했는데.”

“뭐, 어쩔 수 없…”

“뭐가 어쩔 수 없어! 내 집! 으아악!”

“시끄러. 그나저나 얘. 이제 괜찮아.”

호랑이 수인은 어느새 일어나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벌벌 떨고 있었다. 쨍쨍한 주황색 머리칼에 볼기짝에 난 검은색 줄무늬 무늬가 귀여운 아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둥그런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수인은 리안의 손을 받침대처럼 이용해 머리를 기대고 살며시 눈을 떴다. 해바라기 같은 초롱초롱한 노란색 눈동자가 주위를 탐색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호랑이 수인은 꾸벅 고개를 내리깔며 공손히 인사했다. 셋은 강렬한 뿌듯함을 느끼며 서로를 화양, 리안, 류현으로 소개했다. 남자아이도 용모를 단정히 가꾸며 말했다.

“전 혜성이에요. 강혜성. 호랑이 수인이고, 제 1 위험지역에서 지내다 실수로 저런 곳에...”

“저래 보여도 내 집이거든? 얼마나 안락했던 곳이었는데… 근데 나 이제 어디서 사냐?”

돔의 절반이 무너지자마자 그 사이로 개코 원숭이 떼가 뛰쳐나와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미로를 에워싸던 넓은 돔은 이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하하‥ 망할.. 그냥 도와주지 말 걸 그랬나 보다.”

망연자실해진 류현을 두고 화양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 세 시 삼십 분이었다. 약을 먹으려 등에서 가방을 꺼내려 했지만 가방은 온데간데없었다. 뒤늦게 그녀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다 실수로 가방을 흘려놓고 그대로 도망쳤다는 걸 깨달았다.

“아 씨 약…! 안 먹으면 계속 아플 텐데!”

화양은 너무나도 멍청한 자신에 이마를 탁탁 내리쳤다. 곁에서 혜성이 귀를 쫑긋거리며 약에 관해 질문했다.

“안 먹으면 아파요?”

화양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프냐고 다시 물어보는 혜성에 화양은 방금 전의 고통을 떠올렸다.

“뼈가 자라나는 기분이고, 모든 뇌세포랑 근육이 파괴되는 그런 기분이야. 특히 정신이 약에 취한 것처럼 빙글빙글 도는... 생각만 해도 끔찍..”

“이상하다? 그거 성장통인데?”

뜻밖의 단어였다. 화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혜성을 흘겨보았다.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화양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누나, 보통 수인들의 모습은 귀나 뿔이 자라나 있잖아요. 그게 자라나기 시작하면 누나가 말한 대로 그런 고통이 와요. 실제로 말이나 치타 수인들은 다리에 심한 근육통이 오기도 하죠. 근데 누나는 인간 아니에요? 왜 수인들이 느끼는 성장통을 느껴요?”

머리에 뭐라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화양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뿔이 자라날지도 모르는 머리 부분을 슬쩍 만졌다.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에이, 너무 갔다. 그냥 약 안 먹어서 생긴 증상이겠지.”

“그래, 그런 거겠지. 얼른 출발하자. 우리는 중심부로 갈 건데. 너희 둘은 어떡할래?”

“뭐 별다른 수 있나? 같이 가는 수밖에.”

“그래요. 같이 가요.”

화양은 픽 웃음 지으며 제2 위험지역에 왔다는 걸 몸소 느꼈다. 차가운 공기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오는지 모르겠는 날카로운 바람이 안면에 내리꽂혔다. 다음 난관은 더 위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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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12-01 15:03 | 조회 : 383 목록
작가의 말
SoEy_10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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