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결국 잠을 하나도 자지 못했다. 알렉스도 마찬가지 였던 것 같다. 밤을 꼴딱 샜다. 그 동안 알렉스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해가 뜨고, 알렉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유진."
"... 응.."


대답하지 않으면 맞을 때가 많아 나는 거의 반자동적으로 알렉스의 부름에 답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날 좀더 세게 안았다. 아팠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움직여도 풀어주지 않을 뿐더러, 그러다가 그에게 맞을지도 모르니까. 알렉스에게 맞으면 정말 아프니까.

그나저나 알렉스는 왜 갑자기 이렇게 대해주는걸까. 내가 언제나 여자들에게 매달려 알렉스에게서 도망갈 때면, 알렉스는 절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질린 여자들이 날 차버리면,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당연스레 알렉스에게로 다시 돌아갔고, 그 다음부터 알렉스는 날 감시하다가 괴롭혔다.

그 낡은 집도, 알렉스가 날 더 쉽게 감시하기 위해 나에게 준 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늘 나를 감시했다. 하지만 나는 알렉스의 곁을 떠난 것 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는 내게 폭력을 휘두르는게 일상이었으니까.

그랬던 알렉스가 이렇게 대해준다는 건 정말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안아만 준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날 내방에 가두고 제 할일을 하러 나갈 것이었다.


"너 저번에 그랬지."
"......?"
"내가 싫다고."


아, 그 때를 이야기 하나보다. 나는 나른하게 눈을 뜨고 알렉스의 품에 안겨있었다. 알렉스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물었다.


"... 아직도 싫어?"


.. 맞아. 아직도 난 네가 싫어. 앞으로도 절대 네가 좋아질 일은 없을거야.

차마 입밖으로는 내뱉지 못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내게 좋은 일이 없으니. 난 말을 삼키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맞을 것이다.


"염색... 다시하자. 검은 머리가 보이네."
"... 그래.."


다행히 알렉스는 다른 말로 바꾸었다. 알렉스가 나를 안아들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걷는게 버겁기는 하지만, 알렉스가 날 안아주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이게 알렉스가 아니라 리타드가 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렉스는 손수 염색약을 가져와 내 머리를 염색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신이나 보였다. 알렉스와 함께하면서 볼 수 있던 그가 기분 좋아보였던 순간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걸까?

머리 염색을 끝낸 알렉스는 내게 밥을 먹여주었다. 여전히 돌 씹는 표정이었다. 알렉스는 내 입가를 닦아주기까지 하며 상냥하게 먹여주었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이번엔 다르게 괴롭히려는 거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려고? 제발 그러지마. 아아, 그래. 내가 리타드를 좋아한다는걸 아니까, 그래서 리타드가 내게 했을만한 행동을 내게 하면서 내가 괴로워 하는걸 즐기려는 거구나. 내 죄책감을 이용해서!

알렉스는 정말 나쁜놈이다.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지?


"흑..."
"..! 뭐야. 왜 울어."


리타드가 너무 보고싶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리타드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계속 울었다. 알렉스는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더니 욕을 지껄이며 방을 나가버렸다. 침실에는 나 혼자남아 울고 있었다.

하! 그것 봐. 네가 아무리 따라하려해도 너는 리타드가 아니야. 리타드는 우는 날 한번도 버리고 간 적이 없으니까.

속으로 그를 원망하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꿈에서 리타드가 나왔다. 알렉스도 나왔다. 내 뒤에는 알렉스가 있었는데 내 팔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평소라면 가만히 그가 잡고있는것을 바라보기만 할 테지만, 눈 앞에 리타드가 있어서 그런지 평소에 없던 용기가 나왔다.


'도와줘, 리타드! 도와줘! 도와줘, 리타드!!'


잠에서 깨는건 순간이었다. 어지러운 정신에 눈을 뜨니 바닥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니 머리가 아팠고, 초점을 맞추니 화난 표정의 알렉스가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직 엉덩이가 아팠음에도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몸을 달달 떨었다. 차마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해 그의 발만 보았다. 이번엔, 이번엔 왜 맞은거지? 잘해주다가 질려서 그런가? 그래서 이제는 평소처럼 때리려고? 아니면 내가 저의 침대에서 자고 있어서? 나 따위가 자고 있어서 그래서 기분이 나빴나?


"..... 미.. 미안해....."


나는 빌었다. 수년간 몸에 익혀져왔던 것. 이번엔 어떻게 할까. 발로 찰까, 아니면 머리채를 잡고 벽에다 박아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뺨을 때릴까. 사실 어떻게 때리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맞는건 똑같았고, 맞아서 아픈것도 똑같았다.

이상하다. 알렉스가 오랫동안 날 때리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왜, 왜그러지.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고..


"... 씨발.."


알렉스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선, 알렉스는 리타드가 준이든 뭐든 다 죽여버린다고 했다. 정말로 리타드를 죽이면 내가 알 수 없는 어렵고 복잡한 일이 발생하겠지만, 그래도 알렉스는 리타드를 죽일 것이다. 리타드가 죽는건 정말 싫다.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는게 더 나아. 그러니 아직 나가는건 보류다.

다시, 다른 걸로. 어차피 알렉스는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으니 알렉스에게 날 놓아달라느니의 말을 하는건 소용없는 일이다. 애초에 알렉스가 무서우니 차마 그런 이야기 자체를 하지 못하겠지만.

그러고보니 난 알렉스를 처음부터 무서워했다. 처음에는 알렉스가 '길츠만' 이라서 무서웠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래, 세리나와 함께 도망쳤다 잡혀들어온 그 날을 기점으로 알렉스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세포 하나하나에서 부터 무서웠다. 왜 그런걸까. 그 때도, 그 이후로도 알렉스는 늘 나를 죽이고 싶다 -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다른 놈들은 재미로 그러는게 보였다. 정말로 죽이면 저들도 위험하니까,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정도만.

근데 알렉스는 달랐다. 정말 죽일 듯이 때렸고, 죽여버리고 싶다는 것 처럼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늘 내탓만을 하시면서 날 미워하고, 때리고, 죽이려고 했다.

알렉스가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모든걸 결정지었다.

알렉스는 날 싫어해. 아버지처럼. 아마 제 여자친구인 세리나와 함께 도망쳐서, 그리고 세리나를 전학까지 보내버렸으니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날 괴롭힌거지. 내가 학교를 자퇴하고, 알렉스는 날 저의 집에 가둬버렸으니까, 아마 그 때부터는 갖고 놀 장난감이 필요했을 지도 몰라. 매일 갖고놀던게 없어지면 누구나 서운할테니까. 날 감시한건, 장난감인 내가 혹시나 어디론가 도망가버릴까, 그래서 즐거움이 없어질까봐.

그렇구나. 알렉스는 세리나를 참 많이 좋아했나보다. 하긴, 세리나는 좋아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여자였으니까. 그러니까 나같이 하찮은것도 반했지. 그리고 알렉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날 많이 싫어했나보다. 이렇게 오랫동안 괴롭히는걸 즐기는걸 보니.


"... 일어나."


알렉스가 내게 다가와 손을 먼저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을 잡으면, 잡으면 나는 계속해서 그의 장난감이 되어버릴텐데. 그러면 또 그 고통을 참아야하겠지.


"... 싫어."


리타드.

내게 있어서 너는 존재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알렉스 앞에서 대놓고 그를 거부했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것조차도 무서워 움찔 거렸지만, 그래도 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다 예상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눈이라도 피하지말자. 알렉스가 내게 다가와 내 시선에 맞추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움찔거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 상처났네. 얼른 치료하자."
"...?"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냐고 이게...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거야? 그렇게 내가 싫은거야? 제발..

알렉스는 나를 치료할 것들을 가져와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잔뜩 긴장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내 머리에 난 상처를 소독해주고, 연고를 바르고 거즈로 덮었다.

알렉스는 정말로 날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서, 그래서 내가 계속 리타드를 떠올려서, 그래서 평생 죄책감에 살게 하려고 그러는구나. 날 좋아한다던 리타드를 버리고 떠났으니, 그 죗값을 이렇게 치르라는 거구나.


"... 하..."
"... 또 왜 우는데."
".흑... 아...."


알렉스가 귀찮다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왜 우냐고. 리타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내 눈물을 직접 닦아주면서, 울지말라고 달래 주었지, 그렇게 강압적으로 울지 말라는 듯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 했다.


".. 어딜가. 왜, 그새끼한테 가려고?!"
".... 내방."
"거기가 왜 방.."


알렉스는 말을 잊지 못했다. 거기는 방이 아니라 창고였던 곳이다. 춥고, 어두워 아무도 없어 외로운 곳. 알렉스는 내 팔을 잡아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제 거기 가지마. 여기 있어."
".... 왜..?"
"........ 거긴 방 아니야."
"거기가 방이라며. 나한테는 그정도가 맞다며..."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알렉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나가려고 하자, 알렉스가 더 세게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침대에 패대기쳤다.


"으..!"


엉덩이가 아프고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아픔에 인상을 찌푸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런거 아니야."


알렉스는 내 목을 물었다. 또 하려는건가? 아직 아픈데.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는 하얀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내 몸을 빠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가 전부 구더기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더러웠다.

2
이번 화 신고 2017-09-24 19:44 | 조회 : 2,441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 다, 다음화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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